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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 Jun 20. 2022

일만시간 법칙,
백만송이 열정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전구, 영사기, 전기기관차 등 무려 2,000개가 넘는 특허를 소유한 발명 천재, 에디슨의 말이다. 


놀고 있는 아이들을 기어이 끌어다 책상 앞에 앉힐 수 있는, 부모에게는 금과옥조라 할 만한 명언이다. 이말을 염두에 두는 순간, 왠지 주야장천 노력만 하면 될 것 같은 간절한 소망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러나 이 말은 천재가 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재가 해보니 자신의 천재성만으로는 안 되겠고, 그 위에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었다는 고백이 아닌가. 그래서 혹자는 이 말의 방점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재성에서 발현된 ‘영감’에 있다는 말도 한다. 그에게만 유효했던 노력의 열매들이 바로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명이라는 증거다.  

그럼에도 ‘노오력’은 아직도 성공으로 이끄는 왕도로 여겨진다. 노력의 가치는 90년대 ‘일만시간 법칙 (10,000–hour rule)’으로 과학적 탐사라는 포장을 쓰고 세상에 소개되었다. 하루 3시간 주 7일 10년을 연습하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 연주자, 체스 플레이어, 운동선수 등은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몇 년 후 일만시간 법칙은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outliers)’라는 대중심리학책으로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었는데, 그에 의하면 비틀즈나 빌 게이츠의 성공도 일만시간 법칙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틀즈의 경우는 1960년에서 64년 사이, 약 4년 동안 약 1,200번 정도 라이브 연주를 했는데, 그게 얼추 일만시간이 되어 그들의 성공의 발판이 됐다는 것이다. 일만시간법칙에 맞게 연주시간을 계산한 것은 기발하지만, 일만시간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연주를 해도 무명 밴드로 머무는 가난한 음악인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건 고의적 누락이 아닌지 궁금하다 (물론 글레드웰은 재능과 노력만큼 중요한 것이 기회나 타이밍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하여튼 요즘 일만시간 법칙이 생각보다 성공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또 한 번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몇 년 전, 예일대 교수, 에이미 추아는 ‘타이거 마더 (Battle Hymn of tiger mother)’라는 책을 출판했다. 자녀들에게 노력을 체화할 수 있는 구체적 도구를 찾아 헤매던 부모들에게는 은혜였다. 덕분에 그녀의 책은 단번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는데, 추아같이 교육하면 하버드 정도는 가뿐하고, 시간이 있어 피아노를 배우면 카네기 홀 공연도 고려해 볼 수 있는 건가 단꿈에 젖은, 아직은 타이거 맘이 되지 못한 야옹이 맘이 대량 생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자녀교육방법에는 환호와 경악이 동시에 쏟아졌다. 예를 들어 이런거다; TV 시청 금지, 평균 A 이하 성적 금지, 피아노나 바이올린 외에는 절대 연주 금지,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습하지 않는 것 금지, 나가 놀기 금지, 슬립오버 금지 등등. 까딱하면 애 잡을 수 있고, 웬만한 부모는 애들 등쌀에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도 ‘어렵지만 해볼게요.’ 덤비는 야옹이 엄마들이 있기에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추아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아이들에게 이미 좋은 역할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정말 기괴한 규칙을 세웠지만, 자신이 바빴기 때문에 많은 부분 아이의 자율에 맡겼을 확률도 높다. 그녀의 책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녀는 아이들을 강제하기보다는 자극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맡은 책임을 하도록 자극하고 심지어는 반항하도록 자극한다. 


추아의 자녀교육이 성공했다면, 아이들을 일만시간 동안 연습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만시간 법칙의 저변에 흐르는 열정의 중요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십 년을 하루 같이 이어갈 수 있는, 같은 일에 대한 열심, 다른 일이 아닌 바로 그 일에 몰입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 때로는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얼마간의 맹목이 이루어내는 일이 일만시간 법칙의 비밀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엄마의 열정이 아니라 그 일을 해나가는 아이의 열정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노력과 천재성 전에 그 일에 대한 내적 동기 즉, 열정의 유무가 일만시간을 지탱하는 요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천년 혜성같이 떠오른 한국의 문학가가 있었다. 당시 원로 문학가 박완서는 그를 두고 한국 문단의 가뭄을 끝낼 단비와 같은 작가라는 찬사를 마지않았다. 바로 이순신 신드롬을 일으켰던 김훈이다. 그는 스스로를 감금하고, 일상과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고만 하면서 ‘칼의 노래’를 집필했다. 과로 끝에 어금니가 저절로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책의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 피었다’라고 할지, ‘버려진 섬마다 꽃 피었다’라고 할지를 머리를 싸매고 긴 시간 고민했다고도 한다. 보통사람이라면 그 두 주격조사의 다름에 굳이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름이 스토리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인지할 만한 일만시간의 실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만시간은 이렇게 열정을 담고 이어져야 그 지향하는 바 법칙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만시간은 결과의 법칙이라기보다는 과정의 법칙이다.     


오래전 김훈은 쓰고 싶은데 아직도 너무나 선연한 상처라 쓰기 어려운 책이 있다고 했다. 이번에 출간한 ‘공터에서’가 바로 그 책이다. 평소에도 그의 책과 기사를 챙겨보는 김훈 바라기인 나로서는 반가운 한편, 안쓰럽기조차 했다. 그 상처가 아물었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들었다. 웬걸 그의 신간 갈피갈피 선혈과 가쁜 숨이 느껴졌다. 일흔의 노작가는 잔뜩 벼린 칼을 휘두르며 아직도 종이 위에서 전투하고 있었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지만, 결과를 장담하지도 못한다. 발레를 하면 강수진이 되고 싶고 첼로를 하면 장한나처럼 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강수진보다 더 험하고 못생긴 발로도 프리마돈나가 되지 못한 채 군무를 추고 있을 수 있다. 장한나보다 더 구부러진 손가락을 하고도 솔로의 무대는 요원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도 가난해지지 않은 열정을 품고 토슈를 신고 활을 잡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력하는 자가 주권적으로 누리는 인생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별 뜻 없이 열정이 중요하다, 열정을 가지라고 웅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좀 망설여진다. 내게 열정이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돌바닥에 비비며 전진하는 힘겨운 시간들이며 지난한 혼자만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가져라 마라 할 일이 아니다. 하여튼 천재의 열정, 열정적 노력 다 좋다. 문제는 천재도 아니면서 열정도 없고 노력도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다. 이걸 얘기하자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해서 그만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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