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왜 끝내 숨겨지지 않는가?

by 윤슬


가난은 생각보다 자주 옷차림보다 먼저 말투에서 드러나고, 말투보다 먼저 망설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망설임보다 먼저, 무엇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무엇 앞에서 긴장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취향은 한 개인의 사적인 기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엇을 반복해서 보고 배웠으며 어떤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지까지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취향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축적된 환경의 결과가 되고, 때로는 계급의 문장처럼 작동합니다. 사회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것이 몸과 정신에 스며든 결과.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 불렀습니다.


가난은 물건이 아니라
감각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을 숨기려면 비싼 물건을 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가방, 그럴듯한 시계, 무리해서라도 맞춘 정장 한 벌이면 어느 정도는 감출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계급은 소유물 하나가 아니라, 오랜 시간 몸에 밴 감각의 총합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커피를 마셔도 어떤 사람은 메뉴판을 천천히 읽지 않습니다. 어떤 원두인지, 어떤 산미인지, 어느 정도 가격이 적정한지 이미 익숙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가격을 먼저 보고, 혹시 잘못 주문할까 잠깐 멈춥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에 대한 고급 취향은 하루 저녁에 생기지 않습니다. 맛의 문제라기보다, 오래전부터 가족 식탁이나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언어와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고를지 아는 감각, 비싼 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태도, 적당히 아는 척하고 적당히 모르는 척할 줄 아는 여유는 시간과 돈이 함께 만든 결과입니다.


가난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비싼 것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느껴본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물건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물건을 대하는 자연스러움까지는 쉽게 흉내 내지 못합니다.


공부해서 따라잡으려 해도 막히는 이유


누군가는 상위 계층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영어를 배웁니다. 매너를 익힙니다. 예술과 와인을 공부하고, 낯선 레스토랑의 메뉴를 미리 검색해 둡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상대는 영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씁니다.


어느 연예인이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시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영어를 공부했고,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누이들은 불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의도적인 배제였는지,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내가 겨우 문턱에 손을 올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이미 다른 방으로 이동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잔인하지만 계급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상위 계층은 늘 새로운 구별짓기의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게 되면, 더 미묘하고 더 비싼 취향으로 다시 선을 긋습니다. 예전에는 영어가 교양의 표지였다면, 어느 순간 불어가 되고, 그다음에는 언어보다 여행의 방식이 되고, 여행보다 식탁의 대화가 되고, 식탁의 대화보다 너무 애쓰지 않는 태도가 됩니다.


이 세계의 잔인함은 기준이 공개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시험처럼 정답을 외우면 통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답을 준비해 온 티가 날수록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상위 계층의 아비투스는 애씀의 부재를 가장 강력한 품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배운 티, 무리해서 맞춘 티, 애써 세련되어 보이려는 티는 그 자체로 아직 완전히 그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신호가 됩니다.


취향은 왜 그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요구할까요?


커피와 와인, 미술과 음악, 여행과 스포츠는 종종 개인 취향처럼 말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경우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축적되는 감각입니다. 좋은 원두를 여러 번 마셔보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어야 하며, 취향을 고도화할 만큼의 한가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무엇이 더 좋은지 알기 전에, 일단 실패하면 안 됩니다. 비싼 병의 와인을 잘못 고르면 뼈아프고, 비싼 카페에서 입맛에 안 맞는 음료를 시키면 후회가 큽니다. 그래서 선택은 모험이 아니라 생존의 계산이 됩니다. 반면 여유가 있는 사람은 시행착오 자체를 자산으로 축적합니다. 여러 번 틀려보고, 여러 번 경험하면서, 결국 자연스러운 취향을 갖게 됩니다.


고급 취향은 타고난 미적 감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실패할 수 있는 경제적 안전망, 오랜 시간 노출된 문화적 환경, 그것을 함께 즐길 관계망이 모두 있어야 합니다. 도리스 메르틴이 『아비투스』에서 말한 것처럼, 문화자본은 3대에 걸쳐 완성되는 것입니다. 취향이 고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 뒤에 오랜 시간과 많은 자본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스키장 초급반의 고독


어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스키를 탑니다. 겨울이면 가족과 함께 리조트에 가고, 장비와 자세, 넘어지는 법까지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그들에게 스키장은 낯선 세계가 아니라 성장기의 일부입니다. 반면 누군가는 성인이 되어 동료들과 스키장에 갑니다. 모두가 익숙하게 리프트를 타는 사이, 혼자 초급반에 남습니다.


이 경험은 단순히 운동을 못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계급은 이렇게 여가의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운동을 배우고, 어느 공간을 당연하게 누비며, 어느 비용을 특별한 지출로 느끼지 않는가가 이미 사람의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키장 초급반의 외로움은 실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어린 시절과 저들의 어린 시절이 달랐다는 사실을 한순간에 깨닫게 만드는 데서 옵니다. 지금 돈을 벌어 리조트에 올 수는 있어도, 어릴 적부터 몸에 새겨진 기억까지 한꺼번에 살 수는 없습니다. 계급은 현재의 자산만이 아니라, 과거의 누적된 시간으로 만들어집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품고 있습니다. 어떤 동네인지, 전세인지 자가인지, 신도시인지 구도심인지, 학군이 어떤지, 주변 상권이 어떤지에 따라 상대는 대략적인 자산 규모와 생활방식, 관계망, 심지어 자녀 교육의 방향까지 짐작합니다. 주거는 단순히 잠자는 공간이 아니라, 계급이 압축된 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곳은 취향도 바꿉니다. 어떤 동네에 살면 그 동네의 카페와 마트, 산책로와 학원이 일상을 규정합니다. 자주 보는 풍경이 달라지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취향도 달라집니다. 동네가 곧 환경이고, 환경이 곧 감각을 키우는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집값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놓인 세계 전체를 삽니다.


결국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라는 문장은 과장이 아닙니다. 주소는 재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취향이 길러지는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긴 손톱이 말하는 것


청나라 말기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西太后)의 초상화를 보면, 기괴하다 싶을 만큼 길게 기른 손톱에 화려한 지갑(指甲)을 끼운 모습이 눈에 띕니다. 그 손톱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습니다. 긴 손톱은 육체노동과 집안일에서 완전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선언이었고, 그것을 보호하는 화려한 장신구는 신분과 권위를 시각화하는 언어였습니다.



"이렇게 손톱이 길어도 내 대신 모든 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


저는 이 장면이 계급의 본질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계급은 부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말한 것처럼, 생산적인 노동으로부터의 면제 자체가 곧 지위가 됩니다. 누구는 손을 써서 살아가고, 누구는 손을 쓰지 않아도 살아갑니다. 서태후의 긴 손톱은 그 차이를 노골적으로 시각화한 상징이었습니다. 몸 자체가 이미 신분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까지 긴 손톱을 기르지 않지만, 비슷한 상징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쉽게 때 타는 옷, 관리가 많이 필요한 피부와 머리, 손이 가지 않는 방식의 삶, 시간을 많이 요구하는 취미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를 말합니다. 나는 생존에 모든 시간을 써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 상위 계층으로의 도약은
이토록 어려울까요?


상위 계층으로 가는 길이 어려운 이유는 돈만 벌면 끝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말의 속도, 침묵을 견디는 여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안정감, 특정 공간에서 긴장하지 않는 몸의 자세, 너무 애쓰지 않고도 적절히 어울리는 능력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생활세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새로 산 명품을 들고도 불안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평범한 옷차림이어도 여유로워 보입니다. 전자는 물건을 얻었지만 세계를 얻지 못한 것이고, 후자는 굳이 과시하지 않아도 이미 그 세계를 자기 것으로 가진 사람입니다.


상위 계층은 단지 더 많은 돈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자기 세계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집단입니다. 반면 아래에서 올라가려는 사람은 그 세계에 입장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관찰합니다.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는지, 실수하지 않는지, 너무 많이 말하지 않았는지, 주문은 제대로 했는지 끊임없이 확인합니다. 바로 그 자기감시가 몸에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이 다시 계급의 차이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까지
구별 지으려 할까요?


인간이 구별 짓는 이유는 결국 서열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속한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필요합니다. 내가 세련되려면 누군가는 촌스러워야 하고, 내가 교양 있어 보이려면 누군가는 무식해 보여야 하며, 내가 특별해지려면 누군가는 평범해야 합니다.


저도 그 예외가 아닙니다.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과 열등감이 밀려옵니다. 더 좋은 동네에 살고, 더 자연스럽게 좋은 것을 즐기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 앞에서 나는 조금 작아집니다. 한편으로는 인정하기 부끄럽지만,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을 보며 무의식중에 안도하거나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또 민망해집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가장 솔직한 민낯일지도 모릅니다.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 위로 나아가고 싶으면서도,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안도하는 것.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이 모순적인 충동이 바로 인간이라는 종(種)의 오래된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베블런이 말했듯, 자기 보존 본능 다음으로 강한 것이 경쟁적 비교 성향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 본능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구별짓기는 그래서 잔인하지만 매우 효율적입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드러낼 때조차 직접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브랜드를 쓰는지, 어떤 동네에 사는지, 어떤 휴가를 보내는지,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는지만으로도 충분히 선을 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향은 그래서 우아한 얼굴을 한 권력이 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구별 짓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언제 흔들릴지 모르니, 더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영어가 흔해지면 불어를 쓰고, 불어가 흔해지면 예술을 말하고, 예술이 흔해지면 태도를 말합니다. 구별짓기는 우월감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불안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가난이 티 난다는 사실 앞에서 더 정교하게 흉내 내야 할까요?

아니면 애초에 다른 게임을 해야 할까요?


저는 후자에 더 마음이 갑니다.


물론 현실에서 계급의 언어를 배우는 일은 필요합니다. 무지해서 손해 보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평생 남의 취향을 외우며 사는 삶은 결국 더 큰 공허를 남깁니다. 왜냐하면 그 게임의 규칙은 내가 익숙해질 때쯤 다시 바뀌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은 사실 나쁜 감정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열등감이 나를 움직이는 연료가 될 때는 괜찮지만, 나를 갉아먹는 독이 될 때는 멈춰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월감도, 그것이 나를 안정시키는 잠깐의 위안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을 함부로 낮추는 근거가 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구별짓기의 공모자가 됩니다.


인간이 서열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 본능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는 않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성숙한 태도일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난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흔적 때문에 스스로를 함부로 낮추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취향이 계급이 되는 사회를 이해하되, 그 사회의 평가가 곧 나의 가치라고 믿지는 않는 것 말입니다. 배울 것은 배우되, 끝내는 나의 리듬과 나의 언어를 가져야 합니다.


가난은 숨기려 할수록 더 티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과, 내가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을 구별 짓지만, 그 구별이 인간의 존엄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가져야 할 품격은 상위 계층처럼 보이는 기술이 아니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오가는 이 모순적인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그런 세상 속에서 끝내 스스로를 잃지 않는 태도일 것입니다.


참고: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도리스 메르틴 『아비투스』, 나영웅 『취향은 어떻게 계급이 되는가』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단톡방에서는 누구보다 가까웠는데, 왜 만나면 어색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