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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뿌리 씹던 시절

by 작은거인



주방창 너머 텃밭에 층층파가 뾰족뾰족 올라오고 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 쌀을 씻고 있다.

남편 트럭이 신나게 올라와 주차장에 자리 잡는다. 트럭에서 내린 남편 손에 굵직한 칡뿌리가 들려 있다.
주방문이 열리고 남편 목소리와 칡뿌리가 쑤욱 들어온다.
"칡뿌리 누가 줘서 가져오긴 했는데 어디 쓸데 있어? 아님 버릴까?"
"그걸 왜 버려? 말려서 물 끓여 먹으면 되지."
어정쩡하게 둥둥 떠 있던 칡뿌리는 다시 주방을 나간다.



남편은 마당 수돗가에 앉아 칡뿌리를 자른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잘린 뿌리를 결대로 주욱 찢어 입에 넣는다.
입안에 쌉싸름하면서 달큼한 물이 가득 찬다.
칡뿌리를 씹으며 나는 어느새 유년시절로 달려가고 있다.




아버지는 눈이 녹고 땅이 녹기 시작하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다.
산에서 내려온 지게에는 굵직굵직한 칡뿌리가 들어 있다.
흙을 씻어내고 톱으로 잘라 통째로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송곳니로 칡뿌리를 야무지게 물고 주욱 찢어 입에 넣고 씹었다.
질기디 질긴 뿌리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씹었다.
칡뿌리를 씹는 날은 입 주변에 갈색물이 들어 몇 날, 며칠 세수도 안 한 얼굴이 되곤 했다.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에 칡뿌리는 우리의 과자가 되고 껌이 되었다.

우주의 모든 생명에는 음과 양, 암컷과 수컷이 있듯이 칡뿌리에도 암칡과 숫칡이 있다. 암칡은 사람의 종아리처럼 오동통하게 생겼다. 식감도 부드럽고 단물이 더 많이 나왔다.
숫칡은 쓴맛이 강해 우리는 암칡을 차지하려고 다투곤 했다.


칡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남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린 시절 이야기를 쫑알거렸다.
남편은 흘리듯 내 말을 받았다.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세상도 변했다.
내 입 맛도 변해 이제는 전분이 많은 암칡 보다 맑고 담백한 맛이 나는 숫칡을 좋아한다.
남편이 썰고 있는 건 숫칡이다. 씹던 칡뿌리를 뱉고 다시 조각난 칡뿌리 하나를 입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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