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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향기 Oct 17. 2023

나의 선배님들

배움과 인연

직장 생활 18년 동안 여러 상사님을 모셨다. 따뜻하게 대해주신 상사님도 계셨고 사무실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주신 상사님도 계셨던 반면에 출근길 발걸음을 무겁게 하셨던 분도 계셨다. 함께 근무했던 상사님들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모든 분이 나에게 영향을 준 선배님이셨다. 그중 유독 생각나는 세 분이 계시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나에게 '배움'을 선물해 주셨다.


 첫 번째 선배님은 국장님이시다. 그 당시 3년간 사업을 25페이지 보고서로 정리해 상위 기관으로 제출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기관 간 서열을 매기는 사업이라 한 달여간 야근을 했다. 마지막 날엔 밤을 새워서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 다음 날 국장님 실로 최종 보고 드리러 갔다. 국장님께서는 밤을 새운 나를 짠하게 여기시더니 보고서를 단번에 훑으시고 바로 첨삭해 주셨다. 실시간으로 문장이 명료해지고 보고서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글씨는 또 어찌나 정갈하던지... 부담되는 업무를 끌어안고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낸 후 처음으로 보고서를 제대로 지도받은 터라 감동이 밀려왔다. 첨삭된 보고서가 하사품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선배님은 조직에서 기획 통으로 불리셨던 과장님이시다. 그 명성답게 보고서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법이 없으셨다. 본인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실무자처럼 일하셔서 직원 사이에 호불호가 갈렸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근무하는 게 즐거웠다. 과장님을 거치면 두리뭉실한 나의 글이 예리해지고 사소하게 여겨져 놓칠 뻔한 일도 센스 있게 살아났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본인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도 멋져 보였다. 과장님께서 떠나시면 조직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었고 퇴직하시는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세 번째 선배님은 이직하기 전 마지막 부서에서 함께 근무했던 실장님이시다. 이 분은 조직 내에서 인기가 많고, 사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꿰뚫고 계셔서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얘서 흡사 제갈공명처럼 느껴졌다. 보고서를 직접 수정해 주시는 일은 없었지만 일의 흐름을 파악하고 길을 열어주시는데 능하셨다. 이분께 가장 배울만한 점은 약속을 잘 지키는 모습이셨다. 말단 직원과의 약속이라도 본인의 인생관인 '선약 우선의 원칙'을 강조하시며 쉽게 변경하거나 취소하는 일이 없으셨다.


 세분 선배님께 마음로나마 감사드린다. 선배님들과 함께 근무하는 동안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은 어떤 가르침을 받을지 어떤 길이 열릴지 기대되고 의지도 많이 했다. 다들 퇴직하셨는데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계실까? 근무하는 동안 업무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 당시 내 머리는 업무만으로도 꽉 차 있었고 직장 내에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어쩐지 어색하고 한가로운 소리처럼 느껴졌다. 마흔 살 무렵부터 인생 선배를 만나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상사는 그저 어렵다는 느낌이 강해서 그분들을 대하는 내 마음도 굳어 있었다.


  이직 후 사내 게시판에서 독서모임 모집 글을 발견하고 이끌리듯 가입했다. 이곳에선 서로를 선배님이라 부른다. 지금껏 나에게 선배란 상사만을 의미했는데 배움 앞에 선후배 없이 터놓는 문화라니 생소하면서도 참신했다. 삶을 성찰하고 성장을 꿈꾸는 분들이 모였기에 함께 배우려는 열기가 뜨겁다. 가끔은 버거울 만큼..ㅎ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배움을 주는 선배님이 한 분이라도 옆에 계시면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예전에는 함께 근무하는 상사분들이 나의 선배님이었다면 요즘은 독서모임 동료분들이 나의 선배님들이시다. 나에게 긍정적인 바람을 불러일으켜주시는 선배님들 덕에 무거웠던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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