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척 누나 장례식에 가야 해서 많이 늦을 것 같아.”
느슨한 실처럼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친척 누나 중 누구냐고. 자세한 질문을 던지려다가 멈췄다. 남편의 가라앉은 음성이 질문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기에. 전화를 끊고 잠시 고민했다. 다시 전화해서 나도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왠지 남편이 그날 밤 장례식장에서 바로 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은 남아 딸을 돌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밤늦게 남편에게서 내일 발인할 때까지 같이 가기로 해서 오늘 못 들어온다는 연락이 왔다.
저녁보다 피로를 더 많이 먹은 듯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팔다리가 흐느적거리고 기운이 없었다. 몸살이었다. 늦잠 자겠다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옷에 몸을 구겨 넣고 겨우 출근해서 일했다. 바쁜 토요일이었지만, 다행히 순조롭게 일이 끝났다. 아이에게 전화했다. 돈가스가 먹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근처 식당에 들러 돈가스를 포장해서 집에 왔다. 늦은 점심을 함께 먹고 나니 식탁을 치울 힘조차 없었다. 그대로 이불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딸이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 TV를 켜고 넷플릭스 만화를 봤다. 딸을 안고 함께 만화를 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이 검게 변한 후였다. 몸은 여전히 추웠지만, 자고 나니 한결 나았다. 딸도 어느새 옆에서 자고 있었다. 딸의 가슴이 조용히 오르락내리락하고 얕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얼굴을 바싹 붙이고 냄새를 맡았다. 내 아이의 살냄새와 숨 내음이 예쁜 색을 가진 두 가지 물감이 섞인 듯 의초롭게 섞여 코에 들어왔다. 오달진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저녁은 밖에서 먹자고 했다. 우리는 딸의 강력한 주장대로 집 근처 초밥집에 갔다. 함께 초밥을 먹다가 남편이 장례식 얘기를 꺼냈다. 망인은 남편의 이종사촌 누나로 암이 악화해 세상을 등졌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결혼한 적이 없었고, 아이도 없었다. 가까운 친지들이 아홉 평 남짓 가장 작은 공간을 빌려 빈소를 꾸렸다. 망인의 부모님인 남편의 이모와 이모부도 이미 돌아가셔서 조문객도 거의 없었다. 좁은 공간은 오직 친척들이 채웠다. 사촌들끼리 상의해 다음 날로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벽제화장장에서 화장 후 장지 안치까지 끝내고 돌아왔다는 말이 얘기의 끝이었다. 쓸쓸하고 먹먹한 장례식장에서 밤새 술과 옛 추억으로 적셨을 밤을 그려봤다. 순간 몸에 다시 오한이 돌아 앓는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남편은 망인과의 추억을 두어 번 더 꺼내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우리 살아있는 동안이라도 행복하게 살다가 가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마친 남편은 그대로 곯아떨어져 다음 날 정오까지 깨질 못했다. 나와 딸은 여느 일요일처럼 TV를 켜고 ‘TV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을 보았다. 경북 영천 환경사업소에서 30여 명의 직원과 지내는 ‘까미’란 이름의 개가 어느 날 진드기 매개 세균 감염증으로 후지 마비 증상을 겪고 있었다. 사람을 잘 따르고 발랄한 성격이었던 까미가 하루아침에 주저앉아 생활하다가, 급기야 혈뇨까지 보였다. 제작진은 까미를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검사 결과는 골종양이었다. 수의사는 까미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까미의 공동 보호자인 직원들은 청천벽력 같은 시한부 선고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한 직원이 말했다. “까미가 외롭지 않게 남은 시간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내 눈에는 더 많은 눈물이 가랑비처럼 떨어졌다. 모든 죽음은 어쩜 저렇게도 슬플까. 까미가 마지막까지 사랑받다가 떠나기를 빌었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죽음. 하루의 고단함과 내 몸의 고달픔에 잊고 살다가도,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면 가슴이 허무함에 짓눌린다. 치열했던 생의 다음이 사라지고, 더는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무가 되어버리는 일. 그 상태가 정확히 무엇인지. 살아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막막하고 모호해서 가슴 시리도록 두렵고 서늘하다. 그럴 때는 마치 본능처럼 더 선명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 타인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추억, 슬플 때조차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음식,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를 기억해 줄 소중한 사람들 같은 것들. 그런 존재를 떠올리면 다가오는 죽음보다는 지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밤에도 향기로운 숨결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는 그런 삶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가치 있지 않을까. 쓸쓸한 빈소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삶의 속을 채웠는지일 테니까.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