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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 소 Oct 26. 2024

폭력을 본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 폭력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작가의 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고 한다. 대형서점에선 작가의 책들을 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모양이고 소비자들도 구매예약을 걸어놓고 돌아선다고 하니 바야흐로 한강작가의 시대이다. 국내 온라인 도서판매플랫폼의 10월 셋째 주 종합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니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한강작가의 작품이었다. 노벨문학상의 파워가 정말 대단하다. 


잠시 국뽕에 취해 대한민국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러워해도 될까? 너무 기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스포츠선수들도 대단하고 BTS와 블랙핑크 같은 K-pop 스타도 너무 좋다. 세계를 휩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도 자랑스러운 콘텐츠다. 최근 위기라고 하는 반도체는 여전히 우리나라가 전 세계 최고이고 자동차를 자기 기술로 만들 수 있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이다. 고부가가치의 대형 유조선과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을 수시로 지어대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어깨를 으쓱으쓱해도 부끄러움이 없다. 


작가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모든 국민의 기쁨이고 국가의 자랑이기도 하다. 같이 축하하고 기뻐하면서, 이제 조금씩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바라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가의 고민은 글로 써졌고 그 글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아 상을 받았다. 까발려진 우리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이제 한국 사회가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만든 다이너마이트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모습을 보며 반성과 회심으로 평화를 지키고자 했던 노벨의 뜻을 노벨상위원회가 한국 작가를 통해 우리나라에 던진 것이 아니겠는가!


한강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대표작인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작품에 흐르는 폭력과 개인의 존엄에 대한 문제였다. 개인 간, 가정 내, 국가의 폭력실상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진행되는 것들이다. 같이 사는 부부임에도 배우자의 자기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성인이며 결혼까지 한 딸의 입에 강제로 음식을 집어넣으려는 부모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나에겐 예술이고 관심이지만 타인과 제 3자에겐  비상식적이며 혐오스러운 범죄는 여전히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군부독재에나 있었을 국가폭력은 그 방식을 바꾸어 겹겹이 쌓인 규제와 감시로 제도로 국민을 억압하고 있으며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한강작가와 세계적 상을 받은 봉준호, 박찬호, 황동혁 감독 등이 이전 보수정권의 블랙리스트로 관리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국가폭력의 연속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민주화, 인간성, 존엄, 권리 등은 완성되는 게 아니라 성장시키고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다. 작가가 얘기했듯 유리가 깨지면 아무 쓸모없어지는 것처럼.   




아동권리와 아동학대예방을 위해 일하는 현장에 있다 보니 가정 내 아동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한 가부장적 모습은 현실 속 아동들한테는 더욱 강하게 투영된다. 성인자녀의 입에조차 음식물을 강제로 넣는 사회에서 어린아이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맞는 아이, 폭력에 노출된 아이, 방임된 아이, 성적 학대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지금도 많다. 민법상 자녀에 대한 체벌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부모들이 아동을 자기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있다. 내 피가 흐르고 나의 자궁으로 낳았으니 나와 내 가정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내가 낳았으니 나와 내 가정이 책임 있게 보호하고 양육해야 할 인격체가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무한정 지원하고 예뻐해 줄게 아니라 자립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가르치고 성장시켜줘야 하는 역할이 부모들이 할 일인 것이다. 아이를 때리고 방치하는 일, 범죄다.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폭력을 통해서, 혹은 무관심으로 사랑하고 양육하면 안 된다. 내 아이를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로 바라보며 권리와 의무를 가르쳐 나가야 한다. 화가 나서, 술이 취해서, 부모 말을 듣지 않아서, 학교에 안 갔다고  아이들을 때려선 안된다. 추위를 견디게 한다며 한겨울에 얇은 옷을 입힌다거나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을 켜주지 않는 것도 학대행위이다. 비방과 욕설을 통해 자녀를 주눅 들게 하는 것도 훈계를 빙자한 폭력이다. 내 자녀만 곱디곱게 키운다며 남의 아이를 비방하거나 욕되게 하는 것도 폭력이다. 인간은 폭력성을 띠고 태어난다고 하는데, 가정에서 부모의 폭력성을 보고 체험한 아이들은 그 폭력성이 더욱 커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이 깨지지 않는 유리제품으로 온전히 만들어질 때까지 존엄 있게 가르치고 키워야 할 의무가 어른들에게 있다. 


고기가 맛있어진다며 살아있는 강아지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강아지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모습을 기억한 채 살아가는 (혹은 어린 시절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성장한) 어른들, 청소년기에 밤샘노동의 취업현장으로 내몰린 기억을 갖고 성장한 어른들, 국가폭력에 의한 학생들의 죽음과 고문 등의 기억을 갖고 지금껏 살아온 어른들.... 모두 어린 시절 학대와 폭력의 기억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버티며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건 아닐까? 그 폭력은 어디서 왔을까? 지금의 어른들은 그 폭력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극복하기는 한 걸까? 그리고 대체 그 폭력은 누가 제공했을까? 부모? 가족? 국가? 지금의 나는, 폭력에서 자유로운가?


한강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다양해졌다. 작품을 둘러싼 폭력의 광기와 역사, 접근방식, 해결책에 대한 논의들이 여기저기 많아진 듯한 느낌이다. 책을 읽다 보면 80년대 군부의 고문과 학살행위에 대해 구토가 나올 지경인데, 여전히 우리는 시원하게 이를 뱉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반성과 성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이제 우리나라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보유했으니 어른스럽게 살아봤으면 좋겠다. 가깝게는 우리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보고 나아가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 역사적으로 돌아봐줘야 할 대상과 사람들을 지키고 아우루는 성숙함이 있기를.... 노벨상 수상의 기쁨을 우리나라의 성숙함으로 이끄는 시민의식을 기대해 본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사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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