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에서 서른 중반 사이
있다. 확언하건대 죽음에 대한 생각은 매 번 계절처럼 변한다. 그 몇 번의 계절이 지나면 나는 죽음에 대해 성숙해간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아주 작은 촌락이었다. 나는 여섯 살 즈음 그 유명한 'IMF로 모두가 그랬더라'시절에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조부모의 집으로 떠맡겨졌다. 조부모 두 분이 모두 농사일을 가고 나면 나이 어린 동생은 유치원에 가고, 유치원에 갈 만큼 어리지도 학교에 갈 만큼 크지도 않았던 나는 집을 지켰다. 그때 할아버지가 마당에 묶어 기르던 개, 노랑이는 나의 첫 반려동물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슈퍼마켓도, 또래 친구도 하나 없는 시골에서 나는 노랑이 곁에서 얘기도 하고 햇살 아래 낮잠도 자며 깊은 유대감을 나누었다. 하지만 시골 어른들은 집집마다 개를 기르면서도 그들의 삶의 질엔 철저히 무관심했고 질병이나 사고에도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다. 여섯 살 아이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노랑이가 유명을 달리하려고 하는 순간에도 어른들은 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아이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까운 동물병원이 있었을 까 싶다.)
"지 명대로 살 것이다."
결국 나는 몇 번이고 마당에 묶이던 그 친구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그 후 나는 죽음이 가벼운 것이 진저리 나게 싫어 그것들로부터 회피했다. 눈을 가리고 듣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때의 나에게 죽음은 차가운 외면이었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관계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나와의 모든 관계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고 죽음은 갑자기 찾아와 소중한 것을 뺏아간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아기를 출산하고 한 동안 잊고 있던 그런 사념들이 커져 아이를 안은채 짧은 육교도 건너지 못할 만큼 불안증이 커지기도 했다. 나는 작은 것들이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스물 중반 즈음 먼 타지로 가 일을 하던 나는 부모님 전화도 잘 받지 않는 홀홀단신 자유로운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부재중 전화가 이상하리 만치 쌓인 날.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슬픔을 감춘 건조한 목소리 뒤 그의 오장이 다 떨리는 것이 전화 너머로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상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고속버스로 5시간이 넘는 먼 거리였다. 멍하게 정신을 놓은 채 직장에 부고를 알리고 집에 와 짐을 챙기면서도 선뜻 우리 집으로 가기가 두려워져 입은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며, 검정색 옷을 입어야 하나. 몇일을 있어야 될까. 너무 늦게 와서 질책을 받는 건 아닐까. 집에 가면 정말로 할아버지가 없는 걸까?
처음 죽음에 가까워 본 새파랗게 젊은 나는 사정없이 휘청였다. 지금의 남편이 그때, 그냥 빨리 가야 한다고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주지 않았다면 해가 지도록 출발조차 못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날은 단 사흘이었다. 사흘이 지나면 다시 일하던 곳으로 복귀해야 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퀭한 눈으로 일을 하고 계셨고 친척 어르신이 나에게 상복을 주며 손님을 맞는 일을 시켰다.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손님들의 식사, 술을 내어주느라 서빙 알바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장례식은 웃는 사람, 떠드는 사람, 술 취해 소리 지르는 사람으로 시장통이 되었다. 어린 나는, 이게 맞아? 왜 울지 않지? 할아버지는 그래서 어디 있는데?라는 생각에 소싯적 반항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까지 했다.
장례 마지막 날 아침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수의를 단정히 차려입은 할아버지를 빙 둘러싼 사람들이 언제 그랬나 싶게 서로를 위로하며 목놓아 울고 있었다. 그들은 단체로 예방주사를 맞고 오기라도 한 듯 그들 인생 중 앞선 몇 번의 경험으로 진정으로 울어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휩쓸리듯 장례를 치르자마자 다음날 직장으로 복귀했고 다시 일상을 찾아야 했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할아버지가 떠났는데 내가 밥을 먹어도 되나?' 싶었고, 재밌는 예능이 티비에 나와도 '내가 지금 저런 걸 보고 웃어도 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슬퍼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슬픈 일을 겪었으니까 나는 온전히 슬퍼야 해라는 강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감정을 마주 보려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좋은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를 진심으로 추모하는 일, 가족들과 생전 할아버지에 대해서 얘기 나누는 것, 그가 보낸 생애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한참 후에 몇년에 걸쳐서야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 시절 내가 겪은 죽음은 이상한 나라에 온듯한 혼란함이었다.
내가 서른 중반이 되자 낯선 경험으로 당황하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나의 반려묘 쪼깐이를 보내며 나는 온전히 내가 주체가 된 죽음을 겪으며 모든 결정 사이에 충분히 나를 위로하고 편안히 슬퍼할 수 있었고 두려움도 불안함도 없이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웰다잉'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의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나와 인연을 가졌던 모든 관계에서의 내가 죽는 것이지 그 시점에 나는 이미 무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결국 죽음을 겪는 것은 죽은 본인이 아니라 주변인이라는 것.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이 있다면 누구누구의 부인이었다는 자아도 함께 죽고 다시 새로운 자아가 정립된다는 어떤 학자의 이론도 있다.
반려묘 쪼깐이를 보내고 나는 그 아이와 함께한 나의 예쁘게 젊었던 시절 또한 장례를 치러 보낸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챕터를 넘긴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