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할 수 없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걸까?
언제부터였을까?
그저 힘든 삶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의 결핍 때문이었을까?
결혼하고 10년이 되었을 시점
"아버님의 임종이 머지않았으니 가족들과 함께 있으세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
1인실에 가족들이 모였다.
임종을 맞이하기 불과 2~3시간 전이었다.
시어머니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얕은 숨을 간신히 몰아쉬고 있는 시아버님 앞에 요구르트를 들이밀며 먹으라고 시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고 시아버지께서는 그 와중에도 인상을 쓰시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를 가리키며 "며느리 줘! " 힘들게 말씀하셨다.
시어머니께서 요구르트를 짜증을 내며, 내 손에 쥐어주었고 그녀의 찡그린 얼굴과 날 선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시아버님은 조용히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너무 슬프고 괴이했다.
‘요구르트를 임종을 앞두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여 호흡을 의지하시는 분에게 왜?’
나는 그날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시어머니는 무엇인가 모자라신 분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무례하거나 고집 센 게 아니라, 정서적 공감의 회로 자체가 결핍된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죽음의 끝자락 앞에서도 자신을 중심에 두는 사람
함께한 시간이 힘들고 행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죽음의 앞이 아닌가?
이제와 남편 그리고 시댁 식구들을 되돌아보니 모두들 정신적으로 힘들고 아픈 사람들이었다.
정신적으로 결핍된 사람은 때로는 극도로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언뜻 평범해 보이던 언행 속의 숨겨진 이상함과 왜곡된 정서들 그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며 퍼즐처럼 맞춰졌다.
내면의 깊은 결핍으로 인한 행동이었다.
타인을 향한 공감보다 자기감정에 갇힌 사람은, 사랑보다 통제를, 배려보다 분노를 선택한다. 자신도 알지 못한 채 타인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는 수많은 감정의 굴곡을 겪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 속에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가 있었고, 때로는 그 세계가 나를 깊이 끌어내렸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의 삶에는 각자의 배경과 상처가 있고, 그것이 지금의 모습을 만든다는 것.
남편에게는 무섭도록 가난했던 유년 시절이 있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절에 그들의 가족에게는 끈끈한 유대감과 함께 부모님들이 서로 채우지 못한 정서적 부족함을 자식들이 채워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도 생겨나게 되었던 것 같았다.
시아버님을 대신해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을 꾸리며 쉼 없이 일해온 시어머니였다. 항상 밖으로만 향하는 시아버지의 걸음은 시어머니에게 정서적 부재를 느끼게 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시어머니를 안타까워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남편은 시아버지의 정서적 부재를 채워주며 살아왔다
나 역시 시어머니의 불행하고 고단했던 세월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노고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까지 보상의 의무가 주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 일은 그들 가족 안에서 감정과 사랑으로 나누어야 할 몫이지,
내가 그들의 무례를 받아들이고 참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억압, 비난과 무례와 무시, 비아냥으로는 절대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
영혼을 멍들게 하고, 관계를 무너트릴 뿐이다.
사람에 대한 존중,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제 나는 벗어나려 한다.
몽니 가족, 그동안 잘 지냈지?
이제 내 마음은 나를 위해 쓸게
안녕, 정말로....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