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빕 Dec 14. 2024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학교 지원하기

그리고 학업 동기서 작성 전문가가 되었다.




학교 지원 자격을 갖추기까지


체류증을 위해 델프(Delf) B2 시험을 보고 얼떨결에 턱걸이로 합격했는데, 그 덕분에 나는 프랑스 대학교에 지원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에서 마친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각종 성적표와 증명서를 발급받아 번역과 공증 처리를 하는 일들은 한국에 있는 동생이 맡아주었다. 내 동생은 타지에 있는 언니를 위해, 자신의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이 온갖 증명서 관련 행정과 우체국 EMS 발송의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학업 동기서 작성의 고민


이런저런 서류들을 빼고 내가 준비해야 될 단 하나의 문서는 ‘학업 동기서’였다. 간단한 서류지만 이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했다. 이 짧은 글이야말로 지원서를 확인하고 합격 여부를 판단할 담당자에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써야 되지? 일단 분량부터 찾아보니, 한 장 이상을 넘기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고 한다. 그래, 짧아서 좋네. 하지만 이건 쓰다 보니 결코 쉬운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A4용지 한 장 안에 욱여넣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한국 대학 리포트처럼 글씨 크기나 자간을 조절해 분량을 조절하는 수법을 여기서 쓸 수는 없었다. 어차피 학업 동기서는 dossier vert라고 하는 지원 서류 안에 자필로 작성해야 했고, 그만큼 가독성을 요구하면서 쓸데없는 내용을 붙여 글을 지루하게 만들지 말라는 얘기였다. 매번 많이 쓰는 게 노력을 보여주는 성의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점에서도 꽤 충격을 받았고, 많이 배웠다. 실제로 그 이후에 대학에 가서도 과제를 쓸 때 분량을 넘으면 교수님들이 몹시 싫어했다. 이 늪에 빠져 어떻게 정제된 단어와 표현들을 통해 내 모든 걸 보여줄지 한 달간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동기서 작성이 너무 어려워요


프랑스어는 미묘한 뉘앙스가 살아있는 언어이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이 말맛을 살려서 언어유희를 즐긴다. 하지만 학습자에게 그런 센스를 발휘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기서를 쓸 무렵 나는 리옹의 사립 어학원에서 나와 국립대학 어학원으로 옮긴 상태였는데, 그곳에서 네 명의 선생님을 계속 괴롭히며 내가 쓴 글을 첨삭받았다. 단어의 용법이 맞는지 틀리는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예를 들어 goût라는 단어는 원래 ‘맛’을 의미하는데, 요리나 미각에 관련해서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도 있었고, 예술 계통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결국 나는 가장 박식해 보이는 선생님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goût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에 그 선생님께 최종적으로 수정본을 확인받고 나서야 지원서를 제출했다. 여러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당시엔 당연히 인공지능 기술이 없었으니, 뉘앙스고 뭐고 편하게 알아볼 수 없었던 시절이다.


프랑스의 서류 문화 이해하기


학업 동기서를 쓰기 전, 구글에서 포맷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어학원을 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배우다 보니, 프랑스에서는 이런 문서의 양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심지어 핸드폰 요금제를 해지할 때도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야 하고, 이 서류조차도 정해진 서식이 있었다. 구글에 lettre de motivation(동기서)을 검색해 보니 통일된 양식이 나왔다. 이런 형식의 문장들을 써야 하는구나!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들이어서, 확실히 지원할 때에 특별히 쓰는 프랑스식의 표현임을 느꼈다. 그리고 내 정보를 담아 임의로 그러나 정성 들여 작성해 보았다. 일종의 동기서 샘플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나는 그 뒤로 더 공부해 내가 지원할 학교와 학과에 맞는 문장들을 찾아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혜경언니


당시 제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대구에서 온 혜경 언니였다. 어학원에서 나는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었고,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도 드물었는데, 언니와는 빠르게 친해졌다. 언니는 대구에서 회계 관련 일을 하다가 제빵을 하고 싶어서 프랑스로 온 사람이었다. 제빵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용기를 낸 언니의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언니는 강단 있고 뚝심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언니가 너무 좋았고, 나와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언니는 어학 성적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지만, 일단 학교를 지원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학업 동기서 작성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내가 만든 샘플 동기서를 언니에게 공유하고, 언니의 상황을 듣고 나서 어떻게 고쳐 쓰면 좋을지 함께 논의하며 동기서를 작성해 나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언니는 그때 내가 대충 쓴 동기서를 준 줄 알았다고 한다. 나랑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시기라서 그렇게 성의 있게 쓴 글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에게도 그 문서를 전달했다고. 나는 ‘언니라서, 언니가 너무 좋아서 선뜻 공유한 거지, 쉽게 쓴 게 아니다’라고 얘기했었다. 언니는 미안해하면서 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다른 데에 공유하지 말라 당부했다. 나도 새삼 내가 언니를 정말 많이 아꼈다는 걸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혜경 언니도, 그 동기서를 전달받은 친구도 원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둘 다 어학 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더 놀라운 결과였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고, 내 글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 후로도 나는 새로 만난 많은 친구들의 학교 지원서를 도와주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