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대 고민거리는 뭘 하든 성장이 더디다는 것이다. 늘 분주한데 이렇다 할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뭐든 적당히 하는 버릇 때문이다. 나는 힘들면 멈춰버리는 습관이 있다. 한 마디로 독기가 없다. 매번 역치에 다가서면 그만두는 바람에 성장이 더딘 것이다. 이유를 알면서도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고통 없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성장은 고통을 수반한다. 예를 들어, 근육이 커지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가학적이다. 제 몸의 역량을 넘는 운동으로 근육을 갈기갈기 찢고는, 단백질 보충과 휴식을 통해 다시 근육을 회복시킨다. 기특하게도, 그 과정에서 근육은 앞으로 또 무거운 무게를 들 것에 대비해 한층 크게 만든다. 이를 초과 회복이라고 한다.
근육만 가학적인 방식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다. 뼈도 근육처럼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일부 무에타이 선수들은 이 원리를 이용해 정강이뼈를 단련한다. 단단한 도구로 정강이를 문질러 실금을 만든다. 실금이 붙으면 정강이뼈는 더 강력해진다.
고통-회복-성장.
이것은 세상에 몇 안 되는 진리 중 하나이다. 이제는 진부해진 격언,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고통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감각이 아니다. 성장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고통의 신호가 울리면 그때부터 성장이 시작된다. 헬스 트레이너가 꼭 마지막 열 개에서 '하나 더!'를 외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열 개까지 내 역량이었다면, 마지막 하나는 역치를 넘긴 것이다. 근육은 그 한 개로 인해 성장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가 남긴 명언이다. 실제로 그는 꽤 험난한 삶을 살았다. 일찍이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고, 평생에 걸쳐 건강 문제로 고통받아야 했다. 특히, 20대의 낙마 사고와 병으로 인해 남은 생을 산속에서 요양하며 지내야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집필에 전념했다. 당시 서구의 전통을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세워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만약 그의 삶이 평탄했다면,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영겁의 고통이었다.
만약 지금 편안함을 느낀다면, 한 번쯤 돌이켜 봐야 한다. 그 안식은 성장이 멈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만사태평은 늘 몰락을 야기한다. 군대에서는 훈련 없는 날에도 늘 작업을 한다. 여기서 작업이란 삽질, 창고 정리, 청소, 잡초 뽑기, 땅 고르기, 진지 공사 등 모든 잡일을 뜻한다. 군인들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한다. 느슨해진 군대는 반드시 패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계해야 할 것은 힘듦과 고통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성장을 원한다면 마땅히 근육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기억하자, 고통은 반드시 성장이라는 선물을 들고 온다. 가혹하면서도 상냥하다. 이제는 기꺼이 그를 반기려 한다. 근육도 하고 뼈도 하는데, 그것들로 이루어진 우리가 초과 회복을 못 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