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Y Jul 09. 2022

늙음, 맑음

‘늙다’의 반대말은 ‘젊다’이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은 품사가 다르다.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이다. 동사보다 형용사는 활용할 수 있는 어미변화에 제한이 있다는 문법적 차이는 차치하고, 이 낱말들의 품사가 왠지 인생을 닮은 것 같아 신기하다. 젊음에 대해 사람들은 ‘젊음은 잠시야’라고도 하고, ‘오늘이 너의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야’라고도 한다. 그러나 늙음은 좀 다르게 보는 것 같다. 사람은 나이를 ‘먹음’으로써 늙고, 세월을 살아내면서 노인이라는 점진적 지위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점 – 어느 시점이 든지 간에 – 을 기술하는 모양태로 쓰이는 반면, 늙음은 상태의 진행이라고 보는 것이다. 


늙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농경사회 때,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은 문턱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면서도 일 년 농사를 예상할 수 있었다. 노인들이 몸으로 겪은 경험과 그 경험치에 바탕을 둔 통계적 추론은 너무나도 귀해 젊은이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시작되는 봄에 바탕한 시간의 순환적 이해를 잊었다. 역사는 바야흐로 매일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직선적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구세대들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유구무언이다. 그리고 구세대가 친애에 마지않는 많은 아날로그적 가치에 대해 신세대들은 그야말로 무념무상. 머지않아 구세대들은 가상공간과 실제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그 공간 사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다.     


그렇다면 젊음이 빠져나간 현대의 세월의 현장에서 노인들의 지혜를 찾을 수는 있을까. 지혜로운 사람이나 철인을 떠올릴 때 우린 앙상한 손을 내밀어 지팡이를 짚은 하얀 수염의 노인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는 아무 말이나 던져도 진리일 것 같고, 혹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말은 한다면 그것은 화두임이 틀림없을 것 같은 그런 선입견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노인이 견딘 세월과 지혜의 양은 언제나 비례한다 할 수 없다.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온 시간이 지혜로 숙성되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행운은 아닌 것 같다. 대학교 때 반체제 인사로도 유명했던 K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K 교수는 나비넥타이와 고수머리가 이국적이었고, 실제로 보니 TV에서 보다 체격이 훨씬 더 커서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의 눈은 정말 작았는데, 그렇게 반짝이는 눈은 처음 보았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내 강의는 길다, 중간에 나갈 사람은 지금 나가라’고 일갈했는데, 실제로 몇몇 아이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나갈 사람 다 나갔는지 확인한 그는 문가에 앉은 학생에게 문을 잠그라고 했다. 감금 상태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이 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었다. 그의 열정, 재치와 유머, 그러면서도 세상을 읽는 날카로운 시선에는 닮고 싶은 ‘어른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늙으막에 TV에 자주 얼굴을 내밀던 그의 행보는 안타깝다 못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정치적 견해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고령의 그를 노망 났다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경망스러워지고 고집불통이 된 그를 바라보며 세월을 탓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역시 살아온 세월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지혜가 몸에 배어 향기로워지는 건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봄날은 간다’라는 옛날 노래가 있다. 맹세한 사랑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게 하지만, 봄날이 가듯이 그 애틋한 – 노래에서는 ‘알뜰한’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 사랑의 맹세 역시 봄날처럼 간다는 얘기다. 그 노래를 생각하면 연분홍 아사 치마, 하얀 버선에 버선처럼 코가 오뚝한 고무신을 신은 젊은 여자와 세월에 피폭되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었으나 옷매무새 가지런한 할머니가 동시에 떠오른다. 연분홍 치마를 날리던 그와 지금 최소한의 공간을 영위하며 사위어 가고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세월의 통섭을 거부하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았다. 포도 주스가 적절한 발효의 과정을 거쳐 포도주가 되면 전혀 다른 물질이 되지만 그 귀함을 인정받는 것처럼, 그 할머니는 젊음을 잃었으나 그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 삶의 그 지점을 견고히 살아내고 있을 것 같다. 그는 단호하겠지만 너그러울 것이고, 할 말 많은 과거를 희미한 웃음으로 퉁쳐버릴 만큼 담백할 것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무난하지만 혼자서도 자연과 충만한 교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일 것 같다. 시끄럽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으나 그가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일 것이다. 언어가 일천하여 ‘인생의 지혜를 얻은 할머니’라는 임의적인 말로 묶어 버릴 수밖에 없으나 난 이 할머니를 연분홍 치마 휘날리는 젊은 여자와 바꾸고 싶지 않다. 나 스스로 이런 의젓한 인생을 기대해 보기 때문이다. 


어느덧 반백 년을 살다 보니 잘 늙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지금까지는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으나 기량이 미치지 못하는 조급한 삶이었다고 중간 평가해 본다. 애 키우며 공부한다고 법석 떨고 직장 다니면서 살림한다고 풀썩거리며 살았다. 나의 노년은 다르길 기대해 본다. 나는 덜 열심히 살고 싶다. 게으름도 부리고 볕 좋은 날은 의자 옮겨가며 하루를 해바라기로 때우고, 아는 사람들 만나 강박적으로 수다를 떨기보다는 넋 놓고 하늘을 쳐다보며 이심전심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 한편, 노년에는 나의 숨겨졌던 작은 재주가 발견되는 그런 시기였으면 좋겠다. 내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숨은 재주가 있을까 잠깐 낙심되었지만, 바쁘게 사는 삶에선 결코 찾아질 수 없었던, 느리게 살아야만 기어이 보여지는 무엇이 있을 것 같다. 난 그 재주를 기뻐할 것이고, 재미있으면 해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어린 시절처럼 몰입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예외 없이 늙는 고통을 견뎌야 할 것이다. 겪어야 알게 되는 일이라 어떠하겠구나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은 아무리 크더라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져 인식될 것이고, 기쁨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상세화되고 개별화되어 여러 다른 이름으로 내 노년의 시간을 채워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늙음의 예보는 맑음, 맑음이다.   


작가의 이전글 손 편지로 연애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