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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Jul 14. 2016

기대를 버려 편해질 거야

LA 3일째

미국 서부의 사막 기후는 덥더라도 끈적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건조한 기후 탓에 여행 중 자외선 차단을 살짝 등한시했던(그리고 자주 씻게 되니까 아무래도...) 손이 뒤집어졌다. 얼룩덜룩한 데다가 가렵기까지... 여자의 나이가 손에서 느껴진다는 말을 그렇게 믿지 않았는데, 손 나이가 열 살은 더 들어 보이자 사실인가 싶었다. 내가 그냥 확 노인 된 느낌이 들더라고.


아침에는 그래미 박물관에 가기로 했었다. 셋 중에서 팝송에 대한 소양이 깊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들이 짠 일정이니까 그냥 소처럼 따라 나섰다. 근처에 있는 발렛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히스페닉 직원들이 차를 주차하고 빼주는 곳) 영업 시간 직전이라 아직 열지 않은 박물관 근처에서 어슬렁거렸다. 마이크로소프트니 ESPN이니 하는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어서(나는 전혀 신경 써서 보지 않았는데 농구경기장도 있는 듯) 꽤나 현대적인 분위기의 동네였다. 그래미 박물관은 4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에서 내린 다음 보면서 슬슬 내려오는 형식이었다. 겉에서 보면 그냥 고층 사무용 건물에 들어 있어서 글쎄 싶은데, 안에 들어가니까 꽤나 전시가 알차서 재밌게 봤다. 각 장르에 대한 해설과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시청각 설비를 잘 해놨다. 사진 촬영 금지라서 사진을 못 찍었지만 마이클 잭슨이 드릴러 뮤비 촬영 때 입었던 빨간 재킷도 구경할 수 있었다. 스타들이 기증한 옷가지나 소지품을 전시한 것을 보면서 새삼 나는 팝에 대해 그다지 박식하지 않음을 느끼고... (모르는 사람 천지) 또 하나, 테일러 스위프트는 참 기증을 많이 했다. 의상이나 습작했던 노트 쪼가리 같은 것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공간과 믹싱을 해보는 공간도 세팅되어 있어서 재밌게 즐겼다. 악기는 모두 전자식이고 헤드폰으로만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지만, 합주는 할 수 없었다. (물론 가능했다 해도 우리 셋은 밴드를 못합니다...) 마지막 전시 공간인 2층에서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특별전이 펼쳐져 있었는데, 나는 잘 몰랐던 뮤지션이지만 무엇보다 감동적인 게 이 할아버지가 현역이라는 점! 예술가가 자기 분야에서 계속해서 머문다는 게 정말 힘든데, 현역에서 무려 50년 채워가는 이분에게 급호감을 느꼈다. (게다가 롹커라고...)


점심은 스매시버거로 먹었다. 싹싹한 종업원 덕에 굉장히 즐거운 식사가 가능했다. 맛도 좋아서 개인적으로는 인앤아웃보다 낫던데. 근처 산책을 더 하고 나서는 갑작스럽게 오후 일정으로 다시 해변에 가기로 했다. 전날 산타모니카가 어지간히도 즐거웠는지, 아들이 롱비치로 가자고. 하지만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라 일단은 민박집에 가서 슬리퍼와 수건, 여벌옷 같은 것을 챙겨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 날은 워낙 햇빛이 따가워서 나도 바닷물에 들어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롱비치가 멀어서, 도착했을 때엔 오후 5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산타모니카와는 비교 안 되게 싼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바닷가에 자리를 잠았다. 아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물로 뛰어들었다. 중년 아줌마는 원래 함께 물에 뛰어들 예정이었지만 막상 바닷가에 오니 (또!) 바람이 많이 불고 그렇게 덥질 않아....


결국 또 물놀이하는 아들을 감시하면서 바닷가에서 시간을 대충 보냈다. 물은 산타모니카보다 쓰레기가 좀 더 많았다. 바다에 들어가 있는 인간들의 나이대는 거의 10대. 전날 햇빛에 처참하게 당한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모래를 덮었다. 아들의 물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대충 털고 다시 차에 올랐다.


LA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센치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선택은 5번가에 있는 가주마켓(캘리포니아 마켓) 안의 푸드코트. 가서 남편이 좋아하는 분식코너에서 잔치국수와 김밥과 만두를 시켰다. 영업이 끝날 무렵이라 좀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사장님이 우리 김밥 주문을 제대로 주방에 전달하지 않아서 국수를 다 먹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늦게 나온 김밥을 다른 손님이 자기 건 줄 알고 가져가버리는 사태까지 발생.... 참 간단한 주문을 다 받아서 먹을 때까지 한참이 걸렸지만


맛있었습니다!!! ㅠ_ㅠ

주르륵... 감동의 눈물!! 이 분식집의 다시다 듬뿍 들어간 메뉴는 실패하지 않았다!!

국수 한 가닥, 유부를 비롯한 건데기 한 점, 밥풀 한 가닥 남기지 않고 싹싹 먹고 나왔다. 너무 흥분해서 사진도 없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단독 음식점이 아닌 푸드코트에서 먹은 게 젤로 맛있었다니...

이제는 LA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기뻤다. 샌 프란시스코 떠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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