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잃고 세상을 홀로 견딘 진짜 홀어머니.
그리고 남편이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홀로였던 정신적 홀어머니.
한쪽은 세상에 홀로였고, 다른 한쪽은 마음에 홀로였다.
두 어머니 모두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외로움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속에는 늘 한 가지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불쌍한 분이다.”
그 안타까움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서적 의무로 굳어지기 쉽다.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마음을 품게 된다.
그 마음은 처음엔 효심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아내의 외로움과 고독을 헤아릴 여유를 앗아간다.
어머니를 향한 연민과 책임감 속에 갇혀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돌볼 힘을 잃고 산다.
그런 남편의 모습은 어쩌면 아내를 어머니처럼 만든 시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이어지는 외로움의 고리는 세대를 넘어 되풀이된다.
“홀어머니의 자식과 결혼할 바엔 고아와 결혼하는 게 낫다.”
오래된 말속에는 씁쓸한 현실이 담겨 있다.
그저 ‘홀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수고스러움’ 때문일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홀어머니는 아들에게 감정의 발작버튼이 된다.
“우리 엄마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게 나를 키웠는데.”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데.”
그 말속에는 아내에게 향하는 감정보다 더 큰, 죄책감 섞인 충성심이 숨어 있다.
남편이 이런 인식을 반복할수록, 아내는 점점 움츠러든다.
그녀의 감정은 ‘이해받을 권리’에서 ‘참아야 하는 의무’로 바뀐다.
어머니의 부탁이 아무리 무리하고 반복되어도, 남편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게 “불쌍한 우리 엄마를 두 번 상처 주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야말로 부부 사이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그 믿음은 냉정한 판단이 아니라, 끊어낼 수 없는 끈의 비극을 드러낸다.
결국, 며느리는 내가 이 가족에게서 떠나면 모두가 평화로워질 것 같았다.
나 하나만 사라지면, 그들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내가 ‘없어지는 것’만이 이 관계의 해답처럼 느껴진다.
그 관계의 굴레에서 며느리가 벗어나는 길은 오직 떠날 결심뿐이라 여기게 된다.
남편의 입에서 “우리 엄마가 불쌍하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그 속엔 이런 뜻이 숨어 있었다.
‘너도 나처럼 우리 엄마를 불쌍히 여겨야 해. 그리고 잘해줘야 해.’
남편에게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너도 우리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서, 이런 일 가지고 그렇게 예민하게 굴 필요 있어?’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 행동, 은근한 말투가 뿜어져 나온다.
이 말과 행동 속에는 “그러니 네가 이해해야 한다”는 무언의 명령이 깔려 있다.
그건 곧 아내에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나는 그 족쇄를 벗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쇠사슬은 단단했다.
딸그락거리는 쇳소리가 내 귀에 맴돌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내가 1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남편이 납득할 만큼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나서야 남편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왜 나의 불편하다는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을까.
그전엔 왜 그 억울한 고리를 끊어주지 못했을까.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남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불쌍한 어머니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아내의 마음을 외면하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진짜 효도인가?
어머니의 결핍을 아내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이, 과연 진짜 효도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도, 책임도 아닌, 세대 간 상처의 복제일 뿐이다.
그것이 정말 당신이 꿈꾸는 가정의 모습인가?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의 규칙에 수긍하고, 스스로를 희생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