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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밤지공

무덕지다

by 안희정

● 라라크루 일밤지공 2025.11.23.


<순우리말>


무덕지다 : 한데 수북이 쌓여 있거나 뭉쳐 있다


오늘은 모처럼 딸과 극장으로 나들이를 다녀왔어요. 딸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위키드: 포 굿>이 드디어 개봉했거든요. 팝콘과 콜라, 오징어까지 양손 가득 들고 영화를 봤습니다. 세계적인 뮤지컬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라 그런지 2시간 17분의 상영 시간에도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오즈의 마법사>의 세계를 확장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창조해 낸 작가에게 경외심마저 들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작은 비눗방울 같은 소망도 터트렸지요.


집으로 돌아와 밀린 청소와 빨래를 마쳤더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요일에 외출까지 했더니 저녁을 차리는 게 영 귀찮았어요. 배달앱을 켜고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먹음직스러운 찜닭 사진에 눈이 멈췄습니다. 후기도 좋아서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즉시 주문 버튼을 눌렀습니다.


40분 후, 찜닭이 도착했습니다. 식구들을 식탁으로 불러 모았어요. 비닐을 뜯고 뜨끈뜨끈한 용기 뚜껑을 열자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간장 양념이 무덕지게 발라진 찜닭이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식구들이 하나둘 불평을 시작합니다. 간장 양념에 묻혀 처음에는 닭인 줄 알았던 재료들이 알고 보니 대부분 만두, 떡볶이, 고구마였던 거죠. 화려한 겉모습에 속아 사기를 당한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괜스레 식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양념처럼 녹아있었습니다. 착한 마녀로 정의되는 ‘글린다’와 나쁜 마녀의 화신 ‘엘파바’는 사실 사람들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었습니다. 물론 가짜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의 음모에 사람들이 현혹된 까닭도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겉모습도 세상의 판단을 뒤집는 데 큰 몫을 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음식도 사람도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음식은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고, 사람도 겪어봐야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화려한 평판을 가진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을 오래 곁에 두고 아껴주며 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지는 날입니다. 동시에,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도 계속하려고 합니다. 거울을 보며 하나둘 늘어가는 주름을 신경을 쓰기보다 내면을 어떻게 채울지 더 깊이 고민하기로요.


내일 아침에는 조금 일찍 일어나 된장찌개를 끓여야겠어요. 냉장고에서 애호박과 양파, 감자 같은 채소를 듬성듬성 썰어 넣고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끓인 소박한 아침. 비록 볼품없더라도, 얼어붙은 새벽공기를 맞이하기 전 든든한 힘이 되어줄 테니까요.


굿나잇 라라.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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