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거인 Oct 27. 2024

지리산 남부능선을 걷다



  이번 지리산 남부능선 길은 네 번째 걸음이다.  처음 걸었을 때는 굵은 비가 내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걸었다.

 남편하고 세석길을 오르다가 하산해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는 혼자 세석대피소까지 올라갔다.

항상 많은 등산객들로 들썩들썩하던 대피소에는 나 혼자였다. 세석평전의 숲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산속의 정적을 깨울 뿐이었다. 그 풍광에 흠뻑 취해버린 나는 세상 무엇도 부럭지 않았다.(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마구 설렌다.)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다시 거림으로 하산하려던 내 발걸음은 어느새 청학동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산에 가면 새로운 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욕심이 있다.

비는 내리고 가보지 않은 길에는 어떤 길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웠다. 이정표를 보니 청학동까지는 9.5킬로라고 적혀있었다.
그 정도의 거리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며 계속 청학동을 향해 걸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짙은 안개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에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그래도 시작한 길이니 되돌아갈 수 없었다. 등산객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지 아님 비가 내려 그런것인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길은 비에 젖어 더 미끄러웠다.
중간중간 남편에게 위치를 알리며 계속 걸었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산속에 드디어 삼신봉이라는 이정표를

가 나타났다.  안개 짙게 끼인 산 정상에 삼신봉 정상석이 희미하게 보이던 그때, 그때 나는 삼신봉을 사랑하게 되었다. 두려움에 떨며 청학동으로 하산하니 남편의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는 청학동에서 시작해서 세석대피소까지 찍고 거림마을로 내려와서 우리 집까지 걸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으로는 아마 13시간 이상은 족히 걸었던 것 같다.
 

 세 번째는 수원에서 같이 산에 다니던 친구가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세석대피소에서 하룻밤 묵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배낭에 소주와 맥주를 가득 채워 올라갔다.
하늘과 능선이 맞닿은  지리산 속, 칠흑같이 어두운 세석대피소 마당에 앉아서 별을 보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남부능선을 걸었다.

  토요일 아침, 오늘은 꼭 남부능선을 걸어야지 작정하고 아침 8시 거림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석으로 가는 길은 형형색색의 가을이 진하게 익고 있었다

걸어야 할 길이 멀어 걸음을 재촉했다. 쉬지 않고 세석대피소를 지나 촛대봉까지 세 시간 만에 올랐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운무는 세석길 능선 아래 함양에서 노닐고, 연화선경 길이 이어진 능선 끝에는  천왕봉이 우뚝 서 있다.
남부능선길을 걷기 위해  촛대봉을 내려와 대피소를 그대로 지나쳐  남부능선 길로 들어섰다.


 거대한 바위의 뒤에서 나오는 샘과 앞에서 나오는 샘이 서로 만나는 물을 음양수라 하는데 세석에 오를 때면 꼭 이곳에 들려서 목을 축이는 곳이다.

남부능선은 조망이 좋지 않아 등산객들이 잘 걷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능선길은  멧돼지들이 파헤쳐  돌이 일어나 있었다. 낙엽이 쌓여 길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발을 잘못 디디면 중심을 잃는다.

바람조차 쉬고 있는 조용한 길, 내 발거음에 나뭇잎만 바스락 거리는 길을 걷고 걸었지만 청학동까지 6킬로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잠깐 바위에 올라서서 마을을 바라봤다. 산골짜기마다 마을이 보였다. 그 끝에 보이는 호수 어디쯤 내가 사는 집이 있다고 생각하니 반갑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던  6킬로 구간을 힘들게 빠져나왔다.  이어진 길은 낙엽융단이 깔린 산죽길이다. 길이 좋을 때 부지런히 걸어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빠르게 5킬로 구간을 빠져나왔다.
 갈 길은 먼데 아름답게 물든 단풍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풍광에 취해 길을 잃었다. 이정표도 없고 낙엽이 쌓인 길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헤매다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다시 길을 찾았다.
 4킬로 구간대에 들어서면서 배도 고프고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가워지고 산그림자는 길어졌다. 산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온다. 안전한 구간에 들 때까지는 밥을 먹는데 시간을 소비할 수 없었다.
땀은 비 오듯 하고 호흡은 거칠다. 다리에 힘이 풀려 양손에 든 스틱에 의지하며 걸었다.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이정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걸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이정표가 나왔다. 청학동까지는 3.8킬로  삼신봉에서 청학동까지 2.5킬로이니 700미터만 더 걸으면 삼신봉이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늘 다니던 길이라 익숙하다.
배낭 속에 밥은 있지만 생각이 없어 귤 두 개로 허기를 달랬다.
다시 심기일전 걷지만 삼신봉은 나타날 듯 나타날 듯하면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따로 탈출로가 없으니 걷는 방법밖에 포기할 수도 없다.
여기에 보이는 봉우리 일까? 다음에 보이는 봉우리일까? 조바심치며 걷다 보니 삼신봉이 내 앞에 나타났다.




스틱아! 배낭아! 여기까지 오느라 너희들도 고생했다. 너희들과 함께라서 가능했다.

스틱과 배낭을 정상석 앞에 세우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내가 걸은 길을 뒤돌아 보았다.
 멀리 구름에 싸인 천왕봉이  마법의 성처럼 보였다.

 내 차는 거림마을에 있다. 청학동에서 거림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뿐이다.  버스는 이미 끊긴 시간이다.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한 시간 후 도착이라는 말을 남기고 청학동을 향해 걸었다.  삼신봉에서 청학동 날머리까지 2.5킬로의 낯익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리꽂았다.

 


 삼신봉으로 드는 입구가 보였다. 오랜만에 긴 산행이라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있다는 설렘이 함께한 산행이 끝났다.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남부능선 완주를 축하한다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나는 스틱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

24길로의 길을 8시간을 산행하며 남부능선을 걷는 4시간 동안 사람 한 명 만나지 않았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있었지만  설렘과 자신감, 그리고 지리산 길을 걷는다는 행복감이 더 컸기에 나는 또 해낼 수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