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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비 Apr 04. 2024

영어 자격증 없어도 된다_1

영어 실력 향상기

나의 영어공부에 대한 첫 기억은 정말 악몽 같았다. 나는 일찍부터 영어 과외를 받았다. 책상 한편엔 항상 커다란 라디오와 녹음을 위한 카세트 뭉치들이 있었다. 에이, 아, 아뽈. 비, 바, 버올. 씨, 크, 크알. A부터 Z까지 발음연습을 3번씩 녹음한 뒤, 회화문장들을 녹음하고, 쓰고, 영어 일기를 썼다. 매일 아침마다 영어 선생님에게 전화가 걸려와 졸린 눈을 비비며 영어 대화를 했다. 그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우리 엄마였다.


중학교 땐, 가장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이 수업시간마다 항상 팝송을 틀어주고 그 노래를 외우게 했다. 그때는 카세트에서 벗어나 MP3가 흥하던 때였다. 난 그 시절의 미국 팝송이 좋았고, 우리 동생은 사춘기 시절 너바나, 미카, 레드핫칠리페퍼스 등 록 음악에 푹 빠져있던 때였기에 난 자연스럽게 동생 MP3를 뺏어들으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의 가사를 죄다 종이에 받아 적으며 해석하기 바빴다. 이땐 순수하게 조금이나마 영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은 달랐다. 문법이 중요했고, 다양하고도 어려운 지문들에 항복했다. 영어 시간이 지루했고, 지겨운 문제 풀이의 반복에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됐고, 직장인이 됐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호주로 떠났다.



호주로 떠나기 전, 나는 그 당시 유행하던 영어 공부법인 쉐도잉을 시작했다. 당연히 미드 '프렌즈'와 함께. 하지만 그것도 3화가 되니 지겹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미국인인 것을. 꿈도, 생각도 영어로 할 텐데 미국인도 아닌 내가 왜 그들의 스피드를 따라가며 앵무새처럼 말을 달달달 외워야 하는 거지? 하는 반감이 들었다. 그렇게 발만 살짝 담근 쉐도잉 공부 후 호주에 입성했다. 난 어릴 적 가시밭길(?)이었던 스파르타식 영어 사교육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비행기에서 펜을 달란 내 요청에 패드를 주던 승무원과의 소통 오류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자신감을 가져보기로.

그렇게 나는 유럽인과 미국인 등 한국인이라곤 일절 없던 백팩커스에서 6개월을 지냈다. 뭐든지 빨리빨리, 여유가 없는 한국인의 특징을 제대로 타고난 나는, 정신없이 일하고 나서 퇴근 후에 꼭 하던 한 가지 루틴이 있었다.



내 퇴근 루틴은 바로 와인 한 병을 사서 발코니에 앉아 늦은 저녁과 함께 마시는 것이었다. 혼자 그렇게 궁상떨다 보면 오지랖 넓은 옆방 친구들과 내 방 친구들이 찾아와 꼭 하루를 묻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 나는 원어민이 아니니 알아서 잘 알아들으라는 마인드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오늘은 어떤 진상이 있었고, 팁을 얼마를 받았고 등등. 가끔은 모르는 단어를 설명하며 스무고개를 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문장 배열과 문법으로 그들을 헷갈리게도 했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은 내 엉망진창 영어를 찰떡으로 알아듣는 것이었다. 서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과 호주에서 지내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자정이 훌쩍 지나있다. 보통은 자기 침대로 돌아가는 결말이었지만, 가끔은 이 밤을 즐기러 다 함께 즉흥으로 클럽으로 향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배고프다며 칭얼대면 다 함께 야식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만 남아 두런두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영어로 꿈을 꿀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 한국의 가족과 통화하면 알던 표현을 잊어버려 한참을 머리를 굴릴 정도로 내 주변은 철저히 영어로 가득했다.


발코니 술 자랑 대회



숙소에서는 물론, 일터에서도 영어를 써야했기에 처음엔 정말 고역이었다. 게다가 호주인들은 영국의 영향을 받은 호주만의 독특한 악센트가 있는데, 호주식 악센트가 찐하게 스민 호주 아저씨들의 말들은 미국식 영어에만 익숙한 나에겐 도통 영어도 뭣도 아닌 외계어로 들릴 때도 허다했다. 일터에서 실수도 빈번했고, 그게 너무 쪽팔려서 실수한 테이블은 두번 다시 가기 싫고, 그런 내 자신이 답답하고 쪽팔려서 못견뎌했다. 발걸음은 물먹은 솜처럼, 식당 입구에서 한숨 대여섯번은 쉬고 출근했었다.

그렇게 고난의 한달이 지나가자 메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더듬 더듬이나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대본으로 정리해 쉬는 시간마다 한번씩 보고 그랬다) 두달 째가 됐을 땐, 영어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괜히 메뉴 설명을 해보기도 하고, 매일 쓰는 표현은 버퍼링없이, 틀려도 바로 고쳐서 말할 수 있게 됐다. 특히나 취약했던 영어 숫자(특히 예약 시간을 들을 때. 가끔 quarter past two(2시 15분) 등으로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기에)도 익숙해졌다.

2달 반째가 되자, 기출 변형식 질문도 당황하지 않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메뉴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많고 웨이터를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 생각하는 호주 손님들은 웨이터에게 엄청난 질문들을 해대기 때문이다.


예시1 ; 여기있는 맥주 중에 가장 적은 용량이 뭐야?

예시2 ; 이 메뉴엔 어떤 술이 어울려?

예시3 ; 이거이거 시킬껀데 둘이서 나눠먹기 충분해?

예시4 ; (같은 치킨요리) 이거랑 이거랑 무슨 차이점이야?

예시5 ; (한 요리에 여러 소스가 나오는 메뉴)이건 어떻게 먹어야하는거야?

예시6 ; 오늘 사이드 디쉬는 뭐야?



어쨌든 나는 실수를 밥먹듯 하면서 영어로 돈벌며 생존하기를 나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정많던 사장님들이 있었기에 나도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다.

매일 점심 저녁 모두 다른 메뉴로 도시락 싸준 남자사장님
특별한 날마다 선물을 주던 여자사장님

사장님들은 생일마다, 호주의 기념일마다 나에게 이런저런 이벤트를 해주셨고, 시급도 올려주셨다. 나는 호주생활을 시작으로 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붙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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