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범죄피해자를 지원하는 사회서비스 기관의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 다녀왔다. 새삼 범죄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기관들과 서비스가 정말 다양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사관출신으로 계속 나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던 검사가 피해자지원 담당으로 발령받았다며 강의 일부를 진행했다. 나쁜 놈만 바라보다가 피해자들을 바라보게 되고 더불어 이들을 지원하는 기관의 직원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검사의 소회가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하였다. 교육의 퀄리티나 내용을 떠나서 폭력은 무엇인지, 피해자는 어떤 마음일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글의 방향이 엉뚱하게 나갔다. 범죄와 관련 피해자들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교육기간 동안 새삼 느낀 폭력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잠자리에서의 폭력. 바로 '코골이'이다.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난 그동안 피해자였다. 바로 코골이 피해자!
제주도립미술관의 야외 조각상 '해빙시대-1999 타임캡슐' (1999, 강시권)
직업적 특성상, 외부 연수나 교육이 많은 편이다. 2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장기간의 연수활동이 많았고 숙박하며 수강해야 하는 교육도 꽤 있었다. 외국 출장이라도 갈 때면, 일행과 함께 장기간의 2인실 사용은 기본이었다. 그때마다 누군가와 같은 방을 써야 했는데, 운이 좋으면 편히 잘 수 있었고 운이 나쁘면 상대방의 코 고는 소리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심하게 코를 고는 사람이 친한 동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잠들기 전 자기가 코를 심하게 곤다며 양해를 구하거나 구석진 곳으로 가서 잠을 청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아무런 말없이 냅다 잠들고선 엄청나게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잘 때 코를 곤다는데 어찌하겠냐!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2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해 왔다.
보통 남자들은 40대 이후 살이 많이 찐다. 또 흡연이나 음주 등으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남자들도 많다. 젊을 때는 코를 안 골다가 40대 넘어 코를 고는 동료들을 꽤 많이 봤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나도 가끔 코를 골면서 잔다고 하는데, 일상적이지도 않고 그리 심한 편은 아니라고 한다. 출장 중 한 방을 쓰면서 적어도 나 때문에 잠을 설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얘기이다. 어쨌든 젊을 때는 편히 잘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았는데 40대 중반으로 넘어가니 편한 잠자리는 언감생심이다. 상대방의 코골이에 그냥 버티다가 최근에는 귀마개, 이어폰 등을 구비해 출장 숙박에 임하고 있다.
이번 교육에서 만난 숙박친구 (모르는 사람)도 잘 때 심하게 코를 골았다. (숙박친구를 비난하는 뜻은 없답니다^^) 첫날엔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아 좀 버텼는데 둘째 날에는 귀마개도 소용없었다. 심야에 잠을 설치면서 어떻게든 자보려고 양을 세는데 갑자기 '피해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이거, 코골이에 있어선 내가 피해자가 아닐까?왜 상대방은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코를 골면서 잘 자는데 나는 잠을 못 이뤄야 하지? 귓병 치료 중인데 왜 내가 귀마개를 하고 잠들어야 하지? 귀마개 하고 자느라 귀가 더 아픈데 왜 나 혼자 아픔을 감수해야 하지? 이거, 코골이도 폭력 아닐까? 그럼 난 그 폭력의 피해자가 아닐까?
그래. 코골이는 폭력이 맞았다. 타인들과의 잠자리에서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공되는 코 고는 소리는 폭력이다. 20여 년간 새벽녘에 겨우 잠들면서 다음날 교육에서 졸지 않기 위해 커피를 들이마시던 나는 피해자였다. 범죄사건의 피해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외부 위력에 의해 무형의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분명하다. 교육의 집중도 저하, 낮시간의 몽롱함, 카페인을 들이부은 몸, 귀마개 착용으로 부은 귀... 피해자를 구성하는 요소가 다분히 많다. 분명, 난 코골이 피해자다!
그렇다고 그동안 방을 같이 썼던 사람들한테 피해보상을 청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앞으로 아무런 의사표현 없이 귀마개를 하지는 말아야겠다. 심하게 코를 골면, 상대방을 흔들어 깨워서 보란 듯이 나도 복수(?)를 해야겠다. 왜 나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잠자리에서 숙면해야 할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 주최 측에도 과감히 1인실을 요청해야겠다. 필요하면 내가 일부 예산을 부담해서라도 편하게 잘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겠다. 그동안 상대방의 코골이에 잠을 설쳤던 모든 사람들이여! 귀를 막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피해자임을 인식하자. 코골이한테 당당하게 복수의 날을 세우자!
국가 소속 교육 부서가 제공한 잠자리에서 코골이로 인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거 국가가 배상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코골이 피해자 모임, 일명 <코피모> 구성이 시급하다. 전국의 코골이 피해자여! 단결하자. 더 이상 밤에 뒤척이지 말고 귀마개를 벗어던지자. 교육 담당기관과 직원에게 당당하게 1인실을 요구하자! 우리에게도 편히 잘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더 이상 코골이가 없는, 평안한 잠자리를 꿈꾸며!!!!
< 요즘 몸이 안 좋아 옆에서 코를 고며 자는 집의 짝꿍한테 피해보상을 청구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