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봉다리
- 그 봉지를 받지 않은 것을, 30년 넘게 후회하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다. 쓰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오래 되었구나. 얼마 전 제삿상에 놓인 엄마 사진이 낯설게 느껴져서 괜히 엄마에게 미안했던 게 생각난다. 어쩌면 살아 계셨던 기억들이 자꾸 흐려지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나보다.
엄마랑 처음 서울 왔던 날, 엄마 첫 수술하던 날, 마지막으로 구급차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던 날.. 굵직하게 다가오는 큰 장면들은 여전히 또렷하다. 그런데 즐겁고 따뜻했던 일상의 순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한 것, 아쉬운 것 그런 게 많이 생각난다.
그 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게 바로 검은색 비닐 봉지에 가득 담긴 과자들, 바로 그것이다.
그날은 평범한 주말 오후였다. 외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내가 한 달에 한 번 집에 다녀가는 날이란 점이 조금 특별했다. 집에서도 30분은 넘게 버스를 타고 나와서 다시 공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 했는데 엄마가 그날 따라 나를 배웅해주러 함께 터미널에 왔다. 버스까지 따라 올라 와 인사를 하고 엄마는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한 그때 엄마가 다시 버스 안에 나타났다. 과자가 가득 담긴 큰 검정 봉다리를 들고 말이다.
순간 떠오른 것은 그 버스 안에 타고 있던, 같은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있던 선배들이었다. 출신 지역 동문회까지 활발하던 학교여서 얼굴을 트고 지내던 남자 선배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멀미를 잘하는 딸을 위해, 버스가 출발할까봐 급하게 과자를 담아 온 엄마가 아니라 그들이 신경쓰였다. 내 착각이었겠지만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것도 같았다. 창피했다. 그 순간 엄마도, 검은색 비닐 봉지도 불룩 튀어 나온 과자들도 모두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그 봉지를 받지 않았다. 뭐라고 했는지, 얼마나 험한 표정을 지었는지는 생각 안 나지만 곧 출발할 버스 안에서 실랑이를 할 수 없었던 엄마는 금세 포기하고 버스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주로 돌아가는 내내 선배들에게 부끄러웠고 엄마를 원망하며 속상해했다. 그때는 그 봉지를 받지 않은 것을 30년 넘게 마음 아파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저녁 자습을 다녀왔더니 그 검정 봉다리가 공주 자취방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같이 공주에서 살고 있던 언니가 가져온 것이었다. 엄마는 읍내에서 (나보다 조금 늦게 공주로 돌아가는) 언니를 기다렸다가 그 봉지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네가 안 받았다며? 엄마가 주더라. 너 먹으래.“
언니가 나에게 핀잔을 한 건 아닌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봉지를 들고 터미널에서 언니를 기다렸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조금 더 생각하니 민망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그냥 내려야했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니라도 받아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언니마저 그걸 안 받아왔으면 어쩔 뻔 했나. 결국 검정 봉다리에 담긴 엄마의 애처로운 사랑은, 어리석게 거절한 나에게 무사히 전해지긴 했다.
그런데 그날 전화를 해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는지 안 했는지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버스 안 순간은 오늘까지도 또렷하고, 언니가 가져 온 봉지를 본 후 후회했던 기억도 분명한데 그후는 모르겠다. 제대로 표현을 못했던 건지, 시간이 오래 되어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이 장면에 대해서 나는 가끔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너희들, 부모님께 잘해라, 나중에 잘못한 것만 생각난단다.“
아이들은 흥미있게 경청하지만 지금의 내 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할 게 뻔하다.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조금 더 살갑게 굴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늗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들에게 이 장면을 자꾸 말하는 것은, 사실 차마 다 전하지 못했고 영원히 전하지 못할 내 말을 계속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정말 미안했다는 그 말을 하고 또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