K-고3의 우당탕탕 유학 일기
2004년 초봄, 나는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낮이면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창 밖을 바라보면 사계절 푸르름이 끊이지 않으며 웃음이 가득한 곳이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 고향의 재개발 문제로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 집은 창문 아래로 사과 꽃이 피고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나는 이방인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공부를 안 해도 수업 시간에 들은 것으로 100점을 받았던 예전의 중학교와는 다르게 서울의 중학교는 엄격한 곳이었다. 성적으로 반을 나누고 어울리는 아이들의 무리가 갈렸다. 일직선으로 보였던 나의 미래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같은 지역의 자사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나서서 글 쓰고 말하는 것은 무척 좋아하던 것이라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통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중학교 때 여러 가지 동아리에 들어가고 꾸준히 대회에서 상을 받은 것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아, 너 합격이래!" 엄마에게서 걸려온 그 전화를 받고서야 내가 서울에 받아들여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분명 성취감 이상의 감정이었다. 현실감 없이 미지근한 바닷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던 마음이 다시 미래를 향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물어도 스카이에 들어갈 거라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가슴이 뛰었다.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꿈과 포부로 가슴의 고동은 점점 커져갔다.
그대로 계속 밝은 나날들이 이어졌으면 좋았을 테지만 대한민국의 입시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모의고사는 전교 24등을 하는 등 순항이었지만 수시는 계속 등급이 떨어지기만 했다. 마음이 무겁고 이유 모를 부채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 학생이니까." 그렇게 나는 자기 암시를 하며 인터넷으로, 게임으로, 친구들에게로 도망쳤다.
지난 2년을 뒤돌아 보자면 평화로웠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눈에 막이 씐 것처럼 마음을 비운 채 빈둥거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바뀌고 싶었지만 바뀌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닌 모의고사 점수에 매달리며 이 정도면 괜찮아, 지금이라도 하면 서울대는 껌이지,라고 되뇌는 시간만 점점 늘어났다. 학원을 다 끊고, 엄마 아빠에게는 "나 괜찮아, 잘하고 있어. 걱정 마"를 외치는 시간들만...
그래서 행복했나?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자면, 부끄럽게도 그랬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깔깔 웃고 생산성 없는 이야기로 야자 시간을 꽉 채우고 저녁을 먹고 운동장을 걷는 추억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방학에는 푸른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거실에 누워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를 질릴 때까지 듣다가 잠들기도 했다. 좋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도 했고, 원하는 글을 쓰고 싶은 대로 쓰기도 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완전히 잊고 온전히 나의 쾌락에만 집중하는 생활이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나 사회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보다 잘하는 것은 더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내 성향은 그대로 성적표에 나타났다. 수학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아득한 공포를 느꼈다. 고2 11월... 나 정말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대학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지 대입조차도 요령껏 때우려는 내가 가도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이 메어왔다. 항상 타고 집에 오던 버스의 덜컹거림이 그날따라 크게 들렸다. 심장과 버스의 타이어가 연결된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한강을 건너가는데 마스크 안에서 나는 나의 숨 냄새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겨울철의 메마른 흙냄새와 좌석의 고무 냄새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칼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버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이 서린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있던 시야가 순간 생생한 겨울의 냄새와 함께 현실을 불러왔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런 사명감과도 같은 큰 충격이 마음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내 생활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나약한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날, 엄마와 아빠가 나를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예쁜 장미 정원이 딸린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동네에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언덕에 위치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종종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기도 하는 작은 가게였다. 나는 외식을 한다는 생각에 들떴었고 아무 생각도 없이 신나기만 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막 자리를 일어나려는데 엄마가 말했다.
"유학 갈래?"
심장이 떨어졌다.
"어디로요...?"
엄마 아빠가 마침내 나에게 질려 버렸구나. 포기한 걸까? 내가 한국 입시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구나. 어째서?라고 묻기에는 지난날들이 순간 시야 위로 겹쳐 보여 그저 눈물만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평범하게 행동하고 싶었는데 목이 아플 정도로 메어 왔다.
"캐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에 들어가 유학에 가기 싫다는 취지의 입장문을 워드로 A4 4쪽 분량만큼 썼다. 나는 한국을 떠날 수 없어. 그리고 이 학교를 떠날 수 없다. 그걸 빼면 나한테 남는 게 뭔데? 캐나다에 가서 뭐, 도피유학이라도 보내려는 거야? 나는 그렇게 전락할 수는 없어. 나는....
유치원 때 원피스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선두로 나루토, 블리치, 기생수 등을 보며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운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는 " 노력, 우정, 그리고 승리".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 최고가 될 것이다 외치는 그들이 너무나도 반짝거려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부모가 한국 입시에서 낙오 될 것 같은 자식을 해외로 돌려서 "영어라도" 되게 만드는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종류의 것이었단 말이다. 최고는커녕 최악이었다. 한순간에 벼랑에서 떠밀린 것만 같았다. 한동안 마음을 다잡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해이한 생활에 한껏 말랑해진 마음이 눈물을 쏟아냈다. 머릿속에서 홍수가 일어난 것 같았다. 아프고,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그날 밤에 엄마와 아빠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도 정체 없이 흔들렸다. 지금도 후회하는 것은 그때 좀 더 잘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좀 더 강렬히 항의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얼마나 나약하고 멍청했는가.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라는 말도 있으나 그때 나는 완전히 멱살을 잡혀 도축장에 떠밀리고 있었다. 도축장이라고 하면 큰 결심을 하고 유학을 보낼 결심을 하신 엄마 아빠께는 실례이겠으나 마음만은 그랬다. 더군다나 심지어 당신들께서는 캐나다에서 어떻게 대학을 가는지, 딸가 지금 이 영어 성적으로 가면 어떻게 되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엄마와 대화를 할수록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온몸이 부글부글 용암처럼 분노와 실망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끓어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유학 보낼 생각을 해?"
엄마는 가방과 핸드폰을 챙기더니 홀연히 집을 떠났다. 다 너를 위한 것인데 왜 따지고 드냐는 것이었다. 아빠는 중간에서 조용히 있었지만 엄마가 나가고 난 후로는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엄마 아빠가 힘든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오신 건 알아요. 하지만 왜 내게 결핍을 가르치려고 하세요? 잘할 수 있어요. 한 번만 더 믿어 주세요. 아빠, 제발... 한국에 있고 싶어요. 수능을 망치면 바로 공무원 시험 준비할게요. 제발. 하지만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었고 엄마가 나가기 전 한 말만이 내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백점이 척척 나오는 천재도 아니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리 사니? 호강에 겨워 요강을 깨는구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미 눈은 눈물에 젖어 빨갛게 짓눌렸다. 맞아, 엄마. 나는 항상 천재가 되고 싶었지만 엄마 말대로 천재가 아니야. 사실 천재는커녕 운만 좋은 바보일지도 몰라. 가족과 학교를 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보다 슬픈 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거야.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어째서 나는...
엄마에게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엄마가 돌아왔다. 그렇게 나의 캐나다 유학행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