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보는 드라마는 ‘썸타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다. 썸이라는 말은 대충 감은 오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썸은 경제적이다; 연애라는 부담은 없지만 설렘이 있는 관계이기 때문.
썸은 안전하다; 헤어질 때 상처를 최소화하기 때문.
썸은 편리하다; 관계의 후퇴 혹은 무화까지도 큰 저항 없이 진행할 수 있기 때문.
썸은 연애의 쓴 맛과 고통의 기름기를 쫙 뺀 바삭한 관계인 것 같다.
서양에서 사용되는, 썸과 비슷하지만 좀 더 노골적이고 본능적인 사회적 관계가 ‘friends with benefit (이익을 주는 친구?)’ 이 아닐까 한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학업도 따라가야 하는 스트레스에 연애할 시간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있는 친구는 쌓인 욕구를 해결할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friends with benefit이 썸과 다른 건 이 관계에는 미래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거다. 혹시 한쪽이 사랑을 느끼게 되면 그 특별한 우정(?)은 깨지게 된다.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관계가 끈적해졌다고 (sticky) 한다. 원치 않는 결과다. 그런 면에서 썸은 미래의 희망을 담은 긍정적 사회 현상으로 볼 수 있겠다. 한쪽이 위험하지만 과감한 접근을 시도하는 순간 썸은 어떤 구체적 관계로 재정의된다: 연인이 되던지, 한때 썸 탔던 과거의 사람이 되던지.
내 사전에 썸이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간 보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이익을 주는 친구라는 것도 있을 수도 없다,
여대를 다녀 아는 남자 사람 친구도 없었을 뿐 아니라, 엉뚱하게도 세상의 만 가지를 잃어도, 사랑의 단심 하나 품고 평생 살아가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고 처연히 믿었다.
사랑에 대하여는 칼을 벼리는 비장함이 내게 있었고, 그 때문인지 나는 연애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여대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먹히는 시대였는데, 참 나는 어지간히도 인기가 없었던 건 아닌지...
아마 나는 평생 연애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힐 무렵, 남편을 만났다. 통제 안 되는 에너지로 세상을 대적하고 있던 나는 스스로나 다른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는 벼랑 끝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종종 독특하단 소리를 들었다. 남편은 나와 정반대였다. 나는 어디에 있어도 불편했고, 눈에 띄지 않아도 불안했는데, 남편은 어디에서도 편안해 보였고, 사람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내가 에너지를 분출하는 스타일이라면 남편은 안으로 모으면서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처음 만난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은 크게 화를 낸 적이 없다. 화도 잘 내고 웃기도 잘하는 내가 남편에게 나름 신선 했겠다 싶다.
나와 사귀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 어떤 여자냐고 물었단다, ‘음…. 전사 같아. 에일리언에 나오는 시고니 위버 같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아믛튼 그는 30년이 지난 오늘도 내가 여전히 전사일 수 있게, 나가서 나의 적을 용감하게 무찌를 수 있게 격려해 준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고마운 건 그가 훌륭한 나의 재양육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부모의 독특한 양육방식 때문인지, 또는 맏이라는 책임감 때문인지, 나는 나도 모르게 감정적 억압이 있었던 것 같다. 친정과 시집을 멀리 두고 우리 둘만 살게 되자, 어릴 때 충족되지 못한 모든 유아적 감정이 되살아나 남편을 힘들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있다. 신혼의 어느 날 남편이 라면을 끓였는데, 면이 너무 풀어져 있었다.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나는 안 먹겠다고 하다가 급기야 울기까지 했다 (미쳤었나 보다). 남편은 얼른 일어나 부엌 앞으로 갔다. 다시 라면을 끓이려고 조리대 앞에 선 남편의 뒷모습에서 라면이 너무 익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보였다. 나는 남편이 새로 끓여준 라면을 닭똥 같은 눈물을 매달고 먹었다. 남편은 ‘괜찮아? 천천히 먹어’ 나를 연신 살피면서 자기는 불어 터지다 못해 떡이 된 라면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 남편의 따뜻한 마음을 겪으며 나는 심리적 유아기를 안전하게 빠져나왔다.
난 결혼해서 비로소 어른이 됐다. 내 안의 어린이가 쑥쑥 자라서 겉만 어른인 나와 어느 정도는 화해했다. 나와 편안해졌을 때, 그와도 편안한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에 가득한 연인이면서 일상을 동행하는 동무가 되었고 외로운 이민생활을 헤쳐가면서 전우애도 공고해졌다. 그와 함께라면 거리에 장판을 깔고 구걸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거지 같은 생활이라도 그릇 하나, 수저 하나씩 모으고, 어느 날 밥상으로 쓸만한 반듯한 나무판자를 보면 기쁠 것 같다. 장판도 깨끗이 닦아 놓고 깨끗한 비닐이 있으면 막대기에 고정해서 지붕을 삼고, 지붕까지 생기면 비를 그을 수 있으니 살림을 모으는 재미가 만만치 않을 거다. 그러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슬퍼진다. 가난의 상상이 슬픈 게 아니라 그런 가난 속에서는 그를 위해 해 줄 게 많이 없을 것 같아 슬프다.
나는 매일 그에게 고마워한다. 그것보다 더 자주 사랑한다 말한다. 더 진하고 밀도 높은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그는 달과 별이 없는 길을 걸을 때, 내 걸음과 함께 하나 둘 씩 켜지는 가로등같다.
사랑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사이사이에 짜증내고 화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완벽한 스토리이겠지만, 아직도 내 안에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그게 그의 현실이다; 사랑은 하지만 여전히 화내고 짜증 내는 아내가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