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지뢰밭 걷기의 연속이다.
뇌관을 피하려고 까치발 걸음을 걸어도 엉뚱한 곳에서 대형사고가 터진다.
부모가 생각하는 자신의 부모 됨과 자녀가 생각하는 부모의 부모 됨의 상관관계가 낮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수록,
자녀가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에요’ 반박할수록,
이해는 고갈되고 오해는 풍성해진다.
가정의 달 5월이면 ‘어머니 은혜’ 만큼 흔하게 듣는 노래가 김소월의 원작시에 곡조를 붙인 ‘부모’라는 노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작가 정재찬 (2015, 시를 잊은 그대에게)은 ‘알아보리라’라는 작고 소박한 희구를 담아 끝을 맺는 노래와는 다르게 ‘알아보랴?’라는 다소 애매한 의문으로 마무리한 원래의 싯말에 주목한다.
김소월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이 시가 그저 달콤하고 서정적일 수만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돌발적 사고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려 정신을 놓아버린 아버지,
남편의 빈자리를 아들로 채우려는 듯 집착하는 어머니, 완고한 할아버지,
불운한 집안의 여인들, 올망졸망 달린 처자식,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식민의 시대에 가로 놓인 가난.
아버지의 부재 아닌 듯한 부재와 어머니의 맹목적 사랑이, 김소월의 시 ‘부모’의 배경이다.
부모가 되어서나 알아볼거나, 아니 알아나 질거나, 부모와 자식이라는 질긴 인연.
결국, 김소월은 자살인지, 약물 과다복용인지 요절로 삶을 마감했다.
자식을 쓰러뜨리는 부모도 있고 일으키는 부모도 있다.
자식을 쓰러뜨린 부모도 일부러 그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신이 가졌던 부모와의 관계는 자신의 아이와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하며
뒤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진다.
나의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나는 어떤 아이였는가.
나는 어떤 부모가 되었는가.
몇 년 전 결혼기념일의 내 일기는 환한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결혼 26주년.
생산의 계절에 일구었던 다리 부러진 딸과 사회주의 딸이 같이 했다.
따뜻하고 한결같은 아빠와 내 멋대로가 모토인 엄마는 이런 애들을 키웠구나 새삼 신기했던 시간.
얼마간은 아이들을 일으키고, 얼마간은 나도 모르게 쓰러뜨리는 일을 반복했던 것 같다.
왜 늘 힘을 주는 엄마가 되지 못했을까.
반성도 루틴이 되어버린 세월 속에서
어엿한 사회인이 된 딸들을 본다.
그 발랄함 속에 감추어진 아득한 슬픔의 조각은 내가 엄마로서 찍어놓은 인장이 아닐까 섬뜩하다.
우리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다면 안타까운 세대 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