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도 나보다는 부지런하겠다
여름 방학에 계획했던 일정들을 거의 모두 소화했다. 끝장나게 바쁜 방학 직전을 하루살이처럼 버티고 나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을 맞이하면 바로 에너지가 풀 충전될 줄 알았던 것인지, 무리하게 연달아 잡아놓았던 세 개의 여행도, 중간중간 방학마다 봐야 하는 사람들과의 약속도 다 마무리했다.
지금부터 개학까지 약 2주간의 기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드디어, 이제야, 이번 방학의 본질적이고도 오로지 나만을 위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그동안 못 그렸던 그림도 그리고 읽고 싶었던 책들도 왕창 읽고, 언제 세상에 나올지 모르는 나만의 책도 꼼지락꼼지락 써보는 그런 시간.
그래서 그 귀중한 기간의 첫 날인 오늘을 어떻게 보냈느냐면, 정오가 되기 30분 전에야 겨우 일어났다가 다시 잠에 들어 세시쯤 첫 끼니를 때웠고, 나름 역류성 식도염을 예방하겠다고 두 시간 정도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또다시 누워서 낮잠을 한두 시간 정도 잤다. 갑작스레 걸려온 학부모의 전화에 놀라서 깨고는 자다 깬 사람의 목소리를 절대로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큼 흠 흠 목을 열심히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물론 누가 봐도 자다 깬 사람의 목소리로 통화를 마쳤다. 정주행 하던 드라마가 있어 패드로 틀어놓곤 휴대폰으로 sns를 하느라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중간에 교장 선생님의 전화가 와서 잠시 노트북을 켜 일을 했다. 저녁을 해 먹긴 귀찮아서 컵누들에 계란 후라이, 논알콜 맥주를 마셨고, 지금까지 계속 유튜브-인스타그램-페이스북-카카오톡을 전전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를 요약하자면,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고 쓰는 등의 활동에는 단 1분도 소비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시간이 왔음에 기뻐했는데 정작 나를 위해 쓴 시간이 있기는 한가 싶다. 하루의 반절 이상을 낮잠 자는데 썼고, 나머지 반절은 먹고 소화시키는 데 썼다. 동물 같은 하루다. 어쩌면 동물이 나보다는 부지런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흘러간 하루, 어쩔 수 없다. 그냥 남은 시간도 마침 업데이트된 예능이나 보면서 끝내야겠다. 내일은 뭐라도 하겠지, 하는 마음을 갖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