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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량진법잘알 Jun 24. 2022

정의

깨끗한 계약서 작성을 위한 방법론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계약서 작성 과정에서 가장 고민되는 작업 중 하나다. 잘 정의된 용어는 계약의 논리적인 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좋은 토대가 된다. 계약서에서의 용어는 양 당사자가 정하고자 하는 모든 권리와 의무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용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그리고 그 정의가 의미하는 개념의 범위가 어떻게 정하여질 것인지는지는 계약 당사자 간의 주요한 협상 쟁점이다.


그렇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계약서에서의 바람직한 용어 정의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계약서에서의 용어 정의 시 참고할만한 모범적인 법문서로는 법령이 있고, 법제처에서 발간한 법령 입안·심사 기준에는 법령의 정의 조항 작성 방법에 대하여 자세한 지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중 많은 부분은 계약서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일부는 수정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계약서의 고유한 특징을 고려하여 바람직한 정의란 어떠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본다.






법령에서의 정의 참조하기


계약 당사자들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계약서 그 자체를 올바르게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계약서가 담고 있는 계약의 내용을 상호 성실하게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계약서는 근본적으로 계약의 성실한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범위 내에서만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용어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임에도,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용어를 정의할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경우에는 법령의 정의를 참조하는 전략이 유용할 수 있다. 모든 법령은 법에서 정한 일정한 심의 절차를 준수하여 제·개정 되므로, 법령에서의 용어의 정의는 일정 수준 이상의 평균적인 품질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다.


참고하고자 하는 용어가 특별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용어이라면, 동일한 의미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도 계약서에서 별도로 정의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와 달리, 참고하고자 하는 용어가 헌법, 민법, 형법, 상법과 같은 기본법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수많은 문헌과 판례를 통해 구체화된 용어이라면 별도의 정의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유의할 점은, 기본법에서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용어이라 하더라도 다른 의미로 이해될 가능성이 있는 용어이라면 계약서에서 명시적으로 정의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상법에서 사용하는 "특수관계인"의 용어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라 한다)에서의 용어와 다르게 정의된다. 그런데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이라 한다)은 기본법인 상법이 아니라 공정거래법에서 정한 "특수관계인"의 정의를 참조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사지배구조법'이라 한다), 금융지주회사법 등 금융 관련 법령이나 국세기본법, 상속세 및 증여세법, 소득세법, 법인세법 등 조세 관련 법령에서 각각 "특수관계인"의 범위를 개별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기본법의 정의가 특별법의 정의보다 반드시 우월하다고 보기 어렵고 같은 용어이라도 여러 법에서 다르게 정의될 수 있기에, 기본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용어라도 다양한 법령에서의 용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다른 예로는 "주요주주"가 있는데, 상법의 정의는 공정거래법에서 거의 동일하게 차용하였고, 금융사지배구조법은 조금 더 상세하지만 유사하게 차용하였다. 이 용어는 법마다 조금씩 다르더라도 대개 기본법의 정의와 대동소이하게 정의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용어는 투자계약 실무에서는 다른 의미로 정의되곤 하는데, 창업자와 같이 의미 있는 지분을 보유한 주주를 명시적으로 특정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곤 한다. 기본법의 정의가 법령 중에서는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계약실무 등에서 사용하는 관습적인 정의와 차이가 있다면, 어떤 의미인지 명시적으로 밝혀 정의하는 것이 좋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령의 정의를 참조하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있는 용어는 아닐지 항상 의심하여야 한다. 용어 정의에 관하여는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기에, 애매하거나 모호한 용어는 가급적 정의하며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조한 법령의 개정을 고려하기


계약서의 용어의 정의가 법령을 직접 참조하도록 하는 경우에도 고려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법령은 수시로 개정되는데, 법령의 개정에 따라 참조하는 내용이 변경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현 시점에서의 참조한 법령의 내용 그 자체를 유지할 것인지를 정하여야 한다.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당사자의 목적과 의도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계약서에서 법인세법 시행규칙 제43조 제2항의 “기획재정부령으로 정하는 당좌대출이자율”을 직접 참조하였다면 시행규칙에서 정한 이자율이 변동됨에 따라 계약에서 정한 숫자가 연동되어 변경되기를 원할 가능성이 있다. 대출계약에서의 이자율이 COFIX, CD 금리 등에 연동되어 계약기간 중에도 수시로 변경되는 것과 유사한 구조일 것이다. 이와 달리, 계약서에서 금융회사지배구조법 제2조 제6호의 "대주주", "최대주주", "주요주주"의 용어를 직접 참조하여 각 당사자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였다면,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는 금융회사지배구조법 제2조 제6호가 개정되더라도 계약체결일에 해당 용어들이 가리키고 있었던 그 집합을 의미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계약서에서 법령과의 연동을 원치 않는 경우에는 법령의 정의 조항의 문언을 그대로 복사하여 기재하면 된다. 연동을 원하는 경우에는 해당 법령을 직접 참조하도록 하되 해당 법령이 개정되면 그에 따른다는 취지의 내용을 추가 기재하면 된다. 두 가지 경우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하여는, 계약서에 어느 것을 의도한 것인지 명시적으로 기재하는 것이 좋다.





순환정의를 피하기


용어를 정의할 때 중요한 것은 순환정의를 피하는 것이다. 순환정의란, 정의하고자 하는 용어로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명백한 지침일 수 있으나, 일상언어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따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대국어사전에서도 단어 간 돌림풀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연장'은 "어떠한 일을 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로, '도구'는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되며 두 단어 간 순환적 정의가 이루어진다. 국립국어원은, 풀이가 순환적으로 되어 있는 경우 발견하는 대로 내용을 검토 및 수정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순환풀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많은 단어의 풀이가 순환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알려져 있다. 또한, MIT를 필두로 한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위트 있는 재귀적 약자(recursive acronym)를 사용하는 것을 해커다운 전통으로 여겨왔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GNU(GNU's Not Unix), PHP(PHP: Hypertext Preprocessor) 등이 있다.


일상에서 순환정의가 사용자에게 중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상황은 흔치 않다. 그리고 일상언어에서는 정의가 순환적이라 하더라도 직관과 상식을 통해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인 계약서를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그 용어가 의미하는 범위를 명확하게 확정할 수 없게 되어 법률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당사자의 의사가 명확하다면 유연한 해석을 통하여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간단하게 점검할 수 있는 부분이므로 문제 없도록 바로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정의 용어 검토하기


모든 순환정의를 제거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정의되지 않는 원자적인 용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수학과 같은 엄밀한 논리체계에서도 정의되지 않는 용어는 필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리화 한 힐베르트 공리계(Hilbert's axioms)에서는 점(point), 선(line), 면(plane) 등을 정의 없이 사용하는 무정의 용어(primitive notion)로 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공리체계를 구성하였다.


수학에서도 정의되지 않는 용어가 존재한다는 점은 계약서에서의 용어의 정의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계약서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의 용어들은 정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용어를 정의하여 사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헌법재판소도 법령에서 모든 용어를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처벌법규 중 정의되지 않은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시한 바 있다.


■ 헌법재판소 2006. 7. 27. 선고 2005헌바19 전원재판부 결정
 이 사건 법률조항에 규정된 ‘궁박’ 또는 ‘현저하게 부당한 이익’의 의미가 무엇인지, 과연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부당이득죄에 해당된다고 볼 것인지는 문언상 의미만으로는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다. 그러나 ‘궁박’이나 ‘현저하게 부당한 이익’이라는 용어도 형법상의 ‘지려천박(知慮淺薄)’, ‘기망’, ‘임무에 위배’ 등과 같이 범죄구성요건을 형성하는 용어 중 구체적 사안에 있어서 일정한 해석을 통하여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규범적 용어의 하나로서 특히 경제활동이 다양해지고 또 수시로 변화하는 오늘날에 있어서 ‘궁박’이나 ‘현저하게 부당한 이익’의 유형이나 기준을 입법자가 일일이 세분하여 구체적으로 한정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통상적인 해석방법에 의하여 그것이 해소될 수 있다면 헌법이 요구하는 처벌법규의 명확성에 배치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 헌법재판소 2019. 12. 27. 선고 2018헌바46 전원재판부 결정
 모든 법규범 문언을 순수하게 기술적 용어만으로 구성하는 것은 입법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소 광범위하여 어느 정도 법관의 보충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통상의 해석방법에 의하여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사람이 당해 처벌법규의 보호법익과 금지된 행위 및 처벌 종류와 정도를 알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면 헌법이 요구하는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다(헌재 2017. 11. 30. 2015헌바336; 헌재 2018. 5. 31. 2016헌바250 참조).



그렇다면, 계약서 작성 시 실무상 고민하게 되는 부분은, 어느 정도의 용어를 기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안전하게 정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인지다.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본다면 아래와 같다.


첫째, 기본법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수많은 문헌과 판례를 통해 구체화된 용어인 경우이다.


둘째, 일상언어와 쓰임새가 다르지 않아 사전적 정의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명백한 경우이다.


셋째, 오로지 분쟁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되는 조항에만 용어가 사용될 경우이다.



계약서에서는 많은 용어가 정의 없이 사용되곤 한다. 위의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의가 필요한 용어라고 생각된다면 적극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이름 짓기


어떠한 개념을 정의할 때 그 피정의항의 명칭, 즉 용어는 계약서 전반에 사용하게 될 정의된 개념들 간의 관계를 고려하여 일관되게 정하여야 한다. 병렬적으로 이름을 붙여 정의하여야 할 개념들이라면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도록 명칭을 정하여야 한다. 단순히 하나의 개념을 추가로 정의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계약서의 전반적인 내용을 검토하여 이름을 붙여야 한다.





재정의 하기


법령에서 이미 널리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그 용어가 가리키는 개념의 범위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특히, 법의 근간이 되는 어떤 용어들은 절대로 다르게 정의하면 안 된다. 어떤 계약서도 "소유권"을 재정의 하려 하여서는 안 된다. 마치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미리 정의한 단어로서 변수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는 예약어(reserved word)와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프로그래밍을 할 때는 예약어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지만, 계약서 작성 시에는 그런 목록을 확인할 수 없다. 상식에 비추어 판단할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용어를 불가피하게 다시 정의하여야만 하는 경우에는 "본 계약"과 같이 피정의항에 변형을 주어 이름 붙여야 한다. 그렇게 명칭을 변경한다고 하더라도 계약서에서 해당 용어가 따옴표 없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용어의 정의는 계약서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눈에 잘 띄도록 배치하여야 한다. 중요한 정의를 복잡한 조항 속에 숨겨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호하게 정의하기


의도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용어를 모호하게 정의하는 것은 지양하여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칭하는 대상을 선명하게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기술적으로 정의가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보유한 정보만으로는 정의항이 잘못 작성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당사자에게 불리한 경우 등에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정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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