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헌'
우편물을 보내러 우체국에 다녀오는 길이다. 가랑비가 바람을 타고 우산을 쓰고 있는 내 윗도리에도 내려앉는다. 볼일이 끝난 후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여유롭다. 평소 가지 않던 길로 가보자. 일단 집에 들어가면 한 번 나오는 게 쉽지 않은 요즘이다. 높이 솟은 우리 아파트 옆으로 대청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이 지역의 오랜 된 동네가 자리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색이 칠해지고 벽화가 그려진 낮은 담장이 이어져 있다. 몇 칸 건너엔 동그랗고 작은 조명으로 장식된 건물이 빛나고 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곳이었다. ‘무계헌’이라는 곳이다. 우산 너머로 슬쩍 무얼 하는 곳일까 컨닝해본다. 지금 막 문을 여는 것인지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외관은 꽤 괜찮은 편이다. 그다지 세련되진 않지만 따뜻함이 느껴지는 레트로풍이라 마음에 든다. 마을 재생사업으로 만든 협동조합으로 커피와 참기름을 취급하는 특이한 조합의 카페이다. 일단 비에 젖은 건물을 사진으로 담아본다. ‘지금 딱 들어가서 커피 한 잔 하면 좋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카페에서 시간 보낼 준비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얼른 집에 다녀왔다.
아직 돌 위쪽까지 물이 넘치지 않아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갔다.
일단 냉장고 속 반찬통을 몇 개 꺼내고 밥을 먹는데 얼른 그 카페에 가야겠다 생각하니 배도 덜 고파 식사는 후다닥 마무리되었다. 요즘 읽고 있던 책 <겨울을 지나가다>와 간단한 그림도구, 글쓰기 숙제용 종이. 다양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삼종 세트를 챙겨 다시 그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아까 건널 때 보다 빗물이 불어 유속이 빨라진 게 눈으로 확인이 되었다. 드디어 ‘무계헌’이란 카페 앞에 당도하였다.
건물 옆에는 무계마을을 지키는 150년 된 팽나무가 덩치를 뽐내고 있었다. 커피 수혈이 급하기에 비에 젖은 팽나무 사진만 몇 장 찍은 후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내부에는 테이블이 5개 정도이고 재료와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통일감이라곤 없었다. 한 테이블에 한 분이 식사를 하고 계시고 두 분은 앞에 앉아 말동무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없는 동안 점심을 빠르게 해결하려 했단다. 혼자서 점심을 못 먹을까 걱정하신 옆집 어르신이 챙겨다 주신거라고도. ‘카페에서 밥이라니’ 잠시 의아해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 생각들어 앉을 자리를 정하고 가방에서 그림 도구를 꺼냈다. 식사가 끝난 것 같아 커피를 시켰고 맛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함께 있는 분들은 이 동네 주민들로 보였다. 내가 들어왔다고 목소리 톤을 낮추거나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가 있건 없건 상관없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에 처음엔 “뭐지 너무 투명 인간 취급이네” “분위기 뭐지? 커피만 후딱 마시고 가야겠다” 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은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귀는 열려있어 저쪽 편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려왔다. 진달래꽃이 피는 어느 산으로 꽃놀이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시골에서 어른들이 버스 빌려 놀러 가는 모습을 적잖이 보았기에 묵묵히 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하였지만 이 동네분들이 어디로 여행 가는지에 대한 관심도 꽤 커지고 있었다. 손 따로 머리 따로인 상태여서 책 읽기는 절대 불가능했을 터이다. 점점 어릴 적 시골에 살았던 느낌이 소환되었다.
카페로 마실을 오신 여자분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쭉 이 마을에 살고 계신다고 했다. 완전 이 동네 토박이였다. 근처 중학교에 다닐 때 다리가 떠내려가서 멀리 다른 길로 돌아서 다녔다. 로 시작해 내가 사는 지역의 산증인이 되어 연이은 스토리를 읊었다.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마냥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러다 어떤 어르신이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내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날이 흐리니까 아파트가 더 높아 보이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쪽이다. 안개가 자욱한 데 아파트가 높이 솟아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아 내 눈에도 그래 보였다. 단지 그 말만 했을 뿐이다. 아파트가 생겨 싫다 좋다에 대한 말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함을 표현하지 않았고 내가 그 아파트에 산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랬다. 내가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청천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봄날 남편과 산책을 했던 날이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개천 건너 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아파트가 생겨 싫었겠다”
“시야가 뻥 뚫린 채 살다가 삼십몇 층짜리 아파트가 떡 하니 들어서서 해를 가리니 욕 좀 했겠는걸, 나였으면 엄청 싫었겠다”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그렇게 다 가리진 않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을 보냈고 그림도 한 장 완성했다. 짐을 챙겨 나오며 다음에 또 오겠다 인사도 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오늘 세 번을 왔다 갔다 한 징검다리는 물에 잠겨있었다. 옛날처럼 비가 와서 징검다리가 떠내려간 건 아니었지만, 그 시절처럼 멀리까지 걸어간 뒤 다리를 지나 내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이 카페는 마을공동체에서 운영하기에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참새방앗간처럼 지나다 언제나 들르는 곳. 이윤을 크게 내야 하는 여느 카페와는 다른. 타지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마을 사람이 더 중요한 곳. 동네투어를 하다가 커피와 참기름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들어가서 추위와 더위를 피하며 잠시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이 날은 비 오는 날의 운치와 커피 맛만 좋았다. 다음번엔 그 촌스러움도 마음에 들 것 같다. 나도 어쩜 신세대보다는 구세대에 속하는 나이가 되었고 어찌 됐건 우리 동네 카페 아니겠는가. 옛 동네와 새 아파트를 언제든 넘나들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나 역시 언제든 이 동네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무계헌’에 가는 날은 어떻게 느껴질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