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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현 Jun 15. 2022

무지를 인정하는 것

세상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서구 사람들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로 아시아 보다 더 빨리 근대화를 이루고, 식민지를 개척하며, 전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핵심은 그들이 그들의 ‘무지’함을 인정했다는 것에 있다. 고대와 중세, 신이 인간의 중심에 있었던 시대에는 동서양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을 믿고,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믿었기에, 새로운 변화나 현상 등에 있어서 큰 관심이 없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번개가 전기 에너지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이 자연현상을 신의 분노로만 인식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동서양의 고대, 중세인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데 흥미가 없었고, 정복을 함에 있어서 그들의 현세적인 목표와 종교를 확장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로마 역시 정복을 행함에 있어서 정복지에 대한 동식물, 자연환경과 같은 조사등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순히 라틴품디움과 같은 농경지를 확대하거나, 속주를 지키기 위해 영토를 넓혀갔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이 모든 것이 뒤바뀌었는데, 신에서 벗어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인간은 애초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기초로 여러 학문들을 만들어나간다.      


이것이 동서양 역사에 큰 차이를 일으켰다고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전한다. 서양은 무지를 인정한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대항해 시대를 열어갔고,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은의 유출등은 유럽 각국에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것을 받아드린 결과 서양은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정복한 지역마다, 탐사대를 보내 인류의 고대 역사를 밝혀내거나, 그 지역의 동식물등을 조사, 혹은 지형 조사를 통해, 식민지 대상의 피지배인들 조차도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내게 된다.      


이러한 서양의 호기심은 끊임이 없었는데, 당시 과학의 패러다임과 제국주의와 맞물려 과학은 지금까지 모았던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열등민족과 우등민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서양인들의 우월주의가 시작되었다. 또 끊임없는 발견과 과학의 발전은 그들에게 진보라는 희망을 주었고,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중동, 아시아의 국가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서양과 달리 이러한 호기심이 발현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을 중심으로 중화사상을 따른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이나 국가의 모든 권력이 왕권에 치중되어있는 국가들, 통일왕조가 오래 지속된 국가들의  경우, 굳이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또 하늘이 정해주신 왕을 중심으로 혹은 속세와 벗어난 것이 전부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둥이 그저 자연현상임을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현상은 그저 왕이 실수한 것이나 신이 분노한 것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현상을 탐구는 동양 역시 행했지만, 서양과 동양은 기술발전에 있어서 동일한 특징을 보이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한민족이 과학기술을 만들어낸 것과 순전히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자 탐험하고 타지를 정복하며 발견하는 것은 그 취지부터가 달랐다.  그렇기에, 동서양의 과학의 발전양상은 서로 차이가 있었고, 서양 국가들이 서로 이권다툼을 하며 아시아로 넘어왔을 때 그제서야,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이성과 감각 능력은 전적으로 믿을만한가? 우리 주변을 둘러싼 정보, 사상, 세상등은 어떠한가? 유발하라리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대부분의 것들은 인간의 허구적 산물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예로 은행의 예금 같은  경우, 수치 상으로 3백만원이 있다고 해도, 실제 은행이 가진 금액은 처음 넣은 현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치상에 뜬 3백만원을 신용하기에 우리의 사회는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허구적인 것을 현실에 있는 것 마냥 믿었기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은 인간의 상상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진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시뮬레이션 세상에 살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한다. 심지어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인류가 여태까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무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중세를 벗어난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고대 중세에 믿어왔던 가치들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이를 부수고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상은 진보라는 것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진보 역시 인간의 기대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했다. 20세기에 들어서 이 기대감은 두 차례의 큰 전쟁으로 박살났고 인간은 이성으로만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 날에는 모든 것이 혼합되어지고, 절대적인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인간은 다시 한번 기대감을 기반으로 허구적 산물을 만들어낸다. 분명히 인간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산물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해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도해지는 순간, 어떠한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무지함을 어떻게든 또 깨닫게 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상상을 시작으로 새로움 발견 그리고 착각을 인지하는 사건과 무지에 대한 깨달음의 반복은 지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동양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믿었던 착각과 서양은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발전시키고 기대해왔던 세상에 대한 착각은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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