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미국에 있는 셀린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며칠 새 시차에 충분히 적응했는지 밤새 한 번도 눈뜨지 않았다. 짐을 빨리 싸서 출발하려고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오늘도 6~7시간의 장거리 운전을 앞두고 있었기에 허리가 안 좋은 셀린이 벌써 걱정이 되기도 했다. 8시도 채 되지 않아 짐을 다 싸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동안 셀린도 옆에서 말없이 짐을 쌌는데 표정이 꽤 무겁고, 침통해 보였다.
사실 급하게 예약하고 이틀을 묵었던 호텔은 처음에 부과했던 말도 안 되는 추가 요금 이외에도 서비스가 엉망이었다. 침대 양옆 벽에 붙어있던 콘센트 중 내가 눕던 쪽의 콘센트는 전기가 나가 플러그를 꽂아도 핸드폰 충전이 되지 않았다. 첫날부터 프런트에 있던 직원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알아보겠다는 말만 하고 우리가 떠나는 날까지 고쳐주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이틀 내내 셀린이 누워있는 쪽 콘센트를 이용해서 핸드폰을 충전해야만 했다.
다른 일도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갔었을 때는 분명 탁자에 생수 두 병이 놓여있었는데 다음날인 어제저녁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생수가 한 병도 없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직원이 받았다. 직원은 물은 따로 요청하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는 답을 주었다. 물을 가져다준 또 다른 남자 직원에게 콘센트 얘길 다시 하며 언제 고쳐줄 건지를 물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은 잘 모르겠다며 프런트에 물어보겠다는 말만 하고 떠났다. 프로 컴플레이너인 셀린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 호텔 프런트 직원이 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행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셀린은 호텔을 예약했던 웹사이트에 전화해서 우리가 겪었던 모든 부당함과 불편을 알린 후에야 호텔 방을 나왔다. 프런트에는 우리가 이틀 내내 봤던 불친절한 직원이 아닌 처음 보는 다른 직원이 서 있었다. 우리는 쓴소리를 몇 마디 던지며 체크아웃을 마쳤다. 가는 길에 캐나다 맥도날드에 다시 들렀다. 나는 어제 먹었던 치킨 랩, poutine, 콜라를 시켰다. 셀린은 햄버거에 콜라를 주문하며 세시원 소스도 나중에 인터넷으로 되팔아보겠다며 따로 8개를 더 샀다.
캐나다 국경을 떠나는 검문소에 다다랐을 때 차들로 길게 늘어진 줄을 마주했다. 한참 동안 기다리는데 옆 라인이 조금 빨리 빠져 재빨리 라인을 갈아탔다. 바로 앞에 차가 차례가 되어 검문소에 멈추는 걸 본 셀린은 차를 검문소 쪽으로 조금 더 바짝 댔다. 그때 검문소에서 중년의 키가 큰 백인 남자 직원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더니 우리 쪽으로 몇 걸음 걸어와 그만 오라며 멈추라는 사인을 보지 못했느냐고 소리쳤다. 그 어떤 사인도 보지 못했던 우린 놀라서 차를 살짝 뒤로 뺐다.
우리 차례가 되어 검문소로 다가갔다. 우리에게 소리쳤던 검문소의 남자는 매우 험상궂은 얼굴로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 후 어디로 가느냐,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이냐, 같은 질문을 매섭게 쏟아냈다.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 예, 아니오 같은 수동적인 대답을 했다. 간 큰 셀린은 이런 상황에도 침착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답을 이어갔다. 모든 질문을 통화한 우리에게 남자가 마지막 말을 날렸다. 자기가 실은 오늘 매우 긴 시간 동안 일하는 중이라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평소라면 당신도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밝게 화답하는 셀린이었지만, 그 순간만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의 마지막 말을 뭉개버리는 것으로 작은 응징을 가했다.
검문소를 통과하며 타인의 '화'에 얼굴을 맞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운이 없는 하루였다. 우리 둘 다 마음을 다쳤다.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분위기를 전환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나도 침묵의 안개에 묻혔다. 곧 눈이 감겼다. 가는 내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저녁때 셀린의 동네에 들어왔을 때는 거의 실신 지경으로 자고 있었다. 차를 주차하고 짐을 내려 집으로 들어가며 적어도 아무런 사고 없이 집까지 도착했으니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장시간 차 안에 갇혀 뻣뻣해진 몸을 뜨거운 물로 씻고 셀린에게 거실에 있는 소파에서 자겠다고 말했다. 지난밤 침대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셀린의 잠을 방해했기에 또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실 소파는 내가 여태껏 살면서 겪어본 가장 푹신한 소파였다. 소파에 누워 TV를 켜고 넷플릭스를 열었다. 한국 넷플릭스와는 드라마 구성이 매우 달랐다. 리모컨으로 계속 누르며 어떤 드라마가 있는지 구경만 하다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