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가해자라면...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가 던진 처절한 질문

by 윤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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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절망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파괴일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무너지고, 시간이 멈추고,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어려워지는 고통. 피해자의 부모에게는 사회의 위로가 쏟아집니다. 사람들은 달려와 안아주고, 함께 울어줍니다.


그렇다면 내 아이가 누군가를 해친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의 절망은 어떤 모양일까요? 이 질문은 피해자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피해의 무게를 흐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가해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가해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만 현실에는 피해자의 부모도, 가해자의 부모도 있습니다. 한쪽은 아이를 잃고, 다른 한쪽은 아이를 잃는 동시에 '내가 사랑하던 아이가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떠안아야 합니다. 가해자의 부모에게는 비난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혼자 감당해야 합니다.


몇 해 전, 수능 만점 출신 의대생이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뉴스 앞에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가해자의 부모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견디고 있을까, 라고요.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바로 그 말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보통 가해자의 가족이 쓴 기록 앞에서 경계심부터 갖게 됩니다. 혹시 변명은 아닐까? 혹시 책임을 희석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끌고 갑니다. 아들을 변호하는 글이 아니라, 평생 지워지지 않을 죄책감과 질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어머니의 처절한 기록입니다.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주 리틀턴의 콜럼바인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가 총기와 폭발물을 들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학교 총기 사건으로 기록된 그날, 두 명의 어머니도 무너졌습니다. 피해자 부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요.


책은 사건 당일의 충격으로 시작됩니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학교에서 총격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화면 속 혼란을 바라보며 저자는 처음에는 자기 아들이 다치지 않았기를 걱정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부모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뒤틀립니다. 뉴스 속의 단서들이 자기 아들과 연결되기 시작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방향이 완전히 바뀝니다. '내 아이가 다친 건 아닐까?'라는 공포는 '내 아이가 다른 사람을 해쳤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변합니다. 부모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렀습니다.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마침내 펜을 들었습니다. 이 책은 딜런 클리볼드가 태어나서 범행을 저지르기까지의 17년, 그리고 사건 발생 이후 17년. 총 34년간의 일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 스스로 분명히 말합니다. 이 책은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에 바친 16년'의 기록이라고요.


한순간에 무너진 삶
— 가해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저자는 사건 이후의 시간을 매우 담담하게, 그러나 그래서 더 잔인하게 기록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는 과정,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겨야 하는 날들, 조용히 치러야 했던 장례, 그리고 남겨진 삶 전체가 더는 예전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자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있었습니다. 남편과의 안정된 생활, 성장한 큰아들, 대학을 앞둔 작은아들, 자잘한 걱정들이 전부인 보통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어제까지의 삶과 오늘 이후의 삶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입니다.


사건 이후 수는 세상에서 가장 미움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괴물을 키웠느냐?", "너도 공범이다."라며 비난을 쏟아부었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녀 역시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저주인 지옥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가해자의 가족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피해자의 고통과 같은 선상에 올려놓지 않는 점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피해자와 유가족을 먼저 바라봅니다. 자신의 슬픔이 있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의 상실을 덜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문장은 조심스럽고, 무겁고, 끝내 비켜서지 않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과 자식이 저지른 죄에 대한 수치심 사이에서 그녀는 위태롭게 외줄 타기를 하며 삶을 이어갑니다.


무너진 신뢰의 성벽
— "내가 알던 내 아이는 어디로 갔나"


수 클리볼드의 기록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클리볼드 가정이 결코 결손 가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이었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쏟았다고 자부했습니다. 수는 장애인을 가르치는 일을 했고, 교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미술심리상담 일도 병행했습니다. 교육과 인성에 깊이 관심을 쏟았던 어머니였습니다.


딜런은 겉으로 보기에 전형적인 문제아가 아니었습니다. 수줍고, 지적이고, 때로는 다정했습니다. 종이접기를 좋아했고, 수는 차 한 잔을 끓여 아들 곁에 말없이 앉아 아들의 손이 종이를 개구리와 곰으로 변신시키는 것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고 회고합니다. 종잇장처럼 평범한 것이 몇 번 접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모양이 되는 것을 보며 늘 경탄했다고요. 그 경험이, 사건 이후 자신이 겪어야 했던 일과 닮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이가 괴물이 되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고.


바로 그 지점이 독자를 더 두렵게 만듭니다. 악은 언제나 악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키운 평범한 아이도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내면을 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내면의 균열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사건 이후 드러난 딜런의 일기장은 엄마가 알던 아들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 안에는 깊은 자기혐오, 지독한 고립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놓쳐버린 조각들
— 일상의 틈새에 숨어 있던 위험 신호


이 책의 중반부는 저자가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그때 내가 무엇을 놓쳤는가?"를 복기하는 과정으로 채워집니다. 딜런은 사건 전, 법을 어겨 보호관찰을 받은 적이 있었고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수와 그녀의 남편은 이를 그저 '지나가는 사춘기 방황'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저자는 아들의 과거를 하나씩 복기하며 자신이 놓친 신호들을 기록합니다. 말수가 줄어든 순간, 우울의 흔적, 학교생활 속 단절감, 친구 관계의 변화, 분노와 자기혐오의 기색, 어두운 글쓰기. 당시에는 그것이 사춘기의 흔한 변화처럼 보였고, 지나가는 불안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딜런은 3학년 때부터 이미 깊은 우울과 자살 충동을 품고 있었습니다. 4학년 때는 그것이 점차 분노와 폭력적 환상으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 과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딜런 스스로 철저히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건 이후에는 그 모든 순간이 비수처럼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 왜 더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이상하다고 느끼고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왜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을까. 그녀가 느끼는 가장 큰 회한은 단순히 아들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넘어, 아들의 고통을 단 한 번도 정면으로 마주해 주지 못했다는 통렬한 자책입니다.


파편화된 현대 가족의 모습이 여기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살며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지만, 각자의 스마트폰과 각자의 고민 속에 고립되어 있습니다. 함께 밥을 먹어도 마음까지 함께 앉아 있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서로의 내면은 점점 파편화됩니다. 그 틈새 속에서 위험 신호는 조용히 자랍니다.


아이가 내뱉는 "나 괜찮아."가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더 이상 구조 요청을 할 힘조차 없다는 뜻인지 우리는 구분할 수 있습니까?


가해자이기 전에, 자살을 향해 가던 아이


이 책이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선은 딜런을 단지 '살인자'로만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그 책임은 어떤 말로도 덜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사건을 오래 추적하면서 아들이 깊은 자살 충동 속에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그는 타인을 향한 폭력 이전에 자기 자신을 향한 파괴 속에 있던 아이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은 매우 불편하지만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해자를 한순간에 비인간화함으로써 안심하려 하지만, 저자는 그 안심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왜 그런 짓을 했는가?"보다 "어떻게 그 지점까지 가게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의 차이는 큽니다. 왜?라는 질문은 쉽게 분노와 단죄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물론 분노와 단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음 비극을 막지 못합니다. 반면 어떻게?라는 질문은 경로를 보게 합니다. 아이가 어떤 절망을 통과했는지, 어떤 신호를 보냈는지, 어떤 도움을 받지 못했는지를 보게 합니다. 저자는 자기 아들의 비극을 통해 정신건강, 자살 예방, 부모와 아이 사이의 단절, 사회의 무관심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 질문은 결국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으로 확장됩니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잔인한 진실


많은 부모가 이 책을 읽으며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 아이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수는 강조합니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요.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해도, 아이의 정신적 질환이나 우울증, 그리고 사회적 압박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뇌 과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며 아들이 겪었던 '자살적 우울증'이 어떻게 '타살적 폭력'으로 변질되었는지 분석합니다. 이는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함이 아니라, 제2의 딜런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사회적 호소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적과 진로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그들의 뇌가 보내는 비명에는 무감각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치아 관리, 영양 균형, 용돈 관리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기 뇌의 건강을 스스로 살피는 법을 가르치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요. 저자는 말합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후회는 딜런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요. 아이의 성취보다 아이의 '존재 상태'에 집중하는 것, 오늘 아이의 성적표보다 오늘 아이의 눈빛을 먼저 살피는 것. 그 작은 실천이 어쩌면 가장 거대한 예방일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후회는 딜런에게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자기 뇌의 건강을 스스로 살피는 법을.


부정에서 수용까지
— 살아남아야 하는 부모의 시간


책에서 가장 아픈 장면들은 저자가 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고, 다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조각난 사실들을 억지로 이어 붙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더는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사랑한 아이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그 아이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평생 이 사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정체성의 붕괴에 가깝습니다. 부모라는 자리, 사랑이라는 감정, 기억 속의 아이, 세상 속의 아이가 모두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피해자 부모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가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사과도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에게, 말이 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 행동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태도는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자신도 무너졌지만 자신의 무너짐을 중심에 놓지 않으려는 태도, 끝내 책임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데 쓰려는 태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살아남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범죄를 부정하던 시간에서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거기서 다시 살아내야 하는 시간으로 건너가는 이야기입니다. 살아낸다는 말은 여기서 밝고 희망찬 복구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책감과 후회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채 버티는 일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고,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고하고자 했습니다.


비극의 유산
— 남겨진 자들이 살아내야 할 이유


회고록의 끝자락에서 수는 비로소 한 줄기 빛을 찾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방'이라는 사명입니다. 그녀는 강연을 통해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알리고, 수익금을 자살 예방 단체에 기부하며 아들이 세상에 남긴 거대한 어둠을 조금씩 닦아나갑니다. 그녀는 여전히 아들을 사랑합니다. 살인마가 된 아들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배 아파 낳아 기른 사랑스러운 딜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주어진 평생의 형벌이자 과제입니다. 그녀는 아들을 용서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끝까지 짊어지기 위해 다시 살아내기로 결심합니다.


부모라는 이름의 무거운 책임감에 대하여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한 가지 질문입니다. 정말 자식을 모두 아는 부모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고, 먹이고, 입히고,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끝내 아이의 모든 내면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부모에게 겸손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깊은 두려움도 안겨줍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부모를 쉽게 비난하지도, 쉽게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묻습니다. 당신은 정말 아이를 보고 있었느냐고. 아이가 보내는 미세한 신호를 들으려 했느냐고. 괜찮다는 말 뒤의 침묵을 지나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 묻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절망을 너무 늦게 발견하고 있지 않은가. 성적과 결과와 정상성만을 확인하느라, 무너지는 마음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피해자의 부모가 견뎌야 하는 상실은 말할 수 없이 크고, 가해자의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죄책감 또한 평생의 형벌처럼 남습니다.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인가를 가르는 일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절망은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아이를 잃는 일은 참혹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그런 비극이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어떤 책은 우리를 위로하기보다 깨어 있게 만듭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그런 책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도 무거운 일인지, 그리고 비극 이후의 통곡보다 비극 이전의 작은 신호를 알아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끝내 잊지 못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우주를 통째로 받아내는 일입니다.

그 우주가 어둠으로 물들지 않도록,

오늘도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길을 잃지 마세요.


가해자의 부모든 피해자의 부모든, 그 모든 절망의 끝에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닿기 힘든 목표가 서 있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을 '알 수 없는 타인'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수 클리볼드의 용기 있는 기록이 우리 사회의 파편화된 가족 관계에 경종을 울리고, 오늘 당신의 아이에게 건네는 "잘 지내니?"라는 질문이 단순한 인사를 넘어 생명을 구하는 신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가해자를 변명하기 위한 글이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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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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