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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Jul 12. 2016

5불짜리 불화

처음부터 안 맞는 우리가 감히

아마 이 날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날일 것 같다.

민박집에서 아침을 챙겨 먹고 나서 느긋하게 명성의 거리에 갔다. 전날과는 달리 시간에 맞춰서 뭘 해야 하는 게 없다 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발렛주차장에 하루 요금 12불로 차를 저렴하게(!) 주차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는 이 날이 별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마담투소를 보고 싶다는 아들의 요청을 기각해야 했다. (스타의 밀랍인형을 본다는 콘셉트는 나름 흥미롭지만 입장료가 좀 양심리스) 그리고는 하염없이... 아들이 원하는 스타의 이름을 찾아 땅바닥을 보며 걸었다. 아들은 요새 홀릭하고 있는 어벤저스의 캡틴과 아이언맨의 이름을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좀처럼 나오질 않고... 내 눈에는 개 찾는 전단지만 더 잘 보이고... 더운 날씨에 계속해서 바닥의 이름을 쳐다보고 걷는 게 점점 바보같이 느껴지고 지루했다. 차양 위에 올려놓은 마네킨을 보고 놀란 다음 반가울 정도로.



결국 아들은 차이니즈 극장 앞에 있는 손바닥 자국에서 로다주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로맨틱하고 성공적인 한국남자의 손바닥도 구석에 박혀 있더라. 아들이 또 좋아라 하는 해리 포터라든지, 스타워즈 출연진이라든지, 마이클 잭슨의 유족이 남긴 듯한 장갑 자국도 재미있게 구경했는데 한창 더운 정오 무렵 사건이 터졌다. 남편이 흑인에게서 랩 CD 강매를 당한 것이다. 여행 시작 전에 자기 음악을 홍보하며 CD를 안기는 흑인 남자는 절대 빈손으로 물러나지 않으니(많은 경험담을 들었음) 처음부터 완벽 차단해야 한다는 대화를 분명히 나눴는데, 이 남자는 어떤 자신감으로 자기가 1불 정도만 주고 랩 CD 거래에 성공할 수 있다는, 무명 랩퍼와의 재미진 대화로 추억을 남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한 걸까? 결국 그 자리에서 5불을 뜯기는 꼴을 보고 나는 분통이 터졌다. 사실 5불이면 많은 경험담 중에서는 선방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액수지만, 일단 나는 남편이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재미를 노린 것인가?? 랩 음악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더운 날씨에 뻘짓을 하고 돈을 길바닥에 던져버리는 남편을 보니 자연스럽게 내 표정은 썩어들어갔고(애초부터 그렇게 좋지 않았을 거다) 남편은 내 썩은 표정을 보고 미안한 마음보다는 분노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거리에 있는 H&H몰 안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고, 그곳의 셀프 라멘 식당에서 남편은 드디어 폭발했다. 고작 5불 때문에 남편에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정말 억울하고 견딜 수가 없다고. 진심으로 열받은 남편을 보고 아들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고 점심은 완전히 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진짜 맛까지 없었다...) 나는 내 반응이 지나쳤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일단은 사태를 진정시켰다. (사실은 아들이 너무 놀라고 속상해해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서둘러서 화해했다) 결국 이렇게 이 날의 분위기를 조져버린 5불 CD 사건은 종료되었고, 수많은 강매 피해자들이 그랬듯이 남편은 기분을 잡쳐 그 CD를 버렸다.

헐리우드는 야릇한 뒷맛만 남기고 이렇게 끝났고, 우리는 기념품으로 파는 오스카 모형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곳을 떠나 산타모니카로 향했다. 생각보다 상당히 떨어진 해수욕장은 먼 데다가 길까지 막혀서 도착했을 때에는 한낮의 더위가 제일로 뜨거웠다. 역시 단일요금으로 주차를 하고 나서 미국적 큰 스케일을 자랑하는 끝없는 모래밭에 자리를 잡고 나자 아들은 수영복이 없는 건 고민도 하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나는 태평양을 바라보며 이 바다를 건너면 내 집이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멍을 때렸다. 막상 바닷가에 오자 바람이 선선한 것이 물에 꼭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들은 바닷물에 들어가서 현지 애들하고 즉석만남을 해가며 신나게 2시간 넘게 놀았다. 그 사이 우리 부부는 모래밭에서 졸다 깨다 하며 아들을 눈으로 감시했다. 그래도 야외화장실이 (멀기는 해도) 제대로 갖춰져 있는 점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 무릎 아래 다리는 보기 좋게 타서 껍질 벗겨지기 시작. 화상 안 입은 게 어디냐.

돌아오는 길도 막혔다. 엉금엉금 가는 차 사이로 오토바이가 미친 듯이 달려서 통과하는 바람에 식겁한 순간이 많았다. (오토바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1차로와 2차로 사이로 곡예를 부리며 달렸음) 모래 투성이의 몸으로 민박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열심히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이번엔 배달 말고 한인타운 중심지로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1번가에서 6번가까지 딱 적당한 도보 여행을 한 끝에 전부터 먹고 싶었던 순대를 파는 ‘명품순대’라는 가게를 발견하고 기쁘게 달려들어가 순댓국에다가 단독 순대까지 호기롭게 주문했지만... 사장님 부추무침과 갓김치까지 잘 준비해두셨지만... 주인공이신 순대가 맛이 없어... 국물님과 부추님과 새우젓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순댓국 완식도 힘들었을 것 같다. 추가로 시킨 순대는 반 정도 남겨 포장했다. 이리하여 LA에서 먹은 한식 저녁은 나를 세 번 연속 실망시켰고, 삼세번에 의미를 두는 나는 감히 ‘엘에이는 음식이 구림’이라는 인식을 품게 되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언제나 그렇듯 주차료와 식비는 참 비쌌던 이 날의 일정은 이렇게 시시하게 막을 내렸다. 진정으로 지쳐 있던 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거리에 뒤섞여 보이는 한글도 다 낡아서 지쳐 보이는, 전체적으로 우리가 묵고 있는 민박집 같은 분위기를 이 한인타운 거리가 지겨웠다. 개인 주택의 마당에 있는 잔디마저 켄터키와는 딴판으로 시들시들하고 맨땅이 드러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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