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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남편 나름의 중립

by 마음벗

남편에게도 나름의 중립 의지가 있었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행동을 보고 종종 나무랐다.

남을 배려하지 않거나, 이기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면 곧잘 지적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나름 현명한 사람이라 여겨졌다.

그의 기준은 명확했고, 남들에 대해서는 평등했다.


하지만 그 평등함은 아내 앞에서만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 보는 세상의 정의는 단호했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대할 때만큼은 이상하리만큼 기준이 느슨해졌다.

그의 말은 늘 이렇게 끝났다.

“그럴 수도 있지. 너도 가족이잖아.”

그 말속에 함정이 있었다.


그는 ‘가족’이란 단어가 주는 무게를 자신처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몰랐다.

그에게 가족은 편안한 울타리였지만, 나에게 가족은 대응이 불가능한 질서였다.

그는 시어머니께 따박따박 말대꾸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이미 입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중립은 사실, 그가 누릴 수 있는 발언권 위에 세워진 권리였다.


그는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공정하다고 믿었지만 그 공정은 애초에 같은 조건 위에 세워진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남편은 시어머니에 대한 나의 긴장과 불만을 단지 나약하고 배려 없는 아내의 투정이라 여겼다.

그는 내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그에게 늘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의 세계 안에서는 허용 가능한 범주였다.

그러나 그 기준은 나에게는 너무 멀고 높았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의 본능적 방어였다.


남편과 나는 같은 상황을 보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렸다.

그에게는 일상의 장면이었지만, 나에게는 마음이 굳어지는 경계의 순간이었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아니라 남편과 나의 기준의 불일치, 그리고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무심한 중립이었다.

결국, 남편이 이 모든 일의 주범이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방어선도 치지 않은 채 나를 전장에 홀로 세워두었다.

방어선 없는 며느리는 한없이 쉬웠다.

누구나 쉽게 말을 걸고, 쉽게 상처를 남길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늘 우호적이지만 결코 방어할 수 없는 작은 나라였다.

그 나라에는 함성도, 경고음도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남편의 말 한마디는 항상 그 작은 나라의 성문을 열어젖히는 신호였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은 잠깐의 침입이 아니라 일상처럼 허용된 관습이 되어버렸다.

그는 몰랐다.

그의 무심한 중립이, 가장 사랑해야 할 아내라는 나라의 마음의 영토를 조금씩 잃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도 표현한다. 며느리는 멍석이다.


남편이 바닥에 시댁 식구들이 편히 앉아 쉴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었다.

처음에는 모두들 멍석이 고마웠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 쉬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위에서 갑자기 시어머니는 마음껏 춤을 추었다.

그 춤은 처음엔 웃음이었지만, 점점 과해지고, 마침내 더욱 과격한 춤으로 변해갔다.

멍석에 상처가 나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깔아준 멍석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괜찮다”는 듯,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멍석이 심하게 상한 것을 남편은 알아차렸다. 그래서 남편 스스로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남편이 갑자기 그 멍석을 거둬내려 했다.

그 순간,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왜 그래?

이 멍석은 나더러 밟으라고 내어준 거 아니었어?”


그제야 남편은 깨달았다.

‘나는 이 멍석을 대하는 멍석 위의 사람들의 태도를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는 멍석을 깔아줌으로써 이미 그들에게 그 멍석을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허락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석을 깔아준 사람은 멍석 위에서 춤췄던 사람보다 더 큰 책임이 있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허락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한 사랑은 멍석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지 않는 것이다.


남편은 시댁 앞에 아내를 내어주지 말았어야 했다.

시댁은 비록 멍석이 깔렸더라도, 그 위를 함부로 밟고 서서는 안 되었다.


그들에게 아내, 며느리는, 그저 하찮은 멍석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극한의 모멸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시댁 사람들의 무례와 무시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사랑하는 남편, 그가 그들에게 나를 내어주었다는 사실이, 바로 아내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핵심임을 알았으면 한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며느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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