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정말로 패키지를 경험할 시간이지?
시차를 어쩌지 못하고 새벽에 깼다가 맞이한 아침, 맛있는 조식 뷔페를 즐겼다. 원래 유럽식(콘티넨탈) 아침은 따뜻하지 않은, 그냥 간단한 커피와 과자류를 먹고 끝내는 아침인데 관광객들이 원해서 어메리칸(따뜻한 달걀 요리 같은 게 있는)으로 배려하게 됐다고 한다. 인솔자는 '계란이 나오면 4성입니다' 하며 웃었다. 그 얘기인즉 앞으로는 계란 못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챱챱.
전날 버스가 구려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러 나가는 마음이 조금 조마조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날 일정의 대부분은 버스에서 보내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세비야까지, 휴게시간(유럽의 버스 기사들은 2시간마다 15분~30분 휴식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15분 휴식은 첫 휴식에만 해당되고 30분 이상 쉬는 것-완전히 시동을 끈 것이 전산 기록으로 남는다-이 원칙인데 적발될 경우 벌금이 어마어마하다고. 전체 운행시간도 최대 12시간으로 엄격하게 제한한다고)을 포함해 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를 뛰는 날이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보다 5배 넓고 인구는 비슷한 나라여서 전체적으로 굉장히 여유롭고 한갓지다. 중국이나 미국의 관광지하고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실제 스페인에 사는 인구보다 많은 사람들이 1년 동안 스페인을 방문한다고 하니, 실로 관광대국이다. 어쨌든 얘기가 샜는데 다행히 버스가 어제 만났던 그 버스와 동일한 등급의 버스였다. 그만큼 새차 티가 나진 않았지만 충분히 좋고 아름다운! 럭키!
아침 첫 스케줄은 쁘라도 미술관이었다. 스페인은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한 나리이고 이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미술품들이 회화 중심으로 소장된 곳인데,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미술관에서 그림 구경하는 일은 세상에서 젤 재밌는 일인데... 자유여행으로 갔다면 여기서 개관 투 폐관까지 놀아야 하는데... 패키지 여행객이 여기서 보낸 시간은 얼마일까요? 정답 1시간입니다..... ㅠ 개장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땡 하자마자 줄을 서서 들어가서 가이드가 설명하고 속보로 이동하고 다시 설명하고 속보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봤다. 정신 하나도 없었음. 특히 이 미술관의 대표 화가로 꼽을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작품들... 더 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 중 '시녀들'은 재미있게 본 박완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로 인상에 남은 그림인데, 실제로 보게 되어 감격스러웠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반 데르 웨이던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고야의 못 벗은 마하, 소로야의 해변의 아이들 등의 명작을 정말 번갯불에 콩 궈 먹듯이 해치웠다.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구나... 그리고 어제 돌아다녔던 중심가에 있는 또 다른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고(이번 점수는요...)
세비야로 가는 먼 길을 출발했다. 오페라의 제목이나 배경으로 유명한 세비야는 원래 무역의 요충지로, 시가의 고향이자 부유하게 번성했던 도시라고 한다. 예정된 옵션 투어에 대한 요금을 차에서 걷고 하염없이 쉬는 시간을 준수하며 달려갔다. 첫 휴게장소에서 사천원 돈을 주고 하몽맛 프링글스 득템
중간에 휴게소에서 스페인에서 인기 있다는 맥주를 발견하고 밤에 따려고 샀는데 점원이 계산 즉시 병따개로 호쾌하게 따줘서 깜놀하는 해프닝도 벌어짐. 점원은 다시 호쾌하게 이건 제가 먹죠 뭐 하며 새 병을 줬다. 세르베사!
'인생을 바꿀 것'이라고 가이드가 호언장담했던 플라멩코는 실제 인생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아름답고 박력 있는 춤이긴 했다. 하지만 패키지 관광객 몇백 명을 수용하는 그 극장의 꼬라지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는 내게도 좀 힘들었다. 특히 늦게 입장한 다른 한국인 관광팀이 앞줄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쌩난리소란을 피울 때에는 패키지 여행 동안 애써 갈무리하려 했던 까칠한 내가 튀어나올 뻔했다니까.
아름다운 댄서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발을 구를 때, 나는 일본만화 스위트 딜리버리의 여주인공의 엄마가 플라멩코 강사였다는 설정을 떠올렸다. 정말 직업병이야. 어쨌든 허름하다고 겁을 주었던 호텔도 나쁘지 않았다. 침실이 분리되어 있어서 새벽에 결국 잠 못 들고 방황할 때에도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