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되자, 자동차 앞 유리에 빗방울이 조금씩 부딪칩니다. 그래도 많진 않을 듯싶네요. 홍성 나들목으로 들어간 저희는 대천 방향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군산까지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망해사라는 절이 있는데 누군가 쓴 여행기를 보니 참 좋았더라는 말과 함께 내비게이션을 켜 보았죠.
"어! 김제까지 가야 하네"
군산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운전하던 아내는 너무 멀다며, 대천까지만 가자고 합니다. 그리곤, 대천 나들목쯤에서 피곤하다며 운전대를 저에게 넘겼습니다. 아무 곳이나 가라는 말과 함께 잠깐 눈을 붙이겠다는 말을 흘리고는, 아내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무량사에 가보자!"
저는 무량사에 한번 가보자는 말을, 아내 말처럼 흘리고, 보령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한참을 달리는데 군산 이정표가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전혀 엉뚱한 길에 들어선 것이었죠. 급하게 유턴해서 다시 대천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이정표, "성주사지".
어딘지도 모르는 무량사는 포기하고 성주사지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폐사지에 왜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없으니 잘됐다는 생각을 했면서요.
성주터널을 지나, 한참을 달리니 성주산 자연휴양림과 성주사지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좌회전해서 조금 달리는데, 심심해하는 아이들 성화에 아내가 눈을 떴습니다.
“어디 가는 거야?”
“성주사지!”
“아까는 무량사에 간다더니?”
“....”,
썰렁한, 부슬부슬 비가 와서 더 그런 느낌이 드는, 성주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는 딱 1대의 차만 있었는데, 그 차도 저희가 도착하자 금방 떠나버렸습니다. 이젠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빼곤.
성주사지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에 위치한 이곳은 사적 제307호로 통일신라 말에 유행했던 선종 사찰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지랍니다.
백제시대에는 전쟁에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오합사라는 절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 김인문이 이 지역을 봉지로 받은 후,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 후 당에서 귀국한 낭혜화상이 이곳에 중창한 것이 바로 성주사.
비탈진 경사로를 올라 폐사지에 들어섰습니다.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풀들이 이곳 전체를 덮고 있네요. 따로 길을 내지 않아서 그 풀들을 밟고 걸었습니다. “쓱, 쓱” 풀 밟는 소리가 싱그럽습니다. 발에 전해오는 촉감도 참 좋았고요.
석등과 5층 석탑
처음에 만난 유물은 석등과 5층 석탑입니다. 석등은 탑 앞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에 5층 석탑 앞에 복원한 것이라고 하네요.
석등 뒤에 있는 5층 석탑은 보물 제19호, 신라 말에서 고려로 이행되어 가는 석탑의 양식으로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풀을 밟으며, 석계단 앞에 섰습니다. 원래 돌계단 양 옆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는데, 그 예술성이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도난당해 현재 이 계단만 남아있다네요. 이런 황당한 일이 또 있을까요?
석계단
사진에서 왼쪽부터 동 3층 석탑, 중앙 3층 석탑, 서 3층 석탑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석계단을 올라, 금당지라는 곳에 서서, 3기의 석탑이 나란히 놓여있는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서 3층 석탑, 중앙 3층 석탑, 동 3층 석탑이지요. 이젠 탑 층 세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는 초보 답사자인 제가 봐도 너무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푸르름에 둘러싸인 석탑을 보고 있으니, 눈도 시원하지만, 머리 속도 상쾌해지네요. 한참을 그렇게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적막함이 주는 감동을 이때, 처음 느껴보았습니다.
이제 빗방울이 아주 간간히 우산 위에 떨어집니다. 우산을 접어, 처음 자리로 다시 나왔습니다.
발끝에 느껴지는 풀 눕는 소리만 “싹, 싹” 들릴 뿐 사방이 고요합니다. 염불 외는 소리도 없고, 그 염불을 외울 만한 스님도 없고, 신자도 없는 이곳에서, 남들은 눈을 감으면 풍경소리가 들려올 듯하다고 하는데, 저는 아무리 눈을 감아보아도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네요. 다만 빨리 오라는 아이들 목소리뿐.
풀 눕는 소리만 들리는 성주사지. 사람들이 폐사지를 찾는 까닭은 이런 적막감 때문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