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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샬롯H Nov 07. 2022

어느 국제커플의 이별

*팍스: 시민 연대 조약(이하 팍스로 명명. PACS: Pacte Civile de Solidarité). 팍스는 이성, 또는 동성의 성인 두 명이 만나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프랑스만의 일종의 사실혼 보장 제도이다.


발레를 하다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 H 씨. 처음엔 원래 내 성격대로 경계를 좀 했지만, 나름대로 죽이 잘 맞아 몇 주간 재미있게 어울려 지냈다. H 씨는 프랑스엔 오래 사귄 남자 친구를 만나려고 왔다. 둘은 이미 제3국에서 2년 정도 같이 살았고, 코로나 때문에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롱디 커플이 된 케이스였다.


처음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추후 프랑스에 직장을 구해 다시 올 예정이라고 했지만, 나는 둘이 이미 같이 살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정도로 진지한 사이라면 팍스가 훨씬 좋지 않겠느냐고 팍스를 권했다. 물론 파리가 아닌 도시에서 영어로만, 그것도 학위가 없는 분야에서 일을 구할 수 있을 거란 말이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려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너무 복잡하게 느껴져서 팍스는 염두하지 않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어렵다면 한국에서의 비자 신청을 할 때가 조금 복잡할 수 있으나 팍스 자체는 어렵지 않다고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이미 여행 기간이 한 달 넘게 지났으니 시청에도 스케줄이 될지 알아보고 시간이 안 된다면 돈이 들지만 공증 사무소(cabinet de notaire)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때 이미 팍스를 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남자 친구의 의지에 가깝고 H 씨는 그에 무의식 중에 수긍했으리라 짐작하긴 했다.


며칠 후 발레 수업이 끝난 후 그녀와 짧은 대화를 했다. 남자 친구에게 팍스 얘길 꺼내니 그간 태도와 달리 갑자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 때문에 둘 사이엔 냉전의 기운이 흐르며, 그녀 자신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했다. 역시나(?) 알고 보니 그녀의 남자 친구는 과거 팍스를 했다가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며 팍스를 파기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소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H 씨에게 나는 그것은 과거 그와 전 여자 친구의 일이며 그가 스스로 해결할 일이지, 그의 과거 경험의 부정적 결과를 H 씨가 무조건적으로 감당하거나 이해해 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같은 사람이 아닌데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자기와 이미 얼마간 함께 산 여자에 대해 그렇게 나온다니 나까지 조금 화가 나는 것이었다.


며칠이 또 지나자 결국 팍스를 하기로 했다면서 H 씨는 나에게 공증 사무소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프로세스에 대한 긴 설명을 붙여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녀는 그러고도 남자 친구가 만들어 달라는 서류를 세월아 네월아 미룬다고 속이 터진다고 했다. 사무소 연락도 미뤄서 그의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가는 기차에서 반 강제로 예약을 시켰다고 말이다.


그 후 나름 바빠서 일주일 정도 연락 없이 지났을까? 그녀는 발레 수업에서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불쑥 다음 주에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팍스를 하지 않기로 했고 비행기 귀국 표를 연장하지 않았다고.


카페에서


그래서 나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녀를 며칠 후 카페에서 따로 만났다. 그녀는 팍스를 '시도'하려던 노력을 했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그가 한국에 여름에 오기로 했다면서 유예 기간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정규직으로 전환이 되었고 심적으로 스트레스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덧붙였다.


나는 나름대로 내 경험과 주변 사람 얘길 해주며 본인이 현재 과한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여기 와서 산다면 한국인 친구가 생겨 좋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려있는지도 모르는 때엔 올바른 조언을 해주는 내 소신을 따르기로 했다.


이런 식의 설득은 안 통하는 경우가 많아 기대하지 않았으나, H 씨는 내 말을 잘 알아들은 모양이다. 며칠 뒤 결국 헤어졌다고 내게 연락이 왔다. 다른 친구들의 경험과 자기 자신의 과거 연애 경험 역시 생각해 보았고, 결국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하다가 남자 친구의 '몰라'라는 말에 마침내 폭발해버렸다고 말이다.




나도 예전 남자 친구 중 한 명과 결혼 이야기가 오가다가 헤어진 적이 있다. 우리 관계엔 문제가 생긴 지 오래라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이별을 이야기하지 않는 그와의 관계는 질질 끌려가듯 이어졌다. '결혼하면, 같이 살면 모든 것은 해결되겠지?'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내가 그를 만나러 세 번이나 유럽에 가는 동안 그는 한국에 오는 것을 완전히 멈췄다. 자기 일이 힘들다고 이해해달라는 말을 수년간 반복했고 나는 얌전히 그를 이해해주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함의 결정체였고, 겁쟁이였다. 이미 결혼 이야기가 시작된 지 4개월이나 지나고 나서야 갑자기 자신은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며, 살얼음 같던 우리 관계의 신뢰를 깨버려 그와의 관계도 마침내 끝이 났다.


사실 바로 끝이 나지도 않았다. 나는 그에게 시간을 주겠다며 또 3, 4개월 정도 기다려줬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관계는 끝이라고 선언했고, 그제야 정말 끝이 났다.


"왜 너만 힘들고, 나만 너를 이해해줘야 돼? 우린 커플인데 너도 나를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잖아. 사랑이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는 게 아니고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해주려고 노력하는 거야. 너는 맨날 말만 노력한다고 하고 행동은 없어.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야."


나는 H 씨 (전) 남자 친구의 처사에 내심 꽤 분개하면서도 최대한 감정은 절제한 채 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와선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이별이란 결정에 1g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이미 한국 여자와 국제결혼을 한 프랑스 지인과 이야기하다가 그 역시 최근 엄청나게 비슷한 케이스를 봤다고 했다. 여자는 한국인, 남자는 프랑스인으로 똑같이 코로나로 인해 각자 본국으로 돌아갔고 여자가 최근 프랑스로 남자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남자 쪽에서 팍스를 하기 싫어해서 결국 여자가 갑자기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 많은 도시를 이사 다니며 살았지만 그때마다 비슷한 경우를 꼭 봤다고 했다. 남자인 자기 눈에는 유럽인이 문제인지 남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사실 여자 쪽의 일방적 배려와 노력으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고마운 줄도 모르며, 또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미루고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며 말이다.


나는 항상 내가 또마와 살아도 되겠다는 결정은 한 것은 내 과거 경험을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는 몇 초 만에 팍스에 동의했고, 당일 서류를 만드는 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질이 매우 드물다는 것 역시 말이다.


H 씨는 한국에 가고도 연락을 지속하고 있다. 언젠가 한국, 프랑스 또는 다른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디서든 그녀가 똑 부러지게 잘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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