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부터? 레알?
멋진 버스를 타고 처음 간 곳은 현지의 시간에 따라 밥집이었다. 점심이 준비되어 있는 한식집의 이름은 '고향맛'이었고, 메뉴는 제육볶음과 잡채, 미역 무침과 로메인(상추 대용), 된장찌개(국물이 좀 많아서 처음에 국인 줄)였다. 자유여행과는 달리 함께 식사할 때 안 먹어 두면 망한다~ 라는 다짐을 할 것도 없이 사람 잡는 장시간 비행에도 식욕은 줄지 않았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다. 잡채가 좀 짠 것 외에는 그럭저럭 맛도 있었고. 나보다 앞서서 가까운 회사 동료와 오빠가 유럽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기 때문에 '다른 일행과 밥을 먹는 일'에 대해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28명의 일행은 함께 온 가족들을 중심으로 '조'로 짜서 인원 체크를 했는데, 언니와 나는 다른 연합 없이 단독조인 마지막 7조가 되었다. 이 말 뜻은 앞으로 우리 식탁에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함께하게 되었다는 뜻. 첫 식탁 동료는 자매 셋이서 여행을 온 일행 중 위의 두 언니(대략 60대 이상)셨다.
밥을 먹고 난 후 곧바로 다시 버스를 타고 마드리드 왕궁으로 이동했다. 건물이 크기로는 유럽 최고라는 이 왕궁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 중 애국가를 들으며 매우 감격하자, 애국가를 반복해서 연주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이곳의 내부 장식에 동양적인 요소가 있는데 금실과 은실로 짠 벽지라고 한다.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진 못하고 쓱 쳐다보고 왔다. 왜냐면 패키지 여행이니까! 쇼핑센터에 가드려야 하니까!
근처의 마요르 광장으로 이동해서 그곳에 있는 상점에 들렀고, 유럽의 광장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은 후에 해방되어서 찾아간 곳은 산 미구엘 시장인데, 옛날에는 제대로 '시장'의 역할을 했으나 이곳이 명동 같은 도심이 된 후에는 그럴 수가 없어 관광객들이 소량의 물건을 사는 작은 상점으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설명을 듣고는 그냥 시시하겠다... 했는데 웬걸? 작기는 해도 파는 물건은 꽤 다양하고 활기가 넘쳐서 정말 즐거웠다. 자유시간은 고작 20분이었지만 그 사이에 번갯불에 콩을 구울 기세로 따파스(스페인 특유의 애피타이저 겸 술안주인데, 술잔 위에 뚜껑처럼 덮어서 즐기던 간단한 요리, 저렴하고 맛있고 개성이 넘치는 핑거푸드가 대부분)를 사 먹고 츄러스를 사 먹었다. 사람이 미어 터지는 곳이어서 쉽지는 않았다. 셀프 쓰담쓰담하고 싶은 행동력이었다고.
시간을 어기지 않았는데 멤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대로 쏠 광장으로 이동해서 스페인에서 보기 힘든 '인간 바글바글'하는 장면을 보고 축구장 옵션 관광을 신청했는데, 신청자도 적고 구장(외부 구경이다...) 사정도 별로라고 취소되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똘레도로 바로 출발했다. 똘레도는 마드리드를 수도로 정하기 전에 스페인의 수도였던 고도라고 한다. 고지대에 요새처럼 지어진 곳이어서 스페인의 잘남을 펼쳐 보이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옮겼다고. 옛 수도답게 도시 전체가 고풍스러운 맛이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경주'란 말을 했는데 좀 그런 느낌. 이슬람 사람들의 흔적이 가득한 이 도시의 하이라이트 대성당을 보기 전에 먼저 엘 그레코의 명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보러 갔다. 돈이 많고 성당에 기부를 많이 하신 양반이라 사후에 꽤 큰 복을 누렸다. 사진 촬영이 금지라서 눈으로만 담고 왔는데, 정말 아름답고 박력 넘치는 그림이었다. 시선을 조금 올려야 볼 수 있는 그림의 형태를 왜곡 없이그대로 보이게 하기 위한 화가들의 테크닉이 있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엘 그레코는 꽤나 자신만만한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별명이 본명보다 많이 알려져 있고 똘레도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다고. 인체 비례를 조금 변형하여 팔을 길고 말단을 강조하는 식으로 그렸는데 꽤 현대 일러스트 취향하고 맞는 느낌이다.
똘레도의 특산품인 칼 제품과 도자기 인형, 마사빵(수녀들이 성당 재원을 위해 만들어 팔던 간식류) 이런 것들은 구경할 여유 없이 곧바로 똘레도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 성당은 내가 스페인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본 성당이었고 당연히 엄청나게 압도되었다. 웅장한 장미창의 스테인드 글래스, 이슬람 양식에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뒤섞인장엄한 실내 장식은 어디를 봐도 그야말로 예술품이었다. 시간 관계상 관람이 꽤 짧았는데, 마음 같아서는 오래오래 그 안에서 개기고 싶었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이런 말은 진부하고 호들갑스러워서 창피하지만 정말로 마음이 설레도록 아름다웠다.
꿈을 꾸는 것처럼 급하게 나와서 예약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첫 스페인 현지 음식이라 좀 긴장했는데, 싸구려 상그리아에 하몽, 빵, 계란과 버섯을 볶은 스크램블에그 비슷한 요리와 얇은 돼지고기를 튀긴 커틀렛이 나왔다. 나는 매우 입이 검소한 사람이라 불만 없이 잘 먹었다. 점심 때와 똑같이 할머님들과 앉았는데 이분들 여행 많이 다니신 듯 음식 힘들어하고 불평하지 않으시고 잘 드셨다. 체력도 좋으시고. 처음으로 스페인의 식사를 하며 느낀 점은 안 짜다! 놀랍게도! 독일과 미국에서 느꼈던 나트륨의 폭격이 스페인 음식에는 없다. 하몽도 분명히 짠 음식이긴 하지만 미치게 짜지는 않아서, 독일의 소시지처럼 다른 맛은 하나도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재료 중심의 느낌? 감자튀김에도 케첩을 뿌려주지 않아서 좋았다.
똘레도에서 또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마드리드 근교에 예약된 4성 호텔에 묵었다. 인솔자는 또 '이 호텔은 일정 중 가장 좋은 호텔이니 앞으로 너무 기대하지 마시라'라고 설명한다. 지금까지 당한 게 많으신가 보다. 괜찮긴 했지만 욕조가 없잖아요 ㅠ 진짜 담그고 싶은 날이었는데.
30시간 넘게 떠돌다가 침대에 들어갔는데 잠은 푹 자지 못했다.
과연 명불허전 패키지의 강도! 하지만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