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쓰홍당무' 세상의 모든 '양미숙'을 위하여
반짝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
사람은 누구나 빛나고 싶어 합니다. 사랑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예쁘게 남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세상이 그 욕망을 모두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세상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합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근사한 저녁, 티 없이 맑은 피부, 완벽한 비율의 몸매, 그리고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눈부신 성취들. SNS와 미디어가 비추는 세상은 늘 특별하고, 보기 좋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예쁜 사람, 인기 많은 사람, 1등 하는 사람, 선택받는 사람, 박수받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대단한 재능도 없고, 모두가 좋아할 외모도 없고, 어디서나 환영받는 성격도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화려한 중심보다 주변에 더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자기 몫의 하루를 살아냅니다. 주목받고 반짝이고 싶은 마음을 조용히 접어두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자리에서.
2008년에 개봉한 영화 〈미쓰 홍당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작품입니다. "당신도 노력하면 빛날 수 있어요"라는 식의 달콤한 위로는 없습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말합니다. 빛나지 못해도 괜찮다고. 삽질해도 괜찮다고. 얼굴이 빨개져도 괜찮다고. 그리고 그 말을, 말이 아니라 인간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양미숙입니다. 누가 봐도 중심인물이 아닙니다. 인기 없는 과목인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안면홍조가 있어 감정이 곧장 얼굴로 드러납니다. 세련되거나 유연하지도 않습니다. 매력적으로 포장될 줄 모르고, 관계를 우아하게 다루지도 못합니다. 말은 삐걱거리고, 행동은 과하고, 감정은 늘 한 박자 늦거나 한 박자 넘칩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좋은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이 영화는 아프게 다가옵니다. 양미숙은 특별한 괴물도, 아주 희귀한 인간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익숙한 감정의 집합체입니다. 열등감, 질투, 인정욕구, 분노, 수치심, 애처로움. 우리가 겉으로는 감추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 양미숙을 보면 불편해집니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쓰 홍당무〉의 주인공 양미숙은 그 좁고 후미진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우리의 자아이자 열등감이며, 분노이자 애처로움 그 자체입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열등감
영화는 시작부터 양미숙이 처한 처절한 비주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러시아어 과목이 비인기라는 이유로 영어도 못하면서 중학교 영어 교사로 밀려납니다. 그 빈자리는 예쁘고 애교 많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유리가 차지합니다. 일도, 사랑도 모두 예쁜 주류에게 빼앗겼다고 굳게 믿는 양미숙은 분노하고, 집착하고, 삽질을 시작합니다.
양미숙의 가장 큰 특징인 안면홍조증은 단순한 신체적 질환이 아닙니다. 그녀가 가진 콤플렉스와 열등감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장치입니다. 감추고 싶은 속마음, 당황스러움, 수치심이 툭하면 얼굴에 붉게 드러나는 그녀는 세상 앞에서 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쿨하고 세련되게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시뻘건 얼굴로 씩씩대는 양미숙은 철저히 이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착각의 논리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지지난해 회식자리에서도 내 옆에 앉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내 옆에 앉은 걸 보면...
서 선생님은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이 대사를 들으면 처음엔 웃음이 납니다.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보다 보면 웃음이 멈춥니다. 저 논리, 어딘가 낯익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사소한 친절을 크게 부풀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버텨온 날들이 있지 않았던가요?
양미숙의 착각은 우스꽝스럽지만 그 착각의 뿌리는 우습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어린 미숙을 두고 사라졌습니다. 생애 첫날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시작한 사람. 그러니 담임 선생님의 작은 친절 하나를 10년 동안 붙들고 사는 것이, 과연 이상한 일이기만 할까요. 그 착각이 없으면 남는 건 자신이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존재라는 현실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경미 감독은 이 인물을 비웃지 않습니다. 교정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그냥 같이 달립니다. 이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힘입니다. 우리는 양미숙을 보며 웃지만, 영화는 끝내 그녀의 편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습니다. 이 영화는 양미숙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쁜 것들만 대접받는 세상 —
그 불공평함을 향한 맹렬한 삽질
이 영화가 건드리는 가장 아픈 지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양미숙은 게으르거나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교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목돈을 모으고, 반신욕을 하고, 건강을 챙기며 삽니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 구도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열심히 해도 미움받는 양미숙, 대충 해도 사랑받는 이유리."
미숙이 분노를 터뜨릴 때 나오는 대사는 이것입니다.
"이게 다 그 년 때문이야."
비논리적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해가 됩니다. 미숙의 분노는 사실 이유리를 향한 분노가 아닙니다. 예쁜 것만 반짝이고, 1등만 기억하며, 비주류는 그냥 배경으로 사라지는 세상 전체를 향한 분노입니다. 다만 그 분노를 세상에 대고 쏠 힘이 없으니, 가장 가까운 상징인 이유리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 억울함은 이 대사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제가요, 예쁜 애들은 알아서 잘 살 테니까 좀 냅두고...
저같이 불쌍한 애들이나 좀 잘 보살펴 주자 뭐, 이런 취지로..."
이 비논리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 앞에서 우리는 실소를 터뜨리지만, 이내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집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찌질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켜내려는 처절한 방어기제. 그것이 바로 미숙의 삽질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화를 냅니다.
"나도 알아, 내가 별로라는 거!"
이 대사가 나오는 순간 웃음이 씁쓸하게 바뀝니다. 세상이 미워서 화를 내는 건지, 그 세상에서 빛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건지 미숙 본인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미숙은 세상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나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왜 나는 예쁘지 않은가.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사랑받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이 쌓여 분노가 되고, 그 분노가 다시 타인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름이,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양미숙이라는 이름의 자아
양미숙은 참 이상한 주인공입니다. 예쁘게 망가지지도 않고, 사랑스럽게 서툴지도 않습니다. 영화 속 그녀는 너무 날것이고, 너무 불편하고,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영화 주인공에게 어느 정도의 매끈함을 기대합니다. 못나더라도 귀엽고, 실패해도 응원하고 싶고, 심술을 부려도 이해 가능한 수준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양미숙은 그 기대를 자꾸 벗어납니다.
그래서 더 진짜 같습니다.
현실에서 열등감은 그렇게 예쁘지 않습니다. 질투는 우아하지 않고,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종종 치졸한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사람은 꽤 유치해질 수 있습니다. 양미숙은 바로 그 민망한 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단순히 이상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아이고, 열등감이며, 분노이자 애처로움입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우리 안에도 양미숙이 있습니다. 남의 행복을 질투한 적이 있고, 누군가의 매끄러움 앞에서 스스로 초라해진 적이 있고, 별것 아닌 일에 괜히 울컥한 적이 있습니다. 미숙은 그 감정의 과장된 형상이 아니라, 차라리 압축된 본체에 가깝습니다.
서종희 — 미숙이 만난 10대의 자신
이 영화의 진짜 중심은 짝사랑이 아닙니다. 양미숙과 서종희 사이에 있습니다. 서종철의 딸 서종희는 전교 왕따입니다. 예쁘고 당당하지만 눈치가 없고 거침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자기애가 강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미숙과 종희는 서로의 거울입니다. 미숙은 어른이 된 종희이고, 종희는 10대의 미숙입니다. 둘 다 세상의 문법에 맞지 않고, 둘 다 자기감정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법을 모릅니다. 중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동맹은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쓸쓸합니다. 건강한 방식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서로의 결핍을 알아봅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니까요.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 중 하나는 펑펑 우는 미숙을 보며 종희가 건네는 이 대사입니다.
"선생님, 얼굴 빨개져서 참 좋겠어요.
나는 아무리 창피해도 얼굴이 안 빨개져서 사람들이 내 속을 하나도 몰라주는데."
세상 모두가, 심지어 미숙 본인조차 끔찍하게 저주했던 그 붉은 얼굴을 종희는 부러워합니다. 타인의 결핍을 평가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은 백 마디 번듯한 위로보다 강력합니다. 완벽한 주류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미숙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소외된 아이 종희를 통해 처음으로 온전한 이해와 소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이 함께 연습하는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연이 아닙니다. 대사는 단 세 줄입니다.
"고맙습니다."
"아니, 천만에."
"고마워요."
이것을 번갈아가며 서로의 몸을 지탱하는 연습을 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영원히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미숙이 10년째 기다리는 종철의 마음, 종희가 기다리는 부모의 화해 — 이 영화는 그 '고도'가 끝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서로가 서로의 고도가 됩니다.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지금 여기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연습 끝에 미숙이 종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돼."
이 한 마디가 이 영화의 심장입니다. 누군가는 그냥 있어도 사랑받고, 누군가는 애써야 겨우 미움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체감되는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사가 쓰라린 이유는 바로 그 불공평함을 정직하게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슬프지만 단단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종희에게 건네는 동시에, 오랫동안 자기 자신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을 처음으로 꺼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주변 캐릭터가 비추는 미숙의 그림자
이 영화의 재미는 주인공만 강렬한 것이 아니라, 주변 캐릭터들이 모두 미숙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는 데 있습니다.
서종철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 미숙의 결핍이 매달리는 기둥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대단히 낭만적인 인물도 아니고, 확고한 매력을 가진 영웅도 아닙니다. 아내가 있으면서 이유리와 바람을 피우는, 그냥 평범하게 이기적인 중년 남성입니다. 영화는 그를 절대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미숙은 10년을 이 사람에게 바칩니다.
이 구도가 불편하면서도 납득이 되는 것은, 우리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사실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를. 종철 그 자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를 붙잡고 있어야 자신의 삶이 덜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다는 상상은, 선택받지 못한 인생 전체를 잠시 견디게 해주는 환상이니까요.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분명하다는 확신. 증거는 옆자리에 앉은 것뿐이지만, 그 확신의 간절함만큼은 진짜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의 원본은 종철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유리 선생은 미숙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쁘고 다정하고 사람들에게 호감 받습니다. 미숙이 보기에 이유리는 너무 쉽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유리는 경쟁자이기 전에 상처의 자극제가 됩니다.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 애써도 닿지 않는 종류의 사람.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종종 그 사람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앞에서 내 결핍이 너무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면 이유리도 그렇게 완벽하지 않습니다. "무늬만 공주인 이유리의 곤경도 연애의 매너에 매끄럽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당시 평론의 분석처럼, 이유리 역시 나름의 결함을 가진 보통 사람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변 캐릭터들은 모두 양미숙을 설명하는 장치입니다. 종철은 그녀의 인정욕구를, 이유리는 그녀의 열등감을, 종희는 그녀의 외로움을 비춥니다. 그래서 〈미쓰 홍당무〉는 단순한 삼각관계 영화가 아닙니다. 한 여자의 연애담이 아니라, 한 인간의 결핍이 어떻게 세계와 부딪히는가를 그리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웃기면서도 슬픈 이유 —
명대사가 오래 남는 까닭
이 영화는 분명 웃깁니다. 상황은 우습고, 대사는 비틀려 있으며, 인물들의 행동은 황당합니다. 그런데 보다가 웃음이 목에 걸립니다. 마냥 웃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우스움 안에 너무 큰 슬픔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양미숙은 계속 틀립니다. 판단도 틀리고, 방법도 틀리고, 감정 표현도 틀립니다. 그런데 관객은 묘하게 그녀를 미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녀가 악해서가 아니라 서툴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해치려는 의지가 본질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려다 엉망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이 오래 남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양미숙의 말에는 멋진 문장보다 생살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사람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정제된 말보다 들켜버린 진심일 때가 많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학교 예술제 당일, 엉성했던 방해 공작이 들통나며 모든 진실이 폭로됩니다. 번듯해 보였던 주류 서종철의 비겁함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미숙 역시 그동안 애써 포장해 온 자신의 민낯을 마주합니다. 아수라장이 된 무대 위에서 미숙은 마침내 울부짖습니다.
"내가 아무리 비호감이라도… 나도 사랑받고 싶단 말이야!"
이 한 마디의 대사는 영화 〈미쓰 홍당무〉의 존재 이유이자 가장 거대한 카타르시스입니다. 미숙이 그토록 서종철에게 집착했던 이유는 그가 매력적인 남자여서가 아니었습니다. "나 같은 비호감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환상이, 세상의 인정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바닥까지 드러난 그녀의 절규는 우스꽝스럽기보다 서글프고, 찌질하기보다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본 적 있는 모든 이들이 속으로만 삼켜왔던,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절박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미쓰 홍당무〉의 대사는 멋있게 삶을 정리하지 않습니다. 대신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그대로 던집니다. 그래서 위로처럼 들리지는 않아도, 이상하게 진실처럼 들립니다. 이 영화의 대사들은 예쁜 문장이 아니라 부끄러운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그런 고백에서 더 크게 위로받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꼭 백조가 되어야만 할까?
영화의 결말은 기존의 공식들을 보기 좋게 배반합니다. 미숙은 마법처럼 예뻐지지도 않고, 안면홍조증이 치유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예술제 무대에서 밀가루를 흠뻑 뒤집어쓴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종희와 함께 교문을 나설 뿐입니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삽질하면서 살까?"
"어."
미숙과 종희의 마지막 대화는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비주류로 살아간다는 것은 끝내 주류가 되지 못해 평생을 슬퍼하는 삶이 아닙니다. 굳이 세상의 잣대에 맞춰 백조로 거듭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바보 같고 쓸데없는 삽질일지라도, 내 곁에 그 삽질을 알아주고 함께해 줄 단 한 사람만 있다면 이 불공평한 세상도 제법 살아낼 만하다는 위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미숙은 누군가를 찾아가 조용히 말합니다.
"너가 참 마음에 든다."
상대방의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누군가'가 종희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외면해 온 자기 자신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여백 안에서 이 한 문장이 영화 전체를 완성합니다. 미숙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대신, 닮은 누군가를 처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거대한 변화가 아닙니다. 폭죽도 없고 눈물의 화해 장면도 없습니다. "열심히 해봤자다"와 "나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해"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미숙이, 처음으로 그 진자를 멈추고 서 있는 장면입니다. 다만 그 작고 조용한 한 마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카타르시스입니다.
비주류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비주류로 살아간다는 것은 패배자가 된다는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세상이 정한 기준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예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센스 있는 사람만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꾸만 자기 설명을 해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런지, 왜 부족한지, 왜 매끄럽지 못한 지 말입니다.
양미숙은 그 설명에 지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종종 발끈하고, 괜히 공격적이고, 혼자 오해하고, 혼자 상처받습니다. 우리도 늘 자신을 설명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우습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직장에서, 인간관계에서, 사랑 안에서, 가족 안에서 끊임없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영화가 완전히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는, 비주류의 삶을 단순한 패배로만 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미숙은 끝까지 완벽해지지 못합니다. 영화는 그녀를 교정하지도 않고, 갑자기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말을 걸고, 다시 감정을 표현하고, 다시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중심이 되지 못하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계속 말해보는 것. 스스로 민망하더라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조금씩 양미숙이다.
〈미쓰 홍당무〉를 보고 나면 양미숙을 쉽게 잊기 어렵습니다. 예뻐서도 아니고, 멋져서도 아닙니다. 너무 싫은데 너무 이해가 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나는 1등과 예쁜 것들의 뒤편에는, 무수히 많은 양미숙들이 오늘도 붉어진 얼굴을 훔치며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로 세상에 화를 내다가도, 결국 초라한 자신을 탓하며 이불을 걷어차고 있을 우리의 자아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는 굳이 완벽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질투하고, 분노하고, 찌질하게 굴어도 괜찮습니다. 비주류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 속에서도 끝내 자기 감정을 품고 살아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삶의 가장 솔직한 용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주목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평범한 얼굴로, 어설픈 말투로, 조금은 촌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늘 특별한 사람들만 기억하지만, 현실을 채우는 것은 그런 평범하고 비주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삶의 얼굴은 오히려 양미숙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영화는 그런 양미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라봄으로써, 결국 우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면, 나라도 나를 사랑해야지."
얼굴이 빨개지면 어떻습니까?
삽질을 하면 어떻습니까?
비주류면 어떻습니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도 당당히 걷는 그 붉은 두 뺨에,
세상의 모든 양미숙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래도 당신은, 충분히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