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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Nov 10. 2024

새벽에 새긴 생각

지친 몸을 5시간 정도 재우고 일어났다. 평소처럼 화장실에서 나와 아이 방으로 들어가 책상 불을 켜고 앉았다. 어제저녁에 먹었던 음식이 다 내려가지 못하고 위산에 녹은 채로 머물고 있는지 시큼한 냄새가 말라붙은 입 밖으로 올라왔다. 거실로 나왔다. 부엌 천장에 달린 조명 중 가장 불빛이 약한 조명을 켰다. 노란 불빛이 샹들리에 유리 조각에 부딪혀 천장의 어둠을 알알이 깨트렸다. 싱크대에서 컵을 하나 꺼내 정수기로 따듯한 물을 담고 두 손으로 컵을 들고 천천히 마셨다. 식도 길을 따라서 내려가는 열기가 발묵(潑墨) 하듯 가슴으로도 번졌다.


방으로 돌아와 물이 반쯤 남은 컵을 책상에 내려놓는데 물 두 방울이 책상 바닥에 떨어졌다. 두 개의 동그란 물방울이 볼록렌즈가 되어 책상의 나뭇결무늬를 팽창시켰다. 혹시라도 무늬가 물방울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하며 우두커니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물방울 표면에 책상을 비추는 형광등이 반사되어 하얀 끈이 걸쳐진 것처럼 보였다. 가느다란 빛의 끈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무늬를 꾹 내리눌렀다.


나는 곧 물방울에 흥미를 잃고 책상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어제저녁 택배로 집에 도착한 정호승 시인의 시집이 놓여있었다. 시집의 첫 장을 펼치고 노트를 꺼내 필사를 시작했다. 방금까지 흰 종이였던 공간을 검은색의 선들로 채웠다. 펜 끝에서 만들어지는 글자들은 소리를 죽이고 속삭거렸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글씨를 쓰는 손목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문장을 따라 잔잔히 울렁거렸다.


필사를 끝내고 노트를 덮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으로 들어갔다. 페이지를 더듬을 때마다 의식은 현실을 떠났다. 오직 찬 바닥에 붙이고 있는 시린 발만이 현실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 후 한기가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서 무릎담요를 찾아와 다리에 덮고 다시 앉았다. 책을 재차 펼쳤다.


그 순간, 내내 피해 다녔던 생각이 순식간에 덮쳐왔다. 이미 벌어져 버린 문제들,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일들, 현재에 대한 불만족, 미래에 대한 불안, 지금의 자신에 대한 의심. 정답이 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끊어낼 수 없는 어리석은 생각들에 결국 우울해졌다.


이런 잡다한 우울감은 주기적으로 오는 생리현상과 같다. 알면서도 당하는 사기처럼 매번 무거운 기분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집안의 훈기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찬 공기를 막는 이중 창문 너머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음이 들렸다. 11월의 새벽은 은밀히 몸을 숨긴 겨울이 동트기 전 몰래 기어 나와 활보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차를 타고 어디론가 빠르게 가는 사람들도 나처럼 우울할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두꺼운 코트에 뻣뻣한 몸을 욱여넣고 바쁘게 나가는 사람은 기분을 가라앉힐 시간이 없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어둠조차 막지 못하는 그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이런 기분에 빠진 건 어쩌면 몸을 덜 움직여서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무거울 때는 어떻게든 몸으로 우울감을 탈탈 털어야 한다.


7시를 알리는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현실로 나가야 할 시간이 왔다. 책을 덮었다. 거실로 나가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직 자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 몸을 꼭 안아주었다. 향긋한 샴푸 향과 아이 살냄새가 섞여 코로 들어왔다. 기분이 한결 올라갔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는 아이를 부드럽게 흔들며 말했다.


“아침이야. 이제 일어날 시간이네. 하루를 시작해야지.”


그건 마치 누군가가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언제나 오늘은 돌아온다. 지금은 이미 벌어진 일에 매몰되기보다 다시 현재에 집중할 때다. 의식부터 오늘로 돌려놓자.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며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매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면 된다. 일단은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는 습관부터 시작하자.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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