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 일기-인사이드 욕망 아웃
5th day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하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0시 32분. 셀린이 있는 2층 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어제 운전으로 몸을 혹사한 탓이리라. 셀린에게만 운전의 책임을 지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서른쯤에 운전면허를 땄지만, 운전할 줄 모른다. 운전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았던 탓이다. 그저 막연히 하면 더 편하겠지만, 당장에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하는 정도의 마음이었다랄까. 언제나 운전은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하위로 밀려나 있었다. 지금 같은 순간이 하위에 파묻혔던 운전 갈망을 다시 끌어올리고 싶은 경우이다. 차 안에서는 한결같이 수동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때론 나 자신을 짐처럼 느끼게 하니까.
전날 셀린에게 미리 허락받았었기에 냉장고에서 체리를 꺼내 뽀득뽀득 씻고 아침으로 먹었다. 조용히 가져왔던 책을 읽으며 셀린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2층에서 작은 소음이 일더니 곧 셀린이 거실로 내려왔다. 나는 몸이 좀 어떠냐고 물었다. 셀린은 푹 잤더니 한결 좋아졌다며 오늘은 뭘 하고 싶냐고 말했다. 이미 점심때가 다 된 시각이었다. 어디 멀리 가기엔 좀 애매했다. 문득 영화가 보고 싶어져 근처에 극장이 있느냐고 물었다.
얼마 전 토요일, 남편이 딸과 둘이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러 갔었다. 그 영화 1편을 재미있게 봤었기에 2편이 나오면 꼭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나만 빼고 둘만 그 영화를 봤다고 하니 조금 섭섭했다. 그렇다고 토요일도 일하느라 바쁜 나 대신 딸과 시간을 보낸 남편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나중에라도 VOD가 나오면 집에서 볼 결심을 했었다. 셀린 집 근처 극장에서 인사이드 아웃 2를 상영하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 지금이야말로 그 영화를 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바로 준비하고 극장으로 향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들르는 일은 어느새 일과가 되었다. 새가 물고기를 잡아 통째로 꿀꺽 삼키듯 차 안에서 치킨 랩과 커피를 목뒤로 넘겼다. 그동안 차는 극장에 도착했다. 복합 쇼핑몰이나 백화점 안에 있는 한국의 극장과 달리 이 동네 극장은 가로가 긴 한 층짜리 건물이었다. 주차하고 극장에 들어가 곧장 자동 매표 박스로 다가갔다. 영화 시간을 확인했다. 우리가 보려던 영화는 이미 5분 전에 상영을 시작했다. 내가 다음 영화를 예매해야겠다고 하자 셀린이 말했다. “뭐 하러? 광고를 5분 넘게 하니까 지금 예매해도 괜찮을 거야.” 다음 영화는 3시간 후에나 있었다. 나는 몸이 달아올라 그러면 빨리 들어가자고 대꾸하며 셀린을 잡아끌고 바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상영관은 정말로 그때까지도 광고 중이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후 1~2분쯤 지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의 한 장면도 놓치지 않은 데다가 광고까지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점은 극장 의자였는데 가정용 소파처럼 크고 푹신했다. 셀린이 옆에서 의자 오른쪽 손잡이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눌러보라고 가르쳐 주었다. 버튼을 눌렀더니 의자가 우등 고속버스보다도 더 편하게 뒤로 젖혀졌다. 나는 거의 누워서 안락한 기분을 만끽했다. 셀린이 그 옆에 넘실넘실 물결 진 川(내 천)자 버튼도 눌러보라고 알려주었다. 그걸 누르자 이번에는 등이 따뜻해졌다. VIP 상영관도 아닌데 의자가 이렇게 좋다니…. 나는 확신의 어투로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좋은 건 극장 의자가 분명하다고 셀린에게 말했다.
영화를 보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중간에 자면 어떡하나 살짝 긴장되었다. 나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집중하며 들었다. 다행히도 영어 실력보다 좋은 눈치코치 실력은 녹슬지 않았나 보다. 몰입해서 보다가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자 감정을 절정에 내다 꽂으며 펑펑 울고야 말았다. 정작 셀린은 중간에 꾸벅꾸벅 졸다가 우는 날 발견하고는 대체 왜 우느냐고 놀려댔다.
극장을 나온 뒤 우리는 아웃렛 매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영화를 보니 갑자기 딸이 떠올랐고, 딸에게 줄 선물이 사고 싶어졌다. 우리는 아웃렛 매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며 딸에게 선물할 책가방을 찾았다. 적당한 가방을 찾지 못해 이 가게 저 가게를 돌아다니는데 7시가 되자 가게들이 일제히 문을 닫아버렸다. 아무런 수확이 없었지만,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웃렛을 나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이미 3일 동안 맥도날드를 먹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순수한 고기가 당겼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강력히 스테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외쳤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해물 수프와 거대한 롱혼 스테이크를 시켜 전투적으로 모조리 먹어 치웠다. 셀린은 스테이크를 절반만 먹더니 도저히 더는 못 먹겠다며 직원을 불러 나머지는 포장해 가고 싶다고 요청했다. 직원은 일회용 플라스틱 상자 2개를 가져다주었다. 셀린은 상자에 먹다 남은 스테이크를 넣었고, 난 내 스테이크 접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구마를 넣었다. 계산할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팁을 얼마나 해야 할지를 상의했다. 셀린은 보통 음식값의 10~20%를 한다고 했다. 그날 우리를 담당했던 중년의 백인 여성 종업원은 친근한 웃음을 날리며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기꺼이 20%의 팁에 찬성했다. 미국에서의 하루가 또 지나갔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