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생활 #기차여행 #교통 #인연
9유로 티켓이란?
- 한 달에 9유로만 내고 기차·지하철·버스 등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할인권
- 지난해(2022) 6~8월 석 달간 한시적 시행
-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생활비 부담 절감 목적
- 대중교통 이용 온실가스 배출 절감 목적
- 코로나 시기 위축된 경제 살리기 일환
티켓 시행 결과:
- 석 달간 5,200만 장 판매. 독일 국민의 63%가 이용( 인구 8,200만 가정)
- 대중교통 이용이 10~15% 증가(이 중 20% 근거리 대중교통 거의 이용하지 않던 경우)
- 온실가스가 180만 톤 덜 배출되고 대기질도 6% 향상
다음 대책:
- 독일은 ‘9유로 티켓’의 폭발적인 호응에 따른 가격 현실화 "49유로 티켓" 도입 결정
독일 정부는 지난해 여름 6, 7, 8월 3개월 동안 9유로로 독일 전 지역의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대중교통 티켓 정책을 시행했었다. 파격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상식 수준을 완전히 넘어서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나라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과감한 정책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독일 기차 종류는 ICE (InterCity Express), IC(InterCity), RB(Reginal Bahn), RE (Regional Express), U-BAHN(사설 업체 지하철), S-BAHN (독일 철도청 운영 지하철)으로 분류된다. 9유로 티켓을 가지고, 우리 KTX나 SRT에 해당하는 ICE와 이보다 낮은 등급인 IC를 제외하고, 다른 기차는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추가로 각 도시에서 운행하는 모든 트램과 버스 등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으니 독일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엄청난 자유로움을 제공받았다.
장거리 여행에 있어서는 시간적으로나 육체적 피로도를 고려하여 ICE나 IC를 타고 이동하고 그 지역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는 했으나, 당일치기 여행으로는 RE, RB, S-bahn 같은 기차를 이용해도 아주 행복했다. 특히, 주변의 작은 마을을 돌아보는 기회에 있어서 이 티켓의 파워가 컸다. 하이델베르크 주변의 작은 마을을 둘러보는 기회도 9유로 티켓 시행 이전이라면 가성비(?)를 고려한 관심도에 있어서 뒷순위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9유로 티켓 정책 시행 이후로는 그냥 아무 고민(계산) 없이 RE나 S-BAHN을 잡아타고 작은 마을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조그만 마을이 주는 독특하고 따뜻한 정감을 느끼며 조용히 산책하고, 작은 카페에 들러 브런치와 함께 독일인들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소박한(?) 행복을 만끽하고는 했다.
작고 아담한 마을이 주는 정감은 큰 대도시가 주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시각적 웅장함은 비록 작았으나... 정서적으로 가슴에 와닿는 그 무엇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경사진 언덕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입구에 파랗게 커나가는 작은 포도송이... 돌대문 옆 작은 분수대 그늘에 경계심 없이 졸고 있는 고양이... 마을 노인정(?)인 듯 조그만 야외 카페 그늘에 앉아 대화하는 노인들의 유쾌한 독일어 강좌(?)... 유모차 안의 귀여운 아기와의 눈 맞춤... 수줍은 아기의 웃음... 햇살의 높이가 머리 꼭대기로 높아갈 때쯤 여느 때처럼 아페롤 스프릿 한잔 즐기는 여유... 투명한 유리잔 안에 터져 올라가는 기포만큼이나 행복감도 자연스레 따라 올라간다.
이 작고 소중한 행복을 하마터면 놓칠 수도 있었다니... 기회가 주어진 것에 안도하는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순전히 파격적인 9유로 티켓정책 덕분이었다.
"여보야."
"오늘 별일 없으면... 뷔르츠부르크(Würzburg)가 이쁜데 한 번 가볼 테야?"
"자기는 아직 안 가 봤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대략.. 두 시간 정도 걸리니까..."
"여기(하이델베르크)에서도 연결만 잘 맞으면.. 늦어도 세 시간이면 충분히 가겠네..."
"그러면... 거기 알테마인다리(Alte Mainbrücke) 근처에서 점심 먹고 white wine 한잔 하고... 어떠셔?"
" 시간 되면 뷔르츠부르크 궁전 (Residenz Würzburg) 산책하고 늦은 기차 타고 오면 되겠네.. 뭐"
이른 토요일 아침, 아내의 즉흥적 제안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사전에 꿍쳐둔(?) 계획임이 틀림없다는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우리는 계획적인 여행도 좋아하지만, 즉흥적인 여행 또한 마다하지 않고 즐기는 편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의 만남..... 계획적인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행 중에 관심을 끄는 표시판이나 장소가 보이면 즉흥적으로 계획에 추가, 변경하여 예상하지 못했던 것과의 만남을 즐기고는 한다.
상쾌한 아침, 계란프라이로 메뉴로 서니 사이드 업(Sunny-side up)을 만들려다 노른자가 터져... 스크램블(Scrambled)로 즉시 계획을 변경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형태는 다르지만,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본질적인 영양가는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즉흥적인 사건이 벌어질까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 마음 한구석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 그러셔.. 기차 시간 좀 보고..."
DB Navigator를 뒤적이니 연결 편에 큰 무리는 없어 보였다. 딱히 다른 스케줄도 없었던 터였다.
"S-Bahn 타고 오스테르부루켄(Osterburken)에서 RE로 갈아타면 되네.. 연결편도 괜찮네.."
"연결시간 여유가 5분밖에 없으니 조금 거시기하네..."
독일 기차는 연결 편 간의 여유에 있어서 가끔 이용자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경우가 있는 듯했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5분이라는 시간은 승객들이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연결 편을 향해 달리는 (것은) 백 미터 달리기 올림픽 챔피언인 우사인 볼트가 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캐리어를 달고 달리는 다른 승객의 모습까지 고려하면 흡사 철인경기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 십상이었다.
간신히 연결 편을 잡아탄다고 해도, 전속력으로 달렸던 탓에 헉헉대는 호흡은 흡사 배기량을 넘어서는 가동에... 터지기 일보 직전의 자동차 엔진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지구가 돌고 있다는 간접 체험을 잠시나마 공짜로 할 수 있었다.
촉박한 5분은.... 아내가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내의 불평은 독일 기차로 향하는 대신... 언제나 옆에 있는 나에게로 향하고는 했다.
"무슨 스케줄을 이렇게 (이따위로.. 라로 쓰고 싶으나 표현이 너무 거칠다) 잡아서 생(개) 고생을 시키느냐고...."
그냥 하는 것 같은 소리와 눈초리에는... 화살촉 끝의 날카로운 금속성 번뜩임이 감지되고... 화살은 사냥감을 향해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난 잘못이 없어요...
시간을 충분히 잡아도 기차가 지연되는 경우 내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
기차가 지연되는 경우도 빈번해 약간의 도착 지연만 있어도 연결 편 기차를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1~2분 사이의 긴박한 시간으로 우사인 볼트가 되어 간신히 연결 편을 잡았을 때의 안도감과, 1~2초 차이에 해당하는 순간의 차이로 기차를 놓칠 때의 실망감과 허무함은 인생살이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한 번은... 정말로 일초(이초일지도 모른다) 차이로 베를린행 ICE 기차를 놓치는 중년 독일 여인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뛰어오느라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막 닫히려는 문에 손이 닿기 직전이었다. 문은 조금도 기다림 없이... 야속하게... 닫히고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향해 외치는 그녀의 외마디 절규...
우리는 안다... 그녀에게 닥칠 불편함 그 정도가 어떤 것인지를...
독일 기차라는 것은 바쁠 때는 연착되고... 조금 기다려 주었으면 할 때는 정시에 출발하는... 아주 못된 놈(?)이다. (여러 번 겪어 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우리의 경우 기차를 놓쳤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단지 다음 기차를 여유롭게 기다리거나 재빨리 다른 루트를 찾아서 이동하면 된다. 때에 따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것뿐이었다. 9유로 티켓의 강력한 파워는 다음 기차의 시간표만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요금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독일기차는 이용 시간과 종류에 따라 요금이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간의 노력만 기울이면 요금을 많이 줄일 수가 있기에 평소라면 이리저리 비용 절감을 위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특히 여러 명이 다닐 때는 교통비 절감이 무시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니 손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9유로 티켓 덕분에 요금을 줄이기 위한 별도의 고민 없이 ICE를 탈 것이냐만 결정하면 되니 그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돌아다니는 모든 대중교통이 다 내 것 같았다. 부자도 이런 부자가 없는 것 같이... 흐뭇하고 행복한 만족의 연속이었다.
" OK, Los geht's!"
작은 가방에 물 한 병씩과 약간의 간식을 챙겨서 출발하면 끝이다. 당일치기 계획이기 때문에 딱히 따로 더 준비해야 할 것도 없이 단출한 차림으로 가볍게 출발하면 그만이었다.
버스를 타고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으로 가는 대신, 집에서 부터 걸어서 십 분 정도 하이델베르크 성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간이역 Heidelberg-Altstadt역에서 오스테르부루켄으로 가는 S1을 타기로 했다. 이 기차역은 정말로 버스 정거장 크기만 하고 작은 시골 간이역이라 아주 정감이 가는 역이다.
80년대 가수 이규석이 부르던 "기차와 소나무" 노랫말에 나오는 그런 느낌을 주는 역이다.
조용한 시골 간이역에 조그만 소나무 하나...
기차가 지날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잊힌 추억과 이야기가 산이 되고 나무 되어...
기적소리 없는 아침이면 마주 보고 노래 부르네.
이 노래 작곡가가 여기를 다녀갔음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근거 없지만 혼. 자. 속으로 굳. 건. 히. 믿고 있었다. 아내에게 말하면 제정신이냐고 할 것이 뻔했다.
시원한 바람에... 날씨마저도 화창한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한 그루...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는 듯하다.
오스테르부루켄을 향하는 S1은 오른쪽에 네카어강을 끼고 시원한 아침 풍경을 차창에 담아내며 기분 좋게 달리고 있었다. 승객도 그리 많지 않아서 공간적으로 쾌적함을 느끼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부족함이 없었다. 기차 창가로 들어오는 뜨거운 아침 햇살을 피하고자 오른쪽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도 신경 쓸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한가했다.
아내와 마주 앉아 창가를 스치는 작은 시골 마을 풍경에 시선을 두면서.... 지나간 여행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 분이신가 봐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한국말에 순간적으로 반가움과 어색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방금 정차역(Mosbach)에서 막 탑승하시고 자리를 찾고 계시던 연세 있으신 부부셨다.
남편분은 독일인이시고 부인 분이 아주 오래전에 독일로 오신 한국인이신 독일 부부셨다. 첫인상에도 아주 다정 다감함이 넘쳐흐르고 점잖아 보이시는 분들이셨다.
" 네.. 안녕하세요.."
이런 시골(?)에서 우리나라 분을 만나다니...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반가움이 앞섰다.
인사와 함께 그냥 스쳐 지나가시겠지... 우리의 순간적인 예상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두 분은 우리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으셨고... 두 분과의 소중한 인연의 전주곡이 시작됨을 의미했다.
그동안 길거리에서 마주친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가벼운 눈인사 혹은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냥 스쳐 지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번도 그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웠고... 그다지 의미 없는... 스치는 만남일 것이라 내심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두 분은 은퇴하셨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계시는 중이라고 하셨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달리는 동안 사는 이야기와 함께 여행에 관하여 이런저런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짧은 사이에... 아주 짧은 사이에... 점차 정감이 가는 사이로 발전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스치는 만남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건.. 그렇고.. 지금 어디 가시나요?"
이어지는 이모님(?) 말씀이었다.
"뷔르츠부르크 가는 중인데 오스테르부루켄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할 것 같아요."
"그냥 당일치기로 장거리 산책하러(?) 가는 중이거든요."
"............."
"뷔르츠부르크는 당일치기로는 좀... 멀다."
"초면이지만 괜찮으시면 우리 집에 들러서 점심 먹고 놀다가... 내일 가시면 어때요. 필요하면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가셔도 되고...."
으잉.... 처음 보는 사이이고.. 더군다나.. 기차에서... 길에서... 오다가다 만난 가벼운(?) 사이일 수도 있는데 집으로 가서 점심도 주시겠다니.. 당황스러웠다. 너무도 파격적인 이모님의 제안에 순간 아내와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거시 무슨 상황이지...... 우짜지...)
우리를 좋게 봐주시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두 분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이 또한 앞섰다. 한국인에 대한 그리움이 크셨나 보다... 우리의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그리움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여시는 것은 아니신가?... 위험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를 좋게 봐주시고.. 좋으신 말씀 너무 고마운데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음을 쉽게 여시면 안 되세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데..."
"우리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우리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얼만데... 우리는 안다. 몇 마디 나눠보고 얼굴 보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다 안다." 이모님의 단호한 말씀에 "우리는 적어도 나쁜 사람같이 안 보인다"는 증거를 하나 확보했다는 흐뭇함이 어울리지 않게 어색한 상황과 교차하고 있었다.
즉흥적인 사태가 점점 구체화하여 가고 있었다. 이 사태를 일부 받아들여야 하는 이상한(?) 사태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누구인가?
예상하지 못한 즉흥적인 상황에 마다함이 없다고 한 사람들이 아닌가?
좋은 분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운이자 행복인데... 독일인의 일상생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직접 경험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과분한 기회였다.
"그러시면... 오늘은 점심, 같이 하시고요. 조금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게요"
"뷔르츠부르크는 다음에 가도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좋으시면 다음에 초대해 주세요. 그러면 그때는 하루 자고 갈게요."
두 분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더 이상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잠시의 망설임 끝에 내린 뻔뻔한(?) 결정이었다.
지금 다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뻔뻔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뻔뻔한 결정이었다.
두 분이 풍기는 연륜과 느낌이 편안했고 가까운 친척분들에게 느낄 수 있는 포근함... 그런 것을 우리도 느낄 수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이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파격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두 분이 사시는 곳은 정감 가는 조그만 마을에 있었다. 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집 밖에서는 시원스럽고 넓게 펼쳐진 전원 풍경이 사방에서 시야로 파고들어 왔고... 집안에서는 크고 시원한 거실의 전면 유리창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는 캔버스가 되어있었다. 사방으로 펼쳐져 보이는 전원 풍경은 고흐의 그림 "오베르의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이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전원생활을 꿈꾸는 희망의 불씨가 풍경을 바라보는 기쁨의 미소 속에서 슬그머니 다시 지펴지기 시작했다. 속마음을 아내에게 들키는 것은 아주 순간이었다. 전원(시골) 생활을 싫어하는 아내 얼굴에도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싫은 기색이 거의 없어 보였다.
남편분의 집안이 대대로 이 마을의 의사로 계셨었고, 남편분 자신도 은퇴 전에 이 마을에서 의사로 계셨기 때문에 거의 모든 마을 사람이 이웃이자 환자에 해당할 정도로 사람을 포함한 마을 모든 것과 친근하다고 하셨다. 가벼운 점심과 차를 마시면서 나누던 독일 생활과 한국 생활의 즐거운 이야기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밖에는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몇 분간의 이야기 속 블랙홀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이야기밖으로 나와보니 벌써 몇 시간이 흘러버린... 영화 "인터스텔라"를 경험하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두 분 댁을 나섰을 때는 땅거미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후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마을의 조그만 축제 행사가 있었다. 두 분의 초대로 독일마을의 전형적으로 조그만 마을의 음식과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행복을 선물해 주시기도 했다. 두 분의 배려로 의사들만으로 구성된 아마추어(라고 부르기에는 안될 정도로 연주의 완성도는 프로의 그것과 같았다.) 오케스트라 연주회(지휘자가 87세.. 마지막 연주회)도 볼 수 있었고 이방인(관광객)으로서 접하기 어려운 생활의 유익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시고,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 타워에 있는 당신들 콘도로 초청해 주셔서 하루를 묵으며 프랑크푸르트의 다른 면모를 즐기게끔 해주시기도 했다. 매번 관광객의 입장에서 방문하는 프랑크푸르트였지만 도시에 직접 살고 계시는 분의 안내를 받으면서 돌아보는 도시의 분위기는 우리끼리만 볼 때와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Frankfurt Cathedral)에서 함께 드렸던 미사의 특별한 감동은 지금도 고스란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우리에게 대성당의 존재는 오직 관광지였지 직접 미사를 보는 곳은 아니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미사는 웅장하고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를 직접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더욱 컸다.
지금도 세계 각지 여행을 다니시다가 좋은 곳을 보면 매번 소개해 주시고, 독일 내의 작고 아름다운 (관광객에게는 인식이 되어있지 않은) 마을을 소개해 주시고 즐길 수 있게 해주시고는 했다. 다양한 여행 경험을 공유해 주시는 덕분에, 작지만 오래된 독일마을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을 하나씩 하나씩 경험하고 정복하는 기쁨을 맛보고는 했다. 두 분을 만난 인연으로 얻어지는 행복감은 우리의 인생에 소박한 재미를 감칠맛 나게 더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길 위에서 스치듯이 만들어진 인연이 따뜻하고 정감 있는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오래되고 끈끈하다고 믿고(일방적으로) 있었던 관계가... 서서히... 의미 없는 관계로 소멸하여 가는 과정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기에 신기한 경험이 더욱 새롭게 와닿는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되고 숙성될수록 그 진가가 높아진다."
그럴까?
".........."
"보졸레 누보도 있어...." 아내의 마지막 한마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