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멈가 Nov 19. 2024

앞으로 세상은 오리의 것



무슨 팔자가 이래?




재미 삼아 어플에서 사주를 봤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해 기존에 해오던 일을 접고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분명 재미로 본 건데, 상당히 뜨끔하다. 지금까지 정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흥미가 우선이었다. 공대를 꿈꾸다가 대뜸 동물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동물복지와 정반대인 실험동물 기술사가 되었다. 그러고는 석사학위는 또 동물생태학으로 받았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한참 고민 많던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점을 봤을 때. 그 점쟁이는 내가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길로 빠지는 팔자라고 했다. 해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거든 굿을 해야 한다고. 당시엔 그를 사기꾼쯤으로 여겨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굿을 받아야 했을까? 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뜬금없이 난임 연구원이 되었다. 그 점쟁이 진짜 용하다. 사기꾼이라고 해서 미안하다. 미아리 고개에 있는 시각장애인 점쟁이였는데, 지금도 있으려나?






 애매한 재능은 저주?


18년 작.. 그림



모두 애매한 재능 탓이다. 나는 뭐든 제법 잘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다. 덕분에 체육은 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성인이 되어 배운 그림도 봐줄 만 했다. 문제는, 뭐든 애매하게 잘했다는 것. 운동선수가 될 정도의 재능과 피지컬은 절대 아니었고, 그림도 작품이라 부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남들한테 칭찬은 받지만, 결코 최고는 되지 못하는 딱 그 정도?



누군가 애매한 재능은 저주라고 했다. 그 저주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재작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작고 귀여운 책 두 권을 출판했다. 글쓰기부터 책 편집, 포토샵까지 직접 배워 만들었다. 조용히 작업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남몰래 '전업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실상은 아직 글로 돈 한 푼 벌지 못했지만.



동네 주민의 반려묘, 순이



최근에 또 새로운 흥미가 생겨버렸다. 동물 촬영에 매료되었다. 우리 집 고양이는 물론이고, 지인에 동네 주민까지, 반려동물 사진을 찍어줬다. 다들 부업으로 해보는 건 어떠냐고 한다. 내심 듣기 좋았다. 이번엔  다를까?



서사를 돌아보니 웃프다. 모든 게 내 선택이라 후회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분야에 전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애매한 재능의 대명사, 오리


뉴질랜드는 이미 오리 천국이었다.



한때 나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 있었으니, 바로 오리이다. 오리는 '애매한 재능'의 대명사였다. 날 수도 있고, 수영도 잘하고, 제법 잘 뛰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늘에선 맹금류에게 쫓기고, 물에선 대형 어류나 파충류에게 밀린다. 육지에서는 개, 고양이, 너구리, 족제비 등등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이유로, 할 줄 아는 건 많은데 어느 분야에서도 통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오리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오리가 아닌 독수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과연, 독수리가 오리보다 강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다. 정말로 독수리가 강했다면 지금처럼 멸종의 길을 걷진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2021년 멕시코국립자치대(UNAM)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맹금류 종의 37%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사람들의 지속적인 먹이 공급으로 개체군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반면, 오리는 어떠한가?

시골은 물론이고, 도시에서도 완벽히 적응했다. 인간의 자연 파괴에도 불구하고 종족 번식 본능을 따라 굳건히 그 대를 이어간다. 환경 적응력과 유연성이 뛰어난 덕(duck)이다. 물갈퀴와 방수 털은 맹금류의 것처럼 멋지진 않지만 유용하기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잡식성이라 즐겨 먹던 먹이가 사라져도 다른 먹이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그 밖에도 오리의 비밀 무기는 많다.



급변하는 게 어디 생태계뿐인가. 인간 사회는 그보다 더 빠르게 변화 중이다. 게다가 AI가 본격 도래하며, 앞으로 대부분의 직업은 사라질 전망이다. 장담컨대, 급변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적응하고, 번영하는 건 맹금류가 아닌 오리다.



만약 누군가 나더러 오리라고 하면 땡큐다.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인재라는 뜻이다. 이제 그런 세상이 됐다. 팔자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보란듯이 가장 잡스럽고 끈질긴 오리가 되어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관광객과 배낭여행자는 다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