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쿼츠 혁명과 세이코

쿼츠 혁명의 전말

by 링고

마지막으로 쿼츠 혁명의 주역이었던 세이코는 쿼츠 혁명기에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지 추적해 보자.


Seiko의 역사는 1881년 하토리 긴타로(1860-1934)가 동경의 중심가인 교바시에 하토리 시계점을 창업하면서 시작된다. 초창기의 Seiko는 수입 시계 판매 및 시계 수리를 하는 시계 판매 및 수리점이었다. 그 후 1892년 3월에 정공사(세이코샤)라는 시계공장을 만들어 벽시계를 제조한 것이 시계 제조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Seiko의 시계들은 스위스와 미국에서 시계 제조 설비를 수입하여 스위스와 미국의 무브먼트들을 복제하는 수준이었다. 1942년에 만들기 시작한 회중시계 무브먼트 Seiko 칼리버 19가 세이코가 처음 만든 레일로드급 크로노미터 시계였다. 미국 철도 시계처럼 일본 철도에 공식 시계로 사용되며, 일본 내에서 세이코는 최고급 시계의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손목시계 무브먼트에서는 여전히 스위스 무브먼트들의 수준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 후 1950 년대에 대량 생산 시계로는 최고의 크로노미터였고 일본에서도 고가로 판매되던 고급 시계의 대명사 론진과 오메가를 참조하여 소형 수동 무브먼트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1960년대의 그랜드 세이코(Grand Seiko)와 킹 세이코(King Seiko)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 시계들의 품질을 높이려던 정부의 노력으로 일본 국내의 크로노미터 경연이 시작되었다. 세이코의 무브먼트들은 경연에서 후발 경쟁업체들인 시티즌(Citizen), 오리엔트(Orient)을 압도하는 성적을 거두게 된다. 그 덕분에 일본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에게 알리게 되어 세이코는 일본에서는 최고 품질의 시계로 인식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고급 시계로는 스위스의 롤렉스, 오메가, 론진이 선호되었다.


1960년 당시 일본에서 고급 시계로 인기가 높던 오메가나 론진의 크로노미터 시계들과 정확성에서 큰 차이가 없는 시계로 등장한 것이 그랜드 세이코이다. '그랜드 세이코'란 스위스 COSC 크로노미터의 정확성 규격에 합격하도록 만든 시계였다. '크로노미터'가 스위스의 공인인증기관에서 인증을 받은 시계에만 허용되는 표기였으므로 세이코는 한 동안 사용하던 '크로노미터' 대신 '그랜드 세이코', '킹 세이코'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Seo6.png


1960년은 세이코가 일본 국내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은 시기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정부는 일본의 기술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스위스의 오메가 대신에 세이코를 올림픽 공식 계측 업체로 선정하게 된다. 세이코는 오메가의 전유물이었던 올림픽 계측을 일본의 시계 기술로 커버하기 위해 올림픽 계측에 필수적인 스톱워치와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를 개발하게 된다.


오메가가 스톱워치와 크로노그래프 전문 기업인 레마니아를 인수하여 올림픽을 준비한 것과 비교해도 세이코의 도전은 스위스에서도 오메가와 론진 정도만 감당할 수 있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이때 올림픽용 정밀 계측기로 개발된 것이 탁상용 쿼츠 시계였다. 올림픽 계측에는 전광판이 사용되므로 전광판과 전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100분의 1초까지 측정 가능한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고 세이코는 기존에는 방송국에나 설치된 대형 컴퓨터 규모의 쿼츠 시계를 소형화하여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탁상용 쿼츠 시계를 개발하게 된다. VDO에서 자동차에 필요한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을 때 구입하려다가 너무 고가라서 포기하고 자체 개발한 이야기가 세이코의 탁상용 쿼츠 시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올림픽 덕분에 세이코는 쿼츠 기술에서는 가장 앞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 처음 만든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바탕으로 1969년 호이어-브라이틀링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제니스의 '엘 프리메로'에 약간 뒤져서 세계 최초의 타이틀을 날려버렸지만 같은 해에 자동 크로노그래프도 발표하게 된다. 구조가 단순한 버티컬 클러치 방식을 사용하여 이후 스위스의 크로노그래프 개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스위스나 미국에서도 비슷한 케이스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규모와 속도의 기술개발이었다.


이 처럼 세이코는 1964년의 동경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시계 제조 기술에서 오메가에 필적할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세이코가 정확한 시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올림픽을 대비하며 자신들이 만든 시계들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1963년에 스위스 크로노미터 경연에 참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seo13.png


1964년의 동경 올림픽은 세이코를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고, 1963년에 참석하기 시작한 스위스의 뇌샤텔의 크로노미터 경연을 통해 세이코는 당시 스위스의 론진과 지라르드 페레고에서 개발한 최신 기술인 하이비트에 눈을 뜨게 된다. 뇌샤텔의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에서 오메가, 론진, 제니스 등과 경쟁을 통해 수동 시작하여 오메가와 론진급의 자동 크로노미터로 개발된 시계들이 그랜드 세이코와 킹세이코이다.


1960년대는 블로바의 어큐트론이 등장하여 모든 기계식 크로노미터들을 따돌리는 배터리를 사용하는 전자시계가 처음 등장한 시기였다. 블로바의 특허권 때문에 어큐트론 기술을 개발할 수 없었던 Seiko는 올림픽을 위해 탁상시계로 개발되었던 쿼츠 기술을 손목시계로 소형화하여 쿼츠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 결과 스위스 25개 브랜드가 연합하여 개발한 베타 21과 거의 동시에 완성한 쿼츠 손목시계가 아스트론(Astron)이다. 스위스의 CEH가 1969년에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인 '베타 21'을 16개의 브랜드에서 구입하여 1970년 바젤 페어에서 발표할 시계 디자인을 준비하는 시기였던 196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발표하여 시계 역사에서 '쿼츠 혁명'이 시작된 날로 기록되어 있다. '베타 21'이 6,000 개 제조되었음에 비해 일본의 아스트론은 100개만 제조되어 도요타의 코롤라 자동차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gs27.png


1969년은 스위스와 경쟁하며 개발한 킹 세이코와 그랜드 세이코의 최전성기였다. 수동, 자동, 여성용까지 세이코 최고급 시계들이 차례로 등장했던 시기였다. 세이코가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동안 일본에서 생산된 최고급 시계들이었다. 그러나 상용 쿼츠 무브먼트 개발이 완료되던 1974년 기계식 무브먼트 개발이 중단되고, 1977년 경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의 생산이 중지된다.


쿼츠 무브먼트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나 무브먼트의 소형화와 배터리 수명에 필수적인 반도체 칩(CMOS)이 미국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개발되었고 LED와 LCD 기술에 접목되던 시기였다. 쿼츠 혁명을 통해 시계가 전자 장치로 변하면서 미국의 페어 차일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일본의 카시오 같은 반도체 회사들과 전자 계산기 업체들이 기존의 다이얼 대신에 LED와 LCD를 사용하는 시계 제조에 뛰어들게 된다. 스위스의 오메가, 론진과 경쟁하려던 세이코는 당초의 계획과 달리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체들과 경쟁하는 상황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gs20.png


세이코는 전력 사용이 큰 LED를 포기하고 전자 업체들에 비해 경쟁력을 가진 아날로그 방식의 쿼츠 무브먼트와 LCD 무브먼트 개발에 집중했다. 예상치 않았던 전자 회사들과의 경쟁이 심화되며, 1970년대 중반부터 기계식 시계 개발을 포기하고 쿼츠 무브먼트 개발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세이코는 1980년대 말까지 세계 최대의 시계 업체로 부상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CMOS 기술을 바탕으로 저렴한 쿼츠 무브먼트 생산에 성공한 세이코는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 설비들을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국, 말레이지아 등에 쿼츠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쿼츠 무브먼트는 기계식 무브먼트와 달리 숙련공이 필요하지 않은 설비산업이었다. 세이코의 남은 과제는 쿼츠를 통해 잡게 된 고급 시계 브랜드의 이니셔티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세이코가 쿼츠를 개발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스위스의 오메가와 론진이 차지하고 있던 고급 시계 시장이었다.


세이코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 세이코가 시계 회사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오메가와 론진이 빠진 깊은 수렁에 세이코도 함께 빠지게 되었다. 휴대용 시계의 역사는 그 탄생부터 수백 년간 정확한 만큼 비싸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롤렉스의 윌즈도프가 손목시계를 회중시계와 동급의 크로노미터로 만든 것이 성공의 시작이었다. 오메가와 론진이 오랫동안 고급 시계였던 것도 회중시계 시절부터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 다른 업체들보다 고가로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급 시계로 파는 다른 방법이 얇은 시계였다. 크로노미터는 아니더라도 얇은 시계는 크로노미터 이상으로 제조가 어려워서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는 1950년대 이후 크로노미터 대신 얇은 시계를 제조하여 크로노미터보다 고가의 시계로 판매하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gs15.png


세이코가 최종적으로 개발한 트윈 쿼츠(Twin Quartz)는 연 오차 2초로 기계식 시계보다 100배, 어큐트론보다도 10배는 정확한 시계였고 당연히 그 정도의 가격으로 팔려야 하는 시계였다. 또한 세이코가 개발한 슬림 쿼츠 시계인 크레도르(Credor)는 데릴리움 정도의 고가에 팔려야 하는 시계들이었다. 세이코는 쿼츠 기술을 통해 오메가와 롤렉스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고, 데릴리움 수준의 슬림한 쿼츠도 만들었다. 20세기 시계의 역사 내내 이 두 가지 규칙에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세이코에서 그 기술들로 만든 시계들의 판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지부진했던 것이다.


쿼츠 기술은 조립도 자동으로 가능하여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 없으므로,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 때문에 1974년 LCD 시계를 처음으로 출시하고 1983년에 G-Shock를 발표한 Casio에게도 밀리게 된 시티즌은 일본의 ETA가 되어 홍콩 등 동남아 시계업체들에 저렴한 쿼츠 무브먼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문자판에 'Japan move'라고 표기된 홍콩의 시계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세이코도 이 경쟁에 가담하게 된다. 홍콩은 1960년대에 스위스 업체들에 저렴한 가죽줄과 시계 케이스, 문자판 등을 공급하는 부품업체들이 난립해 있었다. 무브먼트만 있으면 시계를 만들 준비가 된 상태였다. 홍콩의 시계 업체들은 내구성이 필요 없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저렴한 무브먼트를 원했고, 시티즌은 그들이 원하는 무브먼트를 공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조 설비를 구입하고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하여 싸구려 쿼츠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자체 생산하게 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세이코의 트윈 쿼츠 보다 10배나 부정확하고, 크레도보다 두꺼운 시계에 만족했던 것이다. 홍콩제 시계들은 1980년대에 유행하던 얇은 아날로그시계 생산에 주력했다. 1980년대에 스위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만들던 타임 온리 혹은 데이트의 얇은 시계들이었다. 1990년대에 스위스의 고급 시계를 상징하던 얇은 시계들이 몰락하게 된 이유이다. 한때 스위스 고가 시계의 특징이었던 얇고 슬림한 시계들이 홍콩에서 대량으로 저렴하게 생산되면서 기계식의 슬림한 시계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gs5.png


슬림한 시계가 홍콩제 싸구려 시계와 외관상 차이가 없어지면서 프로페셔널 시계의 유행이 큰 시계의 인기에 불을 붙이게 된다. 프로페셔널 시계를 대표하는 것이 롤렉스의 섭마리너이다. 1950년대 이후 직업 잠수사들이나 해군에서나 사용하던 다이버 시계들이 싸구려 정장용 시계를 대체하며 젊은 층의 인기 시계로 등극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기계식 시계에 섭마리너 카피 제품들이 무수히 등장하게 된다. 섭마리너가 직경 40 밀리의 시계인 것처럼 이 시계들도 대부분 40밀리는 넘는 시계들이다. 1993년 카시오는 G-Shock의 프로페셔널 버전인 'Frogman'(다이버 시계)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직경 50 밀리에 두께 15밀리의 엄청나게 큰 시계가 젊은 소비자들을 열광시켰다. 1990년대 큰 시계의 유행에는 섭마리너 타입의 다이버 시계들이 주도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Casio의 역할도 적지 않다. 이후 카시오는 LCD 시계의 최강자가 되었다.


한편, 1968년 블로바의 시계들에서 디오르 브랜드로 판매할 시계를 고르며 디자인만 보던 Dior의 디자이너처럼 1980년대의 소비자들은 시계의 정확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비자들은 머스트 카르티에서 시작된 '프레스티지'와 디오르와 구찌에서 시작된 패션 디자인에 끌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83년의 스와치는 이런 새로운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대량으로 판매할 제품인 만큼 프레스티지를 포기하고 패션 시계의 유행에 동참하여 성공을 거둔 것이다. 결국 시대의 흐름은 1980년대에 시계의 정확성에서 패션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시계 브랜드들에게는 쿼츠 혁명이었지만 소비자들에게는 패션혁명이었다.


gs10.png


패션 시계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인과 함께 브랜드의 프레스티지였다. 카르티에, 디오르, 구찌처럼 소비자들에게 업종에 무관하게 고급 브랜드로 인식된 프레스티지가 가격 경쟁력을 만드는 요인이었다. 쿼츠혁명기에 3% 정도 남게 된 최상위의 소비자들은 스포츠 시계로 로열 오크나 노틸러스, 정장용 시계로는 브레게와 랑에의 시계들을 구입했다. 롤렉스는 오메가와 론진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대중적인 고급 시계 시장에서 유일한 강자로 살아남게 되었다.


세이코는 쿼츠의 문제가 배터리 교환이라는 기술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1980년대 말에 시작하여 1990년대에 쿼츠에 오토매틱 기술을 결합하여 자가발전을 통해 축전지에 충전하는 Kinetic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쿼츠가 보편화되자 1-2년마다 배터리를 교체하기 위해 시계수리점을 방문해야 하는 것이 소비자들의 불만이었다. LCD 시계는 작은 충격에도 액정이 깨지는 것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고, 1983년 스와치가 등장하던 시기에 카시오가 G-Shock를 개발하여 이를 해결하면서 LCD 시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ssei1.png


한편, 세이코가 쿼츠 혁명이 주역이 되어 1970년대 말 기계식 시계의 생산을 중단하면서 세이코에서 킹 세이코, 그랜드 세이코, 크레도르를 조립하던 고급 기술자들은 스위스의 시계 기술자들과 같은 운명이 되어 버린다. 회사는 성장했지만 시계가 공장에서 완성되는 쿼츠 혁명기에 이들은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결국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뇌샤텔 천문대 경연에 참여하여 오메가, 론진, 제니스와 경쟁하며 그랜드 세이코를 개발하던 고급 기술자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필립 듀포나 스벵 안데르센처럼 시계 수리점을 열게 된다.


쿼츠 기술 개발에 필요한 것도 CAD/CAM 기술이었으므로 대학에서 컴퓨터 설계를 배운 젊은이들이 이들을 대체하게 되었다. 도리어 스위스보다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었다. 시티즌, 카시오 등 경쟁업체에서도 기계식 시계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달리 취업할 곳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쿼츠 혁명은 도리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더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의 부활은 1986년이 기점이다. 1917 년에 스위스 종합 박람회로 출발한 바젤 페어는 점차 시계와 보석 신제품 전시회로 변하게 되지만, 1972년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개방되고, 1986년에야 처음으로 유럽 밖의 나라들에게도 개방되어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때 세이코에서 발표한 시계가 쿼츠 그랜드 세이코와 키네틱(Kinetic)의 프로토 타입이었다. 당시 바젤 페어에 참여하였던 세이코의 직원 '준 다나카'는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에서 주로 기계식 시계들을 발표하는 데 세이코는 쿼츠 시계들만 발표하는 것에 대해 의아심을 가졌다. 다나카는 바젤 페어에서 돌아와 기계식 시계의 재생산을 상사들에게 제안해 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seki1.png


1991년은 세이코 창립 110 주년 기념이었다. 세이코의 역사를 상징할 이런저런 시계들을 준비하던 세이코 간부들이 다나카의 제안이 받아들이자 다나카는 세이코의 창고에 쌓여있던 기계식 무브먼트들을 찾아 보게 된다. 그 중 세이코가 아스트론을 발표하던 해인 1969년에 처음으로 개발된 세이코의 가장 얇은 수동 무브먼트인 6810가 상당량 남아 있었다. 스위스에서도 프레드릭 피게나 르 쿨트르에서나 제조하던 1.9 밀리의 슬림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UTD(Ultra Thin Dress) 시계를 만들어 110 주년 기념시계의 하나로 100 개 한정판으로 발매하게 되었다. 이 시계들이 고가의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쿼츠 그랜드 세이코보다 일본 시장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seiko9.jpg


한편, 기계식 시계가 완전히 부활한 1996년 미국의 리테일러들로부터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던 무브먼트(7S26)로 1960년대 세이코의 가장 대중적인 시계였던 '세이코 5'를 만들어 납품하게 된다. 그런데 쿼츠 시계에 흥미를 잃고 저렴한 기계식 시계를 찾던 젊은 소비자들에게 '입문용 시계'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2000년에는 세이코의 유명한 다이버 시계인 '몬스터(Monster)'가 등장한다. 쿼츠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세이코가 저렴한 입문용 시계의 대명사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seiko18.png


결국 일본 국내 소비자들의 바람에 따라 1998년에 그랜드 세이코를 재판매하기 위해 칼리버 9S를 개발하여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를 다시 만들게 된다. 고급 기계식 시계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CAD/CAM 기술을 이용하여 과거의 역사와 무관하게 새롭게 설계된 그랜드 세이코였다.


seiko21.png


2004 년 모리오카의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소속으로 시즈쿠이시 시계 스튜디오가 설립된다. 본격적으로 스위스 방식의 공방에서 그랜드 세이코, 크레도르 등 세이코의 고급 시계들을 만들게 된다. 시계의 조립은 CAD/CAM으로는 불가능한 숙련된 조립이 필요한 부분이므로 1970년대 말부터 세이코에서 해고되었던 기술자들이 재취업하여 젊은 기술자들에게 조립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seiko14.png


키네틱에 이어 쿼츠 기술 개발 시기에 마지막으로 개발한 것이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고 스프링의 힘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스프링 드라이브(Spring Drive)'이다. 쿼츠 무브먼트이면서도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고 기계식 시계처럼 수동으로 스프링을 감거나 오토매틱처럼 로터로 스프링을 감아 작동하는 방식이다. 기계식 시계와 쿼츠의 장점을 통합한 세이코만의 기술이다. 그랜드 세이코의 재판매를 위해 9S 칼리버를 개발하던 1997년에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져 1998년 바젤 페어에 발표되었던 새로운 타입의 무브먼트이다.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소비자들의 호기심만 자극했을 뿐 제품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이코는 9F 쿼츠, 스프링 드라이브 등 현재 세계 최고의 쿼츠 기술을 가진 회사이다. 소비자들의 관심이 쿼츠로 돌아오게 된다면 세이코가 꿈꾸던 세계 최고의 시계는 세이코만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랜드 세이코가 재판매되면서 세이코의 역사에 매력을 느끼는 서양의 세이코 컬렉터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세이코 5에서 스프링 드라이브 컴플리케이션까지 '세이코'라는 브랜드 하나에 담기에는 너무 방대한 규모의 역사이다.


seiko22.png


일본은 1979년 소니의 워크맨, 1989년 닌텐도의 게임 보이로 10년 간격으로 세계적인 제품들을 개발해 왔다. 그 처음이 1969년의 세이코일 것이다. 1964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이코는 전 세계의 시계 시장을 변혁시켜온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세이코의 그랜드 세이코나 아스트론은 소니 워크맨이나 닌텐도 게임 보이 정도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세이코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지도 모른다. 세이코는 1960년대에 그랜드 세이코를 개발하며 꿈꾸던 모습은 아니지만 1980년대에 엄청난 이익을 남기며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쿼츠 혁명 이전의 프레스티지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keyword
이전 12화컴플리케이션과 럭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