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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 Jul 08. 2022

손 편지로 연애하다

스믈 넷, 드디어 나도 남자 친구란 걸 갖게 되었다. 

날마다 폭죽이 터지는 나날이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호주와 한국 장거리 연애를 했다.  

이메일도, SNS도, 카톡도 없던 때였다. 지금은 공짜이거나 국내 전화 값인 국제전화도 그 때는 무척 비쌌다. 

우린 매일 편지를 썼다.

그래도 그리움이 금단현상처럼 느껴지는 날은 밤을 넘겨 전화로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화 내용도 가관이었다. 서로 이름 부르며 두 시간을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달은 직장인 평균 한 달 급여가 넘는 전화비를 내기도 했다 (엄마가 알까봐 전화고지서를 인터셉트해야하는 고충을 말해 뭘하랴). 


전화비 내느라 태어나서 처음 알바도 해봤다. 건강보험 데이터 입력하는 일이었다. 친구랑 새벽에 만나, 하루는 나의 차로, 다음 날은 친구의 차로 한 시간 반 가량 경기도 모처로 운전해 가서 하루 종일 일했다. 친구랑 옛날 얘기할 때면 우리가 국민건강보험의 초석을 다졌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상당히 고액 알바였는데, 100% 전화비로 나갔다.  


학생으로서 부담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는 손편지였다. 

컴퓨터가 있기는 했지만, 타이핑해서 프린트 아웃해서 보낸 적은 없다. 그건 오직 공부할 때나 쓰는 거라 여겼나 보다. 아니 그에게 컴퓨터로 말을 걸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일 손목이 부러져라 편지를 쓰고, 편지지가 못마땅한 날은 아예 노트를 사다가 그 노트를 채우느라 밤을 하얗게 태웠다. 정말 강도 높은 사랑의 노동이었다.


편지 쓰느라 대학원 졸업시험도 떨어져서 한 학기를 꿇었다.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시험이라는 걸 떨어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수 신입생 장학금을 받고 입학해서 거의 매 학기 우수장학금을 받았는데, 개나 소나 붙는 대학원 졸업시험에 떨어진 건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긴 하다. 게다가 과조교였으니, 망신살이, 망신살이... 그런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오직 그날 영혼의 양식인 편지를 써서 보낼 일만 나의 생각을 채웠다. 대학원 졸업시험은 떨어졌어도 논문은 동기 중에 제일 먼저 썼는데, 그래야 휴가 받아 한국에 오는 남자 친구를 편안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늦배운 도둑질에 날밤 새는 줄 모른다고, 딱 내 얘기였다. 엄마는, 낮에는 편지질로, 저녁에는 문앞에서 편지기다린다고, 밤중에는 소곤소곤하는 전화로 하루를 보내는 딸이 좀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그날 해야 할 사랑의 노동을 해야 했다. 편지 쓰고, 전화하고, 그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마르는 마음을 부여잡는 노동. 


그 노동의 결실로 결혼을 하고,

두 딸을 낳고, 

은퇴를 목전에 둔 남편과 늙어가고 있다.


몇 년 전, 집을 정리하던 중, 우리가 나누었던 700통이 넘는 편지 (남편도 나도 1년 간 매일 편지를 썼으니까)를 발견했다. 남편이 내게 보낸 편지가 봉투 채로, 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날짜별로 투명 파일에 정리되어서 큰 박스에 함께 담겨 있었다.


남편의 편지는 남편이 매일 내게 조곤조곤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내 편지를 보면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에구 조금 기다리면 만날 건데 뭘 그리 안타까웠어? 세월 후딱 갈 텐데."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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