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가여운 것들은 '여성'이었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라서 영화 관련 리뷰는 잘 쓰지 못한다. 잘 쓰지도 않는다. 영화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의 깊이도 적고 여러 분야의 지식도 많지 않다. 화면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감독과 배우의 내면스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글을 써야 하는데, 혹여 그들에게 해가 될까 봐 주저하게 된다. 최근 집에 같이 있는 짝꿍과 함께 '가여운 것들'을 봤는데, 주저하다가 나도 리뷰 한 번 써보자라고 도전해 본다. 내 맘대로, 내가 본 대로 쓰는, 허접 리뷰이다.
온라인 포털에서 가져온 영화 '가여운 것들'의 영화정보는 이렇다.
천재적이지만 특이한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새롭게 되살아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 갓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던 벨라는 날이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이 넘쳐난다. 아름다운 벨라에게 반한 짓궂고 불손한 바람둥이 변호사 덩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자는 제안을 하자, 벨라는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망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떠나고 처음 보는 광경과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되는데….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놀라운 반전과 유머로 가득한 벨라의 여정이 이제 시작된다.
2023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기 시작해 드디어 2024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을 받고 결국 여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해외 영화제 시상식 여정을 아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상은 갑자기 받는 게 아니고 전 세계의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검증받았다는 뜻이다. 봉감독의 영화에 CJ라는 대기업이 있었던 것처럼 거대 자본이 이 영화 뒤에 있었을 것이리라. 독특한 색감들과 눈을 사로잡는 의상들, 예상 못한 배우들의 노출연기와 역시나 그들의 명연기 등으로 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논쟁거리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세상의 주목을 받기엔 충분하다. 다양한 해석과 접근을 통해 논쟁이 많은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하니 나도 여기에 해석거리 하나 얹어 본다.
1. 왜 하필 여성의 몸 인가?
엠마 스톤의 은퇴작이냐고 할 정도로 수위 높은 정사신이 나온다고 하던데, 성인들이 보기에, 내 기준에 그리 높은 수위는 아니었다. (청소년이 보기엔 수위가 높음) 물론, 영화의 노출수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건, 계속 비치는 엠마스톤의 가슴과 성행위 장면들이었다.
이 영화 속 남자들의 몸은 뚱뚱하거나, 털이 많거나, 삐쩍 말랐다. 성적흥분이라곤 들지 않는 몸이다. 그나마 잘생기고 괜찮은 신체를 가진 남자는 매음굴에서 나오는 성직자의 모습이다. 여성관객들은 이 남성배우들의 몸에 관심이 갔을까? 감독은 꾸준히 여주인공인 벨라의 몸을 카메라로 훑고 성행위 때도 벨라의 몸과 신음소리에 집중한다. 벨라의 성장과 자아확립이 남자와의 육체관계에 기반한다는 의미는 이해되면서도, 주인공이 벨라이니 여성배우의 몸을 보여줘야 했겠지만, 계속 비춰주는 모습은 다소 불편했다. 야동이 아닌 바에야 뭐 이렇게 벨라의 가슴과 성행위장면을 자주 보여줄 필요가 있으려나! (그렇게 더 보여주고 싶었으면 구석구석 벨라의 몸과 좀 더 다양한 성체위들을 보여 주던지 할 것이지!)
여성의 몸은 아름답고 신비하기도 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최근 여성의 내밀함에 대해 속 깊은 영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결국 자본과 엮이다 보니 흥행성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 여배우들이 관객 앞에 벗음으로 나서줘야 이슈가 되고 흥행이 된다. 남자입장에서야 좋겠지만, 배우를 꿈꾸는 여성이나 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는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정말 여성의 깊숙한 이야기들을 다룰 것이라면 유명하지 않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예쁘지 않은 여성 배우들을 통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물론 그 전의 영화에서 감독은 유명하지 않고 그다지 예쁘지 않은 (예쁘지 않다는 것은 제 개인적인 눈높이입니다.) 배우들을 통해서 다양한 여성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엠마스톤과 사전에, 촬영 중 많은 대화를 하면서 제작을 했다고 하던데 그와 같은 진지한 자세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고. 남자 몸에 관심 갖는 세계적인 여성 감독 어디 없나... 덩컨의 벗은 몸을 더 많이 비춰주었다면, 영화는 더욱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을까?
2. 여성의 해방은 남자로부터~ 만 일까?
벨라의 여성성 회복은 남자로부터이다. 벨라의 자유와 본능을 억압하고 가둬두는 자들은 모두 남자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객체도 남자요 방과 침대에 가둬두는 존재도 남자이다.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남자이고 심지어 억압받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긍휼함을 알게 될 때의 그 대상도 남자이다. 감독은 여성과 남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벨라의 해방을 얘기하고 싶은 것 같다. 세상이 남성 아니면 여성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인간의 자아확립과 독립이 꼭 이성을 통해서만일까? 혹은 사람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
벨라를 공산주의자 모임으로 이끈 매음굴의 동료, 혹은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를 알려준 나이 든 여성 포주를 통해서 해방되어 자아를 찾는 모습도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런 장면이 없으니 오로지 성적행동을 통해서, 남성과의 육체관계를 통해서, 혹은 남성성을 없애는 사건을 통해서 여성해방을 이루는 듯하여 다소 불편했다. 남자와 여자가 섞인,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섞인 사회 구성원들 속에서 자아를 찾고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훨씬 아름다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3. 깨달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남는다.
항해 중 벨라는 한 섬에서 빈곤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과 주민들을 목도한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자기의 전 재산, 아니 같이 여행하는 남자인 덩컨의 전 재산을 승무원들에게 건넨다. 세상이 다 행복하지많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긍휼함을 알게 된 순간, 벨라는 자기의 소유를 전부 내놓긴 하지만 빈곤의 그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는다. 벨라는 다시 객실로 들어갔고 배에 남았다. 파리에 와서 먹고살기 위해 매음굴에 취업하는 장면을 보면 빈곤의 현장에 들어선 것 같지만, 결국 자기의 먹고 살 욕구 때문이었다. 그렇게 벨라는 깨달았지만 자기의 자리에 남았다.
남을 돕는다는 것, 긍휼함을 펼쳐 보인다는 것이 인류애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지만 인생에선 더 밑바닥이 존재하고 그 밑바닥에서 더욱 위대한 실천이 있다. 남을 돕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난 그냥 월급쟁이 직업인이 아니던가! 남을 돕는다며 같이 울고는 있을지언정 저들의 삶으로 뛰어든 현장의 극한 활동가는 아니다. 울고 있지만 객실로 돌아가는 벨라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며 배아래쪽의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울고 있는, 그냥 직업인일 뿐이다.
다만, 배안에서 화려한 음식을 먹으며 배 아래쪽 풍경엔 관심이 없는 다수의 승객보다는 그나마 약간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영화는 온통 성적인 이미지와 상징으로 시종일관 채워져 있다. 관음증을 유발하는 촬영기법과 프로이트의 성장발달단계를 쫓아가는 듯한 벨라의 성적집착활동, 여성의 성기와 자궁, 혹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장치들이 화면 곳곳에 나와 그것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들을 외설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나라에서 이런 상상력과 연출력이 나올 리 만무하겠지만, 대놓고 금지하니 성적 은유와 상징에 정통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시겠다. 다행히 인터넷 강국이라 이 외설(?) 예술영화에 대한 리뷰와 다양한 해석은 쉽지 않게 검색과 공유가 가능하다. 혼자서 혹은 배우자와 함께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해 보는 것도 좋겠다. 프랑켄슈타인 같이 삐걱삐걱 몸놀림을 하는 벨라덕에 영화가 끝나고 잠자러 침대로 걸어가는 길이 그리 편하진 않겠지만.
나도 사족하나. 그래서 가여운 것들은 누구일까? 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남성을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여성들.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지금도 남성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어야 하는 여성들은(사회주류인 남성들만의 유리천장을 깨야만 하는 여성들은) 지금도 가여운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