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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May 27. 2023

매월 20만 원을 화장품에 쓰던 나, 탈덕합니다

나의 민낯도 괜찮아

나는 화장을 정말 잘하는 아이였다. 잘하는 만큼 좋아했고 보고 내 얼굴에 표현하는 것 역시 좋아했다. 남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화이트 아이라이너 역시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수템일 정도였으니까.


20살에 본격적인 화장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화장품을 안고 살고 애지중지했다. 화장을 시작한 순간부터 화장품은 내 인생의 목숨처럼 여기는 날들이 가득했다. 유튜브를 틀면 모든 추천영상이 뷰티였고 릴스 역시 뷰티 말곤 뜨는 알고리즘은 없었다. 달마다 화장품에 쓰는 돈은 최소 25만 원이었고 이 금액 역시, VVIP 쿠폰가를 먹여서 쓴 돈이었다. 모두가 나에게 공통된 질문을 한 번씩 했다.


“셜리, 어릴 때부터 화장을 했어?”

“아니! 20살 때부터 했어.”

“아? 그래~?!? 화장을 잘하길래 중고등학생 때부터 한 줄 알았어~”


펄이라면 환장을 하는 까마귀에 파우더 제품은 최소 4~5개, 섀도우 팔레트는 적게는 15개는 넘었다. 이걸 모두 다 사용하냐고 묻는 질문엔 맞다고 대답했다. 화장을 하는 난 그날 기분, 그날의 기억을 테마로 정해서 피치, 핑크 등등 색 스펙트럼을 가리지 않고 다 사용했다. 화장이 재미있었고 남들보다 더 많은 단계와 제품을 써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 자신이 그때만큼은 좋았다.


그러다 작년 어느 가을 때, 나의 슬픔과 공허함 그리고 괴로움을 채우는 용도가 화장품 과소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그 좋던 백화점 화장품이 좋게 보이지 않더라. 행복하게 보이고 싶어서, 남들만큼 살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세뇌시키고자 했던 화장품 소비가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한정판 나스 블러셔를 구하겠다고 돈도 없으면서 할부로 긁고 빚에 허덕이는 지금 현재 모습이 맞나? 그때 처음으로 강한 의문이 들었다.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소비가 얼마나 갈까? 소비로 공허함과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면 얼마 가지 못해, 그러니 계속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갖어야만 속이 시원한 거야. 그럼…, 소비로 채우지 말고 내가 내 마음을 채우는 방법을 알아보자! 세상에 있는 반짝거림 말고 나를 반짝하게 만드는 것들을!


고민하다 결국 있는 화장품을 나눠 주기로 했다. 얼마나 오래 자주 샀는지 나눠 주면서 사라지지 않는 화장품의 양을 보며 체감했다. 버리기도 정말 많이 버렸지만 내 모든 짐의 1/2은 화장품이더라. 올해가 들어선 화장품을 새로 사는 일은 없었다. 예쁜 섀도우, 다양한 디자인, 다 다른 텍스처에 미쳐 사던 내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대한 쓰게 되었다. 사실 남은 것도 나에겐 너무나 많아서 여러 차례 버리고 또 버렸지만 여전히 많이 남아 파우더 제품만 3개가 있고 섀도우 팔레트 역시 5개는 남았다.


이 모든 화장품에서 벗어나야지, 더 이상 화장하지 말아야지 결심하게 된 게 어느 밤이었다. PT를 열심히

받고 나와서 샤워 후 머리를 말리는데 처음으로 거울을 통해서 화장이 아닌 내 눈이 어떤지 내 입술은 어떤지 보였다. 단점이라고 생각하며 가리기 급급했던 얼굴은 ‘무조건 가려!!’ 외칠 만큼의 단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장…, 이제 그만하자. 지금 맨 얼굴도 괜찮아. 화장하는 동안 놓친 시간들이 정말 많아서 가끔 자책하기도 했잖아. 화장 잘하는 것 맞고, 누구나 부러워한다는 것도 알지만 빨리 하고 잘하고 좋아 하지만, 이제 마음에 넣어두자.


더 이상 누군가의 말, 눈빛, 숨 막히는 짧은 찰나에 느낀 분위기에 상처받지 않게 되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상처가 되는 말에 대해 상처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내 모습이 좋아지니 화려하게 날 감쌌던 화장이 필요 없게 됐다. 여태 내가 날 볼 때마다 못났고 밋밋한 사람, 색이 없어 존재감이 불투명한 사람이라고 여길 때마다 화장에 대해 더 많은 욕심을 부리고 민낯의 나를 부끄러워했지만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화장품을 완전히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얼마나 화장품을 사랑했는지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잘 안다. 화장품에 쓰이는 파운데이션 페이스 브러시만 해도 7개는 넘었고 셀 수 없는 섀도 브러시들이 있다. 가끔은 화장했던 모습이 그립겠지. 생각날 거야.


화장한다는 자체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내 모습이 아른거려서 해볼까? 싶기도 할 테지만, 화장하지 않는 나를 더 아껴보고 싶다. 더 사랑해보고 싶어서 이젠 다 버리고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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