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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Oct 23. 2024

먹는다는 것

 제법 소란스럽게 내리는 가을비는 전날 밤부터 점심때가 지나도록 내렸다.
 쌀쌀한 아침은 누룽지를 눌려 숭늉을 만들어 속을 따뜻하게 덥혔다.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점심때가 되었다.
 혼자 있었다면 배가 고파도 그냥 지나쳤다. 삼시 세끼를 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남편이 집에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도시에 살 때는 비가 오는 날이면 중화요리를 배달시키거나 나가서 순댓국이나 감자탕에 소주 한 잔 곁들이곤 했다.
 시골에서 살다 보니 외식을 하려고 해도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한다. 술 한잔하고 싶어도 대리기사가 없다. 외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시골살이의 불편함은 외식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입맛이 예민하다는 거 그것도 불행인 거야!"
밖에서 먹는 음식은 조미료 맛이 나서 싫다고 했더니 내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했던 말이다. 입맛이 예민하면 그만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의 이론이 맞지만 내가 외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다. 다만 오늘처럼 아쉬울 때가 있을 뿐이다.





 점심은 또 무얼 먹어야 하나? 짜증과 귀찮은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느리게 열었다. 안에는 어제 만든 무생채와 김치뿐이었다. 유리그릇 안에는 엊그제 먹고 남은 돼지고기 앞다리 한 덩어리가 분홍빛으로 반짝였다.



 '묵은지 썰어 김치찌개나 끓여야지.'
 남편은 된장찌개를 끓이면 밥을 한 공기만 먹지만 김치찌개를 끓이면 두 공기는 기본으로 먹는다.  거기에 냄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먹고 또 먹는다.
 남편의 성향에 맞게 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묵은지와 볶았다. 양파도 썰어 넣고 물을 부어 한소끔 끓였다. 매운 고춧가루 한 숟갈 첨가해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은근하게 졸였다.
 거실창 너머 마당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떨어진다. 앞산에는 운무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3년 묵은 김치에서 나는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의 맛은 소주를 불렀다. 남편은 소주를 들이키며 묵은지 속에서 고기만 속속 골라 입에 넣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어린 시절 형제들과 나누어 먹느라 늘 허기를 느꼈단다.
 지금도 음식은 내 입에 들어가야 내 것이  되는 거다. 라며 먹는 욕심을 부린다.
 내 어린 시절도 형제들과 나누어 먹느라 먹거리가 늘 부족했다. 아웅다웅하던 그때는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지금은 배만 고프지 않으면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어린 기억의 내 할머니는 밥을 먹은 후, 설거지할 때는 반드시 애벌 설거지를 하게 했다.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릇에 음식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 해서 모은 음식찌꺼기는 소죽을 끓이는데 넣어 소에게 주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은 어떠한가? 공장에서 만들어 나오는 완제품, 밀키트로 나오는 반제품, 흙에서 농사지어 직접 수확해서 만들어 먹는 건강한 먹거리들로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어떤 음식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가끔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먹기 위해 사는 거야? 살기 위해 먹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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