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1

언더우드가 뭔데 나를 속상하게 하는 거니

by 윤덕순

1999년, ‘수학여행은 제주도’라는 공식이 깨졌다.

모든 것이 호황이던 무지갯빛 시절은 지나가고, IMF 사태 이후 세상은 온통 흑빛 뉴스로 뒤덮였다.


목적지가 제주도가 아닌 경주였을지언정, 여고생들의 수학여행은 여전히 설렘으로 터질 듯했다.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덕순이도 또래들처럼 수학여행 코디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교복이 아닌 사복으로 사나흘을 보내야 하니, 옷도 새로 사야 하고 거기에 어울릴 신발도 필요했다.


친구와 시내로 나가 적당한 옷을 두어 벌 고르고, 예산이 부족해 못 산 신발은 여행 이튿날에 서로 바꿔 신기로 했다.

“야, 우리 정말 똑똑해, 짱짱!”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렇게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코디를 완성했다.


시끌시끌, 버스 안은 이미 축제였다.

늘 튀지 않던 덕순이도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짝꿍과 내내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오늘 착장 진짜 괜찮지?” 하며 사진도 잔뜩 찍었다.


그날의 옷차림은 흰 티셔츠에 남색 베스트, 그리고 아빠의 하얀 면 반바지였다.

조금 오버핏으로 입고 벨트를 길게 늘어뜨리면 멋스러울 것 같았다.

남색 벨트로 마무리한 한 끗 센스에 스스로 감탄할 정도였으니, 나름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덕순이의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아니면 평소 자기 개그에 웃지 않던 덕순이를 골려주고 싶었던 건지,

목소리 크고 꿈이 희극인이었던 지민이가 버스 맨 뒷자리에서 외쳤다.


“여러분~ 우리 반에 패셔니스타가 있어요!

우리 덕순이!! 덕순이 반바지는 언더우드가 아니여~ 웨스트우드랍니다~~ 깔깔~~”


아… ‘언더우드’가 뭔지, ‘웨스트우드’가 뭔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예비 희극인의 농담에 친구들이 웃음보를 터뜨리는 동안, 덕순이는 그저 굳어버렸다.


그건 그냥 아빠 반바지였다.

핏이 예뻐서 입었을 뿐, 거기에 웨스트우드 라벨이 붙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언더우드 짝퉁’이라니—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억울한 건지, 창피한 건지.

고개를 들어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왠지 아빠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아직 도착하지도 못한 경주 수학여행의 시작부터, 덕순이는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덕순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창밖만 봤다.

짝꿍이 뭐라 뭐라 떠들어도 하나도 안 들렸다. 머릿속엔 계속 웨스트우드라는 단어만 둥둥 떠다녔다. 다들 내 바지만 쳐다보는 것 같아 얼른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다.


주변의 웃음소리와 창밖의 풍경이 멀게 느껴졌다.

그 안에서 덕순이는 혼자만의 공기 속에 갇혀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고, 눈물이 찔끔 떨어졌다.


그때 짝꿍이 나를 쿡 찌르며 말했다.

“덕순아, 덕순아! 저기 봐! 우리 경주 다 왔대~~~!”


짝꿍은 세상에 걱정이란 게 없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에 덕순이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뭐 어쩌겠어. 이왕 왔는데 잊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니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버스 창문 밖으로 스치는 풍경도 왠지 반짝반짝 예뻐 보였다.


그날 밤 단체사진 속의 덕순이는 짝꿍 옆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지, 여전히 웨스트우드 하얀 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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