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암흑. 보이지 않으니 과거의 시간이다. 빛이 나며 웅장한 음악이 들린다. 웅장함은 지구 속 작은 공간과 어둠을 보여주고 다소 기괴한 음악이 들린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모노리스의 막대기. 이를 바라보다가 우연히 이를 만진 객체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다. 현재 공간의 객체들은 다름을 인식하고 곧 시간은 미래로 바뀐다.
-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면서...
제29회 부산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와이드앵글 쇼케이브 부문에 출품된 영화 <풍경 드리프팅>의 첫 번째 상영에 좀 늦었다. 덕분에 영화 앞부분을 보지 못했다. 일이 있어 부산을 다시 찾은 김에 핑계 삼아 풍경드리프팅 영화를 다시 관람하게 되었다. 박홍열, 황다은 감독의 영화는 n차 관람이 기본 아니었던가!
첫 관람 때 보지 못했던 화면을 다시 보니 이 다큐멘터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GV 때 두 감독이 했던 이야기들, 영화 상영 후 부산의 모국밥집에서 만나 들었던 영화제작 뒷이야기들의 전체 얼개가 짜 맞춰졌다. 이 감독부부는 일상의 장면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영화 <나는 마을방과후 교사입니다>라는 다큐멘터리도 그랬지만, 이 영화감독 부부의 영화는 n차 관람을 해야 오로지 내 것이 된다.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난 뒤, 갑자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화가 떠올랐다. 제작자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시간과 공간, 빛, 대상(물질)을 다루며 그와 동시에 사용한 엠비언트 음악과 어우러진 이미지들은 큐브릭 감독의 영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처음엔 영화가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렵고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 <풍경 드리프팅>이 공식 개봉을 하지 않아 평단의 평가는 모르겠지만, 일면 편히 보기에는 쉽지 않은 영화이다. 아니 보다가 쉽게 잠이 들 수도 있을 영화이니 일부 관람객에겐 편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두 감독이 영화에서 집으로 배달된 그림을 만나고, 그림이 무인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만나고, 빛이 그림을 만났다. 감독은 첫 GV에서, 영화는 곧 만남이라고 얘기하며 눈 마주침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감독부부는 카메라를 통해 과거와 현재(시간) 속의 공간을 만났고 그 안의 그림들, 그와 마주한 관객을 만났다. 그 카메라가 6개월간 바라본 시간을 되돌려 빛의 움직임 속 그림들을 보여줌으로 관객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지구 어딘가 유인원들에게 나타난 모노리스가 생각난 이유다. 만지면 깨달음을 얻고 바라보면 다른 것들이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영화의 처음, 전시공간을 비추는 화면 속 시계는 거꾸로 간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전시공간을 비추는 화면 속 시계는 다시 빨리 감긴다. 언제 끝날지 모르던 코로나 시대의 기억도 이제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개인 간 단절과 왁자지껄했던 성미산 골목길의 정막을 상기시키며 두 감독은 그 당시의 아쉬움과 헛헛함, 각자 삶의 방식을 반추하고 싶었다고 했다. 과거의 시간에도 빛은 여전히 빛나고 공간을 비추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지금의 이 공간에서도 빛은 살아 있고 시간은 흐른다. 무인전시회에 관객은 왔다가 다시 사라지지만 여전히 그 공간에 빛의 비춤과 카메라의 관찰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과 카메라, 물질에 대한 우연성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두 감독부부는 얘기했다. 제작자와 대화를 통해 작품을 다시 바라보니 영화감상이 훨씬 더 가슴에 와닿았다. 이 리뷰는 그 영화감상에 대해 글로 남겨 깨달음을 전달하려는 나의 모노리스이다.
박세진 화가의 그림 앞에 박홍열, 황다은 감독부부는 다양한 카메라를 설치했다. 약 6개월간 빛의 기록을 영화에 담았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그림을 비추는 빛, 그 빛으로 다시 보이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이야기나 인물이 있는 영화가 아니다.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전개와 입체적인 인물들을 기대했다간 15분 뒤 잠에 빠져 들거나 극장밖으로 뛰쳐나갈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는 이미지와 공간과 물질을 다룬다. 빛이 어떻게 그림을 비추는지, 그림이 빛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 보여주는 영화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중간중간의 엠비언트 음악들의 시도가 그림 속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들이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밝음과 어두움만이 보일뿐이다. 박홍열 감독은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봐야 한다'라고 얘기했다. 단순하게 보면 그림감상하는 영화인데, 이를 꼭 비싼 돈 주고 극장에서 보라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어두운 극장에서, 크고 높은 해상도를 가진 화면으로, 여유로운 자세를 갖고 봐야 한다. 그렇게 보다 보면, 대체 영화 속 저 그림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영화 속 그림의 작가는 박세진 화가이다) 어두움만으로 가득 찬 그림이 빛을 만나면, 보이는 것의 허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바라본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천재화가와 영특한 카메라감독, 그리고 절제된 이미지를 제작해낸 드라마작가의 협업물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부디 이 영화가 극장에 다시 걸려 그림을 감상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 그 자체로 인정받는 것도 당연한 바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