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다. 일기라도 써야겠다.
글쓰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넘사벽 같고, 프로필에 나오는 작가들 얼굴이 태양 마냥 빛이 나고, 그들이 한글을 가지고 놀며 만들어낸 모든 표현들이 딴 세상 스킬 같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하찮은 나의 긁적임이 메인 메뉴 만들며 가차 없이 버려진 자투리 무 꽁지나, 흙 묻은 파뿌리, 시든 시금치 이파리 끄트머리쯤으로 보여 깜빡이는 커서와 눈싸움만 벌린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어김없이 이른 출근을 하자마자 띄워놓은 브런치 화면 속 커서를 뚫어져라 째려보다 이러다 커서와 상극이 되어버리겠다는 생각이 오늘아침 문뜩 든다. 그래서 일기라도 써보자는 요량으로 커서와의 신경전은 뒤로하며 그 녀석을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뭐라도 긁적이며 밀어내본다.
마침, 아침마다 만나는 친구 드립커피가 다 내려졌다. 드리퍼를 들어 올려 텀블러에 내려진 커피를 들여다본다. 참 신기하다. 밥숟가락으로 푹 뜬 두 스푼의 커피원두, 85도로 맞춰진 포트, 같은 텀블러컵, 똑같은 종이 여과지인데도 그날그날 내려진 커피의 진하기와 향기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날은 시커멓게 내려져 컵아래 돔처럼 살짝 솥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때엔 훤히 들여다 보일 만큼 연하기도 하다. 향도 어떤 날은 진하기만 한 커피 향이 훅 올라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오렌지향이 슬쩍 섞인 듯 상큼한 향이 코끝 후각을 슬쩍 간지럽히기도 하고...
오늘은 중간정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정도다. 향도, 맛도, 색도 모두 중간.
중간은 안정적이고, 편파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아니라 모두 충족되는 넉넉하고 후덕한 편안한 느낌. 물론, 그날 내려진 커피가 어떤 상태이든 나는 그 녀석을 그저 맛있게 즐기겠지만.
이럴 때 나는 느낀다. 분명 느낀다. 나는 예민하지 않다. 하나도. 조금도. 예민하지 않고, 아주 보편적이다.
그러나, 나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아주아주 예민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심지어 우리 엄마까지.
너는 너무 까칠해. 쏘가지(성질)가 더러워서 살이 안 쪄.
뭣이 예민해 내가? 뭐가 더러워 성질이.
물론 뭐. 신랑이 내가 차려놓은 음식보고 나 이거 안 먹어하면 그 접시를 바로 집어 들어 싱크대에 쏟아붓기도 하고, 뭔가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옆에서 부스럭 거리기만 해도 바로 조용히 좀 해! 를 레이저 눈빛과 함께 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예민하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3살된 자동차를 최근에 업어와 애지중지 세차하고 광택낸 녀석 문콕으로 옆차가 찍어놔도. 뭐 이러다 점점 중고차로 거듭나는거지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고. 반평균도 안되는 점수와 드라마틱한 하향곡선을 그리는 석차가 적힌 성적표를 들고와 해맑게 웃는 둘째녀석보며 그래 건강하면 뭐든지 먹고 살수 있어. 일단 운동은 열심히 하자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으니. 이정도면 부처님의 자비로움과 하나님의 은혜로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너그러움정도는 지니고 있지 않을까? 사람마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다르게 반응하는 표현의 밀도와 온도차가 있으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평범하지만 소중한 커피와 시작하는 아침이다. 2024년 11월 20일의 내 금쪽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웬만하면 웃고, 사람들 험담 2번 할거 1번만 하고, 눈과 귀는 2개이고 입은 하나인 이유를 생각하며 하루를 마음 편안하게 잘 보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