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등장
1.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
쿼츠 혁명기에 오데마 피게를 살아남게 만들고, 기계식 시계가 럭셔리 제품으로 부활한 후 오데마 피게의 대표 제품을 넘어 오데마 피게와 동의어가 된 시계가 로열 오크이다.
쿼츠 혁명이 시작된 1970년 오데마 피게는 오랜 고민 끝에 이태리 딜러의 제안에 따라 소비자들이 원하는 고급 스포츠 시계를 제조하기로 결정하고 이태리 출신의 시계 전문 디자이너인 제랄드 젠타(1931~2011)에게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다. 이태리 딜러의 제안이란 정규 제품으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스포츠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스위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제 시계가 보편화되는 1950년대와 1960년에도 고집스럽게 귀금속 시계만 만들어 온 것이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 같은 스위스를 대표하는 컴플리케이션의 명가들이었다.
이 브랜드들은 파베르제, 카르티에, 쇼메, 불가리, 반 클립 & 어펠스와 같은 보석상 비슷한 점이 있다. 이들의 고객은 최상류 층들이고 이들이 찾는 시계는 귀금속 시계이지 스테인리스나 도금 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들에게 스렌 레스 스틸제 시계란 대량 생산 브랜드인 롤렉스, 오메가, 론진, 제니스같은 브랜드가 만드는 시계이지 자신들과는 DNA가 틀린 시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쿼츠 혁명이 시작되며 시대가 바뀌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부유층인 기업가, 고위 공직자 같은 부자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데 그 소비자들이 예전의 귀족들과 달리 수영 같은 스포츠를 즐기게 되자 가죽 줄 시계를 불편해하며 올 스테인리스 스틸의 시계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소비자들이 원하는 시계는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같은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로 오데마 피게나 파텍 필립다운 고급 시계였다. 롤렉스는 1905년에 창업하여 손목시계 시대와 대공황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도태되는 시기인 1930년대부터 손목시계의 유행을 주도하며 떠오르기 시작한 브랜드였다. 하지만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입장에서는 롤렉스는 론진이나 오메가와 경쟁하는 브랜드였지, 자신들 같은 금시계와 컴플리케이션 중심의 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1945년 데이트 저스트, 1956년 데이-데이트를 발표하고, 1953년 턴-오-그래프(Turn-O-Graph)를 시작으로 프로페셔널 시계를 창시하며 196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하여 쿼츠 혁명기에는 오메가를 완전히 앞지르며 이제는 노포들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경쟁자로 성장했다.
쿼츠 혁명이 곧 손목시계에서도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1960년대에 이미 예고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도 1963년부터 손목시계용 쿼츠 무브먼트 개발계획인 알파(Alpa)와 베타(Beta) 계획이 두 팀으로 나누어 진행 중이었다. 1969년 손목시계의 쿼츠 혁명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1970년까지 버티던 오데마 피게가 결국 소비자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못하고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와 경쟁할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정규 제품 디자인을 제랄드 젠타에게 의뢰하기에 이른 것이다.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처럼 방수 기능을 가지고 자동의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올 스테인리스 시계여야 하지만 롤렉스와는 달리 얇은 디자인 이어여 했다. 부유층들이 기대하는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의 시계는 오메가가 만드는 롤렉스의 미투 제품이어서는 안 되고 훨씬 고급한 제품이어여 했다.
그 결과 오데마 피게에서 1972년 첫 스테인리스 정규 제품인 로열 오크가 발표된다. 이어 스위스 노포들 중 가장 자존심이 강한 파텍 필립도 1976년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을 받아들여 스테인리스 정규 제품인 노틸러스를 발표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 케이스를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오데마 피게는 케이스와 브라슬렛을 전문으로 하는 외부업체에 이를 의뢰해야 했다. 그리고 해당 업체로부터 스테인리스 케이스는 최소 주문 가능한 양이 1,000개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들로서는 판매해본 경험이 없는 한 가지 모델에 천 개의 케이스를 주문해야 했다. 브라슬렛 일체형의 케이스와 브라슬렛이었지만 독특한 디자인의 브라슬렛은 해당 업체에서도 제조가 어렵다고 하여 브라슬렛은 다른 업체에 의뢰해야 했다.
귀금속 케이스 외에는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내 기술자들에게 스테인리스제의 케이스와 브라슬렛의 조립은 귀금속 시계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에 스테인리스 시계이면서도 자신들이 만드는 금시계보다 더 비싼 가격을 책정해야 했다. 스테인리스 시계를 주로 생산하는 롤렉스나 오메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가격 설정이었다. 결국 로열 오크는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는 물론 잠수용 전문 시계인 서브마리너의 10배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보다 장점이었던 것은 오데마 피게는 당시 '칼리버 2120'(데이트 버전 2021)이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한 상태여서, 스포츠형 자동 스테인리스 시계로서는 매우 얇고 버블 백의 악명을 가진 롤렉스와 달리 케이스 백이 평평한 시계를 제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슈퍼 하이엔드 스포츠 시계의 특징이다.
경영진의 결정에 의해 이 시계를 만들기는 했지만 오데마 피게의 기술자들은 금시계보다 비싼 스테인리스 시계가 팔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전부 재고로 남게 된다면 고가의 무브먼트를 회수하기 위해 힘들게 조립한 시계들을 다시 해체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데마 피게도 1,000개만 판매한다고 했을 정도로 경영진들로서도 이 시계의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랄드 젠타가 이 시계를 디자인한 지 1년 후인 1971년 스위스 바젤 페어에서 로열 오크가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가격이며 디자인 등 이런저런 논란을 일으켰지만 로열 오크는 몇 년 후 오데마 피게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고, 1,000개만 만들기로 했던 시계는 4,000 개로 늘어났고, 그 후 50년이 지난 현재도 다양한 모델로 생산되고 있으며, 파텍 필립의 티에리 스턴의 말처럼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 외에는 판매하기 어려운 단일 제품의 회사라는 인식까지도 생겨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지만 엔트리 모델의 금시계인 칼라트라바 3919보다 비싼 시계였다. 그리고 로열 오크에 사용된 2120과 같은 파텍 필립 칼리버 28-255를 사용하여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와 같은 플랫한 디자인의 시계였다.
2. 얇고 작은 시계
1972년 로열 오크, 1976년 노틸러스가 발매되지만 쿼츠 혁명이 가장 뜨거웠던 1975년에서 1985년의 10년간 파텍 필립과 대부분의 스위스 브랜드들이 생각했던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방법은 얇고 작은 시계였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는 디자인 때문에 39 밀리의 큰 시계였다. 당시 사이즈로는 너무 커서 '점보(Jumbo)'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파텍 필립의 홉네일 칼라트라바가 32 밀리,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가 36밀리이던 시절이다. 로열 오크가 출시 후 베스트셀러로 확인되기 전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은 자신들이 보아도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크기를 조금 줄이는 시도도 해 보게 된다.
기존에 판매하던 제품들과 다른 재질이나 디자인이 출시되면 얼리어댑터가 아닌 보수적인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기는 어렵다. 더구나 32~36 밀리 정도에 익숙했던 소비자들에게 40밀리에 가까운 시계는 너무 커 보였던 것이다. 이태리의 시계 소비자들은 얼리어댑터에 해당하여 발매 즉시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에 관심을 보였지만 다른 나라의 소비자들은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965년 파텍 필립은 새로운 칼라트라바 디자인으로 홉네일(hobnail) 베젤의 칼라트라바 3520을 발표한다. 롤렉스 데이-데이트의 베젤을 연상시키는 베젤이다. 또한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 등 얇게 보이는 디자인을 사용한 첫 칼라트라바였다. 사용된 무브먼트도 인하우스 무브먼트 중 가장 얇은 무브먼트가 3 밀리의 수동 무브먼트 23-300였으므로, 프레드릭 피게의 칼리버 21을 사용하여 직경 32밀리에, 두께가 5.5 밀리의 초박형 시계였다. 얇은 시계이면서도 생활 방수 기능을 가진 스크루 백의 디자인을 선택했다. 롤렉스 등장 이후 소비자들의 요구였던 생활 방수까지는 고려한 시계였다.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는 1950년대에 이미 함께 개발한 수동 무브먼트(바쉐론 콘스탄틴 1003, 오데마 피게 2003)를 사용하여 얇고 슬림한 시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1965년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 3520의 발매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가 앞서가던 슬림한 시계에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텍 필립은 얇은 시계보다는 합리적인 두께(10 밀리 이내)로 롤렉스처럼 크로노미터 시계에 집중하던 브랜드였다. 그런 파텍 필립도 이제 시계의 대세는 얇고 작은 시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오데마 피게(칼리버 2121)가 주도하고 바쉐론 콘스탄틴(칼리버 1121)과 파텍 필립(칼리버 28-255)이 참여하여 개발한 당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인 JLC 920(직경 26 밀리, 두께 2.45 밀리 - 데이트 모델 3.05 밀리)이 개발된 것이 1967년이다. 그리고 이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로열 오크, 노틸러스, 바쉐론 콘스탄틴의 222주년 모델인 '222'가 1977년에 발표되었다.
한편, 파택 필립은 홉네일의 신형 칼라트라바를 발표한 지 3년 후인 1968년에는 '골든 엘립스(Golden Ellipes)'를 발표한다. 유니섹스 모델로 출시한 시계였다. 원형 시계인 칼라트라바의 사이즈를 더 줄이면서 수학의 황금비율을 적용하여 세로 길이는 칼라트라바와 같은 32밀리이지만 가로길이를 27밀리로 줄인 시계였다.
2018년에 50 주년을 맞이한 시계이지만 파텍 필립이 목표로 한 유니섹스 중 여성용에서만 성공을 거둔 시계다. 대신에 주저하며 동참했던 노틸러스가 남성용 시계로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골든 엘립스는 결국 '작고 얇고 작은 시계'였다.
그래서 첫 시계는 당시 파텍 필립에서 제조하는 가장 슬림한 무브먼트인 23-300(수동 : 직경 23, 두께 3 밀리)를 사용했지만 이 시계에 사용하기는 조금 컸으므로 쿼츠 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인 1974년에 수동 무브먼트 215(직경 21.9, 두께 2.55 밀리)를 개발하고, 1977년에는 자동 무브먼트 240(직경 27.5 밀리, 두께 2.53 밀리)을 개발하게 된다. 골든 엘립스에는 쿼츠 무브먼트도 사용되었다. 다만 파텍 필립은 같은 디자인으로 기계식 무브먼트와 쿼츠 무브먼트 양쪽을 사용할 수 있도록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를 모두 판매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다른 브랜드들이 포기하던 기계식 무브먼트를 새롭게 개발했다는 것은 적어도 그 후 10년 이상 기계식 시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서 1980년 손목시계 컴플리케이션에 도전하기 위해 Musy를 영입하고 미니츠 리피터와 대형 회중시계인 칼리버 89의 개발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텍 필립에게 엘립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시계이다. 파텍 필립은 처음으로 시계 외에 다른 제품들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엘립스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커프스 버튼과 키홀더는 물론 라이터까지 만들게 된다. 쿼츠 혁명이 가져올 몰락에 대한 불안감은 파텍 필립 조차도 로버트 호크와 페렝이 창조한 머스트 카르티에까지 모방하는 다양한 미래를 구상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즉 얇은 시계 전쟁은 쿼츠 혁명을 대비하던 1960년대에 이미 시작되어 1970년대에 그 정점을 이루었던 것이고 기계식 시계는 얇은 시계 경쟁에서 쿼츠에 완전히 밀리고 말았다. 하지만 1980년대에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진행되지만 당시에도 컴플리케이션을 제외하고 가장 보편적인 디자인은 얇고 작은 시계였다. 오메가도 1964년 700번대 자동 슬림 무브먼트(두께 3 밀리)를 개발하고, 론진도 1977년 서둘러 칼리버 990번대(두께 2.65밀리, 데이트 모델 2.95 밀리)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되는 것이다. 1980년대에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기계식 무브먼트, 쿼츠 무브먼트의 사용에 무관하게 거의 모든 브랜드에서 얇고 작은 시계를 경쟁적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고가의 컴플리케이션보다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시계는 얇고 작은 시계였다.
데이트 저스트와 데이-데이트가 최고급 제품이었던 롤렉스도 윌즈도프가 죽은 후인 1962년에 미다스(Midas)를 발표하며 얇은 시계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소비자들에게 가장 덜 알려진 롤렉스 '첼리니' 라인의 시작이다. 롤렉스를 대표하는 오이스터 퍼페츄얼과 달리 다양한 디자인으로 만들었지만 대부분 골드 시계이고 얇은 시계들이다. 미다스(Midas)는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브라슬렛 일체형으로 전체가 골드인 시계이다. 1956년에 발매되어 골드 모델로만 판매되던 롤렉스의 최상급 모델인 '데이-데이트'보다 비싼 시계였다. 얇은 시계 전쟁에 대비하는 만큼 미다스는 가장 얇은 프레드릭 피케 21의 수동 무브먼트를 사용했고, 이 보다 저렴하게 판매할 첼리니의 다른 모델들에 사용하기 위해 직경 20.8 밀리에 두께 2.55 밀리의 새로운 수동 무브먼트(칼리버 1601과 1602)도 만들게 된다.
이처럼 모든 브랜드들이 죄다 디자인도 고만고만한 얇은 시계들을 만들었는 데 어째서 롤렉스, 오데마 피게, 파텍 필립은 쿼츠 혁명기를 무사히 넘기고 오메가, 론진, IWC, JLC는 파산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얇고 작은 시계가 대세였는 데, 컴플리케이션 전쟁의 포화가 사라진 1990년대에 느닷없이 큰 시계가 유행하게 된 것일까?
얇은 시계 전쟁에 이어서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진행되던 과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겠다.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절정을 향해 달리던 상황에서 당시 LMH의 사장이던 블륌레인이 1989년 통독이 되자마자 발터 랑에를 찾아가 랑에 운트 조네를 창업하게 된 동기와 신제품 중에 투루비용이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수동 시계들을 발표하고도 성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3. 롤렉스에서 생긴 일
쿼츠 혁명 이후 롤렉스는 단일 브랜드로 비교해서는 경쟁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고 시계 그룹들과 비교해야 비로소 스와치 그룹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로 내려가는 세계 최대의 단일 브랜드이다. 3위가 리치몬트 그룹이다. 롤렉스의 시작은 정확한 시계를 의미하는 '크로노미터(Chronometer)'였다.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유행이 변하는 것을 방해한 것은 작은 무브먼트의 부정확성이었다.
손목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작은 무브먼트가 필수적이었지만 작은 무브먼트는 부정확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돈 많은 소비자들은 여전히 회중시계를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목시계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윌즈도프는 손목시계도 정확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작지만 정확한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어 '정확함(Precision)'이라는 문구를 다이얼에 사용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회중시계들이 출전하는 천문대 경연에 손목시계 무브먼트로 참여하여 회중시계급의 성적표를 얻었다. 그리고, 1927년에 스위스 비엔에서 처음 시작된 손목시계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아 손목시계 다이얼에 제일 먼저 크로노미터(Chronometer) 표기를 하게 되었다.
1951년 오메가가 롤렉스를 견제하며 대량으로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전인 1927년 ~ 1950년까지는 전체 인증의 80~90%를 롤렉스가 차지할 정도로 비엔에서 설립한 크로노미터 인증기관은 손목시계로 제한하면 롤렉스 무브먼트의 정확성을 인증하는 롤렉스 출장 사무소 같은 곳이었다. 롤렉스의 첫 번째 도전은 손목시계 크로노미터였고, 이 목표를 달성하면서 롤렉스는 창업 20년 만에 정확성에서는 오메가, 론진, 제니스와 대등한 브랜드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오이스터(1926)와 퍼페츄얼(1931)의 끊임없는 개량을 통해 1950년대에 이들을 앞서 나가게 되었다.
1920년대 초 손목시계가 부주의한 소비자들조차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생활 방수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자 방수 크라운 관련 특허를 구입하여 경쟁에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나사 체결식 밀폐 케이스와 스크루다운(나사 체결) 크라운으로 오이스터는 완성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용하는 무브먼트가 수동 무브먼트라 매일 밥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매일 아침 크라운을 풀러 밥을 주고 혹시라고 크라운의 나사를 잠그는 것을 까먹으면 방수 기능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계 밥을 줄 일이 없도록 자동 무브먼트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자동 무브먼트 개발은 당시 막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라 윌즈도프에게 크로노미터 다음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도전이 되었다.
창업 이후 롤렉스에 줄곧 무브먼트를 공급하던 에이글러(Aegler)와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면서도 그동안 쌓아온 수동 무브먼트 기술인 정확성을 잃지 않기 위해 수동 무브먼트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동 와인딩이 가능하면서 먼지의 유입까지 막도록 로터(rotor)를 무브먼트에 뚜껑처럼 덮는 방식의 와인딩 기구를 개발했다. 그 결과 롤렉스와 에이글러가 개발한 자동 무브먼트는 오메가, 론진, 제니스 등 경쟁회사들에 비해 두꺼웠다.
더구나 이 두꺼운 무브먼트로 당시의 보편적인 손목시계 사이즈였던 28~30밀리로 만들다 보니 작은 시계가 뚱뚱해졌다. 디자인만으로 감출 수 없는 두꺼움이 결국 케이스 백을 볼록하게 만들게 된다. 롤렉스에서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1933년에서 1944년까지 만들어진 오이스터 퍼페츄얼을 켈럭터들은 '버블 백(Bubble Back)'이라고 부른다.
롤렉스에게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시장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다가 경제공황기인 1931년에는 영국 파운드화의 폭락으로 수출물량이 전년도의 삼분의 일로 감소하는 타격을 입게 된다. 윌즈도프는 파리, 아르헨티나, 이태리, 남미와 일본까지 돌아다니며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게 된다. 덕분에 수많은 스위스 브랜드들이 도산했던 1930년대에 연 3만 개를 판매하는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해외 시장을 쉽게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집중해서 개발한 크로노미터 덕분이었다. 당시 손목시계의 품질은 정확성이었고, 공인기관의 크로노미터 인증은 이를 증명해주는 서류였다. 당시 롤렉스는 오메가나 론진 같은 지명도는 없었지만 공인기관의 인증서가 롤렉스의 품질을 보증해주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5년 롤렉스의 40주년 기념시계인 롤렉스의 'Date Just'가 발표되었고, 40주년을 기념하는 '쥬빌리 브라슬렛'과 함께 롤렉스의 브라슬렛 자동 방수시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윌드도프는 1926년 오이스터 방수 케이스를 완성한 후 마케팅에 집중하여 롤렉스 매장에서 시계들을 어항 속에 전시하고, 롤렉스 시계를 사용하는 유명인들(말콤 캠벨 등)의 동의를 얻어 유명인의 사진과 함께 시계를 선전하는 롤렉스만의 탁월한 마케팅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이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선전하여 명성을 얻는 것이 윌즈도프의 영업방식이다. 사업가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를 윌즈도프처럼 실천하는 경쟁자가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5만 번째 크로노미터를 받게 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2차 대전중 중립국인 스위스를 침공한 나치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스위스의 영웅이었던 앙리 기상(1874-1960) 장군에게 선물한다. 1947년에 10만 번째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시계는 영국의 처칠에게 선물했다. 1951년 15만 번째 크로노미터를 인증받자 2차 대전에서 5성 장군으로 연합국의 승리를 이끈 미국의 아이젠아워 장군에게 선물하게 된다. 2차 대전의 영웅들에게 차례로 선물한 것이었다. 1952년 아이젠아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1956년 데이-데이트의 '프레지던트' 브라슬렛이 탄생하게 된다. 선물한 시계는 데이트 저스트 모델이었다. 당시 롤렉스의 최상급 골드 시계인 것은 같다.
데이 저스트와 데이-데이트는 롤렉스가 1933년부터 개발해온 모든 기술의 집합체인 오이스터 퍼페츄얼(방수 자동시계)이 진화해온 결과로 탄생하게 된 디자인이다. 현재까지도 롤렉스는 1950년대에 완성된 오이스터 퍼페츄얼의 기본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디자인을 원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지루한 브랜드이고, 보수적인 소비자들에게는 변함없는 롤렉스이다. 롤렉스만이 가진 매우 특별한 역사이고 그것이 현재의 롤렉스를 만든 것이다.
쿼츠 혁명기를 다루면서 롤렉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롤렉스는 쿼츠 혁명기 20년에 걸쳐 진행된 '얇은 시계 전쟁'에는 일부 참여했지만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쿼츠 시대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롤렉스를 표현한다면 스위스에서 최초로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인 '베타 21' 개발에 참여하여 1969년에 바젤 페어에서 스위스 최초의 쿼츠 시계를 발표한 16개 브랜드의 하나였으며 첫 물량으로 준비된 6,000개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인 1,000개나 주문한 돈 많은 브랜드였다.
그리고 천 개밖에 안 되는 고가의 첫 쿼츠 시계를 중요한 고객들에게만 귀띔하여 판매했다. 그런데 의외로 판매가 지지부진하고 반응도 별로 좋지 않았다. 전부 판매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고 한다. 집적회로를 사용하지 않은 베타 21의 크기(가로 33, 세로 37, 두께 6.2 밀리)가 컸으므로 시계 역시 40 밀리로 당시로서는 너무 큰 탓이었다. 작고 얇은 시계가 유행하던 시절에 40 밀리에 두께도 10 밀리나 되는 큰 시계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던 것이다.
롤렉스보다 적은 수량만 판매했던 파텍 필립은 1968년부터 칼라트라바를 이을 대표 제품으로 예정한 '골든 엘립스' 모델을 크게 만들어서 42 밀리가 되었고, 오데마 피게는 베타 21에 맞추어 그나마 작은 시계로 만들었지만 두껍고 큰 시계였다. 이 때문에 베타 21을 사용한 시계들은 높은 가격과 함께 큰 인기가 없었다. 작은 시계를 목표로 개발했던 '골든 엘립스'의 베타 21 버전은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그랜드 엘립스'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스위스의 주요 브랜드들이 이후 개별적으로 자신들에게 적합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되는 이유이다. 작고 얇거나, 작고 정확한 쿼츠 무브먼트.
롤렉스는 자신들의 대표 제품인 '데이트 저스트'와 '데이-데이트' 모델의 크기에 맞으며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위해 스위스에서 가장 정확한 쿼츠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1975년에 케이스 디자인까지 마치고 자동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시제품을 만들어 판매한 후 1977년에 첫 쿼츠 시계를 '오이스터 쿼츠'로 표기하여 대표 모델인 '데이트 저스트'와 18K 전용 모델인 '데이-데이트'의 판매를 시작한다.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했지만 기존의 '데이트 저스트', '데이-데이트'와 같은 36 밀리 시계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된 오이스터 쿼츠는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공식 크로노미터 인증까지 받았지만 베타 21 쿼츠 시계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후 2000년 초까지 판매되었지만 약 25년간 25,000개 정도 판매되었다. 1년에 약 천 개 정도만 판매된 것이다. 당시 롤렉스는 1년에 50만 개 이상을 판매하던 회사였으므로 1,000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판매량이었다.
롤렉스의 입장에서는 쿼츠 시계보다 얇고 작은 시계의 인기를 예상하고 만든 첼리니 시계들의 판매량이 더 많았다. 첼리니도 쿼츠보다는 수동 시계가 더 많이 팔리게 된다. 쿼츠 시대의 최절정기에 생긴 일들이다. 1980년대 초까지도 성공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던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판매량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쿼츠가 아닌 기계식 모델들의 판매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한 것일까?
4. 최고의 컴플리케이션은 럭셔리
1985년 카르티에는 '파샤'를 처음 출시하며 롤렉스의 대표 제품인 '데이-데이트' 처럼 18K 금시계로만 출시했다. '파샤'의 컨셉은 카르티에 역사에는 없었던 '방수 시계'였다. 더구나 회전 베젤까지 설치했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가 아닌 롤렉스의 섭마리너에 해당하는 시계를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전통적인 구성인 골드에 스트랩으로 출시한 것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모델이다. 파텍 필립과 오데마 피게가 골드 스트랩 시계에 안 팔려서 롤렉스 데이트 저스트 같은 스테인리스 스포츠 모델을 개발한 것인데 카르티에는 도리어 골드 스트랩 시계를 출시한 것이다. 대신 시계의 사이즈에 맞추어 스트랩도 일반 가죽 스트랩과 달리 두툼했다.
더구나 페랭이 선택한 크기는 38 밀리였다. 롤렉스 데이트-저스트보다 2밀리 큰 시계였다. 시계의 크기에서 2 밀리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차이였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가 38 밀리의 크기 때문에 고전했고, 베타 21의 쿼츠 시계들도 40 밀리에 육박하는 크기 때문에 실패했는데, 페랭은 38 밀리의 두꺼운 다이버 시계를 만든 것이다. 루이 카르티에와 무관한 첫 시계였다. 페랭이 다이버 시계 컨셉이면서 브라슬렛 없이 스트랩의 18K 모델을 출시한 시기는 블랑팡, IWC, 율리스 나르당, 프랭크 뮬러 등이 컴플리케이션으로 경쟁하던 시절이다.
페랭이 읽은 1980년대의 컴플리케이션 전쟁은 1970년대에 얇은 시계 전쟁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던 럭셔리와 패션 전쟁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모바도 그룹의 창업자인 그린버그가 읽었던 '성공의 상징'인 골드 시계와 분더만이 성공시킨 패션 시계 '구찌 2000'이 시작한 패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르 디자이너의 말처럼 시계에 '시간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블로바는 디자이너의 그런 대답이 신기하여 이를 광고에 사용하면서도 그 말이 '시계의 미래'라는 것을 읽지는 못했던 것이다. 1970년대의 유행이 작고 슬림한 것이었지만 1980년대에 이 유행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카르티에를 통해 시계와 패션 사업을 병행하던 페랭은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샤의 발표는 럭셔리 패션 시계의 등장이지 다이버 시계가 아니다. 1990년대에 유행하게 될 스포츠 패션을 도입한 골드 시계였다.
1970년대에 고전하던 로열 오크나 노틸러스와 달리 페랭이 발표한 파샤는 발매 직후 인기 시계가 되어 다양한 모델들이 매년 새롭게 발표될 정도로 카르티에의 새로운 고급 모델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38 밀리의 시계에 적응한 소비자들에게 얇고 작은 탱크보다 18K의 큰 시계인 파샤가 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소비자들이 파샤에 열광하는 사이 충분히 판매한 버메일 탱크는 은근슬쩍 자취를 감추게 된다. 카르티에의 프레스티지를 높여야 할 타이밍인 것이다.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은 무브먼트가 복잡한 만큼 크고 두꺼울 수밖에 없는 시계들이며 당연히 엄청나게 비싼 시계들이다. 아무나 구입할 수 없는 최고가의 시계들이다. 즉 머스트 카르티에로 성공을 거둔 페랭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럭셔리'이지 컴플리케이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 너무 흔해진 얇은 시계의 시대는 지나가고 두껍고 큰 시계의 유행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럭셔리는 브랜드의 프레스티지이고, 유행하는 패션은 로열 오크로 상징되는 스포츠 시계, 그리고 컴플리케이션 시계처럼 두꺼운 시계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탱크, 베누아 등 1980년대 중반까지도 유행하던 얇고 작은 머스트 카르티에의 판매량이 감소하는 것을 매일처럼 확인하던 페랭이었기에 소비자들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IWC와 JLC를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참전시키며 기계식 시계의 부활 가능성을 본 블륌레인이 IWC의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을 지연시키며 랑에를 창업하게 된 것도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얇고 작은 것이 아니라 럭셔리이며 프레스티지라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IWC의 프레스티지를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올리기보다는 처음부터 파텍 필립 같은 프레스티지를 새로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발표한 랑에의 대표 모델인 '랑에 1'의 특징도 정장용 시계치고는 큰 직경 38.5 밀리에 두께 9.8 밀리의 시계였다. 시대의 대세인 자동도 아닌 수동 시계이면서도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츄얼 두께의 시계였다.
대신에 다이얼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디자인이며 시스루 백이 장착된 케이스 백을 통해서는 3/4 플레이트의 새로운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등장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동독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사라졌지만 세계 대전 전까지 독일 최고의 시계였던 랑에를 등장시키기 위한 복선이다. 처음 보는 화려한 무브먼트에 대해 기자와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설명을 위해 전쟁 때문에 서독으로 피신해야 했던 발터 랑에의 불행했던 시절과 전쟁 전에 랑에 가문이 만들던 회중시계들이 소개된다. 당사자인 발터 랑에의 인터뷰들이 잡지 기사로 실리게 된다. 사라졌던 럭셔리한 브랜드에 딱 맞는 스토리텔링이다. 독일의 파텍 필립이 부활한 것이다.
'랑에 원'(Lange 1)이 발표된 1994년이 기계식 시계 부활을 완벽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이런 종합적인 의미이다. 정장용 시계로는 큰 38밀리대의 시계, 독일 최고의 시계를 만들던 클라슈테와 랑에의 화려한 역사가 선사하는 파텍 필립과 대등한 프레스티지, 처음 보는 독특한 다이얼 그리고 고급스러운 무브먼트의 조합이다. 그리고 엔트리 모델조차 파텍 필립보다 비싼 시계이다. 시계의 다이얼과 무브먼트가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패션이다. 이후 등장하는 글라슈테의 시계들은 블륌레인이 시작한 유행에 따라 시계 디자인은 달라도 무브먼트만은 전부 3/4 플레이트의 디자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패션에 대한 성공의 척도는 유행이다.
세 사람 중 가장 불리했던 젊은 독립제작자인 프랭크 뮬러가 읽어낸 것도 컴플리케이션 마스터의 이미자로 만들어낸 '프레스티지'와 생트레 커벡스와 아르데코로 상징되는 새로운 패션의 결합이었다.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 컴플리케이션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고 매년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하여 만들어진 프레스티지와 20세기 초에 유행하고 사라진 토노형 케이스와 팝아트 같은 아르데코 다이얼의 결합이 프랭크 뮬러가 단기간에 성공을 거둔 이유였다. 프랭크 뮬러는 프레스티지만으로는 부족했고 유행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발표한 시계들은 전부 큰 시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이 부족했던 프랭크 뮬러가 단기간에 엄청난 물량을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ETA 덕분이었다.
오메가, 론진과 제니스가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IWC처럼 이들도 오랜 기간 골드 시계를 만드는 대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스테인리스 시계 제조에 집중했던 것이다. 롤렉스는 그 점에서 이들과 달랐다. 롤렉스는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지 않는 대신 최상위의 모델은 언제나 골드 시계로만 판매했다. 1945년 롤렉스의 DNA인 '오이스터 퍼페츄얼'(자동 방수 시계)과는 날자창을 가진 것만 다른 '데이트 저스트'를 발표하고 오랫동안 골드 모델로만 판매했다. 1956년 데이트 저스트 보다 고급 시계인 '데이-데이트'가 등장할 무렵 데이트 저스트에 스틸 모델이 등장하게 되고 대신에 최상급의 모델인 '데이-데이트'는 '프레지던트(president)' 브라슬렛이라는 골드 브라슬렛을 세트로 하여 파텍 필립이나 바세론 콘스탄틴의 컴플리케이션 가격에 판매했다. 컴플리케이션 대신 그 가격에 해당하는 금덩이를 판매한 것이다. 남성용 시계의 다이얼과 케이스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하면 더 비싼 '데이-데이트'가 만들어진다.
롤렉스는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지 않고도 최고급 시계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린버그가 시작하기도 전에 신분의 상징은 멀리서도 쉽게 보이는 올 골드 시계와 시계의 페이스에서 빛나는 다이어먼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비버가 오데마 피게를 그만두고 오메가에 입사했을 때 주어진 임무가 오메가의 골드 시계를 판매하는 마케팅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골드 캡이며 금도금 시계를 많이 판매해서 골드 시계를 제조해도 소비자들이 도금 시계와 혼동했던 것이다. 론진이나 제니스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한 일도 강력한 경쟁자인 오메가를 따라 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에 이 브랜드들이 판매했던 빈티지 시계들은 얇기만 했을 뿐 파텍 필립, 바세론 콘스탄틴, 롤렉스 같은 럭셔리한 금시계가 아니었다. 골드 시계도 도금 시계로 보이는 브랜드에서 어떤 프레스티지를 느낄 수 있겠는가? 도미니크 페랭이 파샤를 발표하면서 버메일 시계들의 생산을 줄여나간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블륌레인이 IWC와 JLC의 사장이 된 후 시작한 것이 1980년대에 개성 없이 미투 시계들로 혼잡한 모델들 중에서 대표 모델을 찾고 매년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는 일이었다.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고 컴플리케이션을 통해 프레스티지를 확보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프랭크 뮬러가 이들보다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선풍을 일으키게 된 것은 IWC나 JLC 같은 과거의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곧바로 하이엔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블륌레인과 프랭크 뮬러는 경쟁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랑에와 달리 2000년대 중반 가장 성공한 시점에서 몰락하게 되는 과정은 동업자인 시르마케와 분란을 일으키다가 도리어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고, 한편으로 컴플리케이션이 아닌 생트레 커벡스에는 론진이나 티솟이 사용하는 ETA 2892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프레스티지는 이미지 관리에 실패하면 순식간에 몰락하는 법이다. 무수히 라이선스를 남발한 피에르 가르뎅에게서 샤넬이나 아르마니같은 프레스티지를 느낀 수 없는 것과 같다.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스위스의 대부분의 에보슈 업체들을 ETA로 통합하게 되면서 정부의 압력에 의해 스위스 브랜드들에게 마지못해 주게 된 선물이 스위스 에보슈 업체에서 만들어온 수백 가지의 무브먼트 중 엄선한 ETA 무브먼트들이었다. IWC도 밸쥬 7750 덕분에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즉시 승선하여 슈퍼 컴플리케이션까지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중단했던 수많은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ETA 덕분에 급격히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니콜라스 하이에크를 화나게 만든 건 ETA로 돈을 벌면서 도금만 바꾼 무브먼트를 '인하우스 무브먼트'로 발표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분신술 때문이었다. IWC, 프랭크 뮬러, 율리스 나르당 등 ETA 무브먼트를 사용하며 하이엔드를 자처하는 브랜드들에게 전부 'intel inside' 처럼 'ETA Inside'를 각인하도록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5. 기계식 시계의 부활과 큰 시계 유행
각각 1972년과 1976년에 발표된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 1985년의 파샤에 이어 1994년의 랑에 1이 등장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큰 시계의 인기는 다른 브랜드들에서도 동시 다발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993년 IWC는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포르투기즈를 한정판으로 발매했다. 370개를 판매하는 데 60년이 걸린 시계가 한정판 치고도 많은 물량인 1,500개를 판매했지만 이번에는 몇 년도 되지 않아 매진되어 버린 것이다. 골드 시계를 구입하는 것이 부담이 된 컬렉터들이 스테인리스 시계를 찾자 리테일러들의 문의가 빗발친 것이다. 골드 시계와 스테인리스 모델을 함께 만들면 늘 생기는 일들이다. 1993년에 발표된 포르투기즈 쥬빌리 모델은 그 이듬해에 등장한 랑에 1보다 타임존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더 관심사였다. 스테인리스 모델이 전부 매진되고 IWC에서 추가 판매 계획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출시 후 몇 년도 되지 않아 고가에 거래되는 IWC의 가장 유명한 시계가 되었다. 기계식 시계 부활 후 투자 목적의 한정판에 대한 인기가 시작된 시점이다.
표준 사이즈 시계인 35 밀리를 넘어선 IWC의 41밀리 시계가 매진되어 버린 것이다. IWC에서 1980년대부터 개발하며 대표 상품으로 예정했던 다빈치와 군용 시계의 인기를 넘어서 버린 것이었다. IWC조차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컴플리케이션 전쟁을 통해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인기를 끌 가능성이 큰 시계였으므로 IWC는 크로노그래프 포르투기즈를 디자인하여 그 후 IWC의 대표 상품이 된 3714가 탄생하게 된다. 2006년 첫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개발하자 이를 사용하는 첫 모델로 46 밀리의 '빅 파일럿(Big Pilot)'이 등장하여 포르투기즈와 함께 IWC의 상징이 된다.
1993년 오데마 피게에서는 로열 오크의 크기를 42밀리로 키우며, 크로노그래프로 로열 오크 오프쇼어(offshore)를 발표한다. 바젤 페어에서 이를 본 제랄드 젠타는 물론 수많은 관계자들이 오프쇼어가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을 망쳤다며 곧 사라질 시계라고들 말했다. 이때까지도 큰 시계의 시대가 이미 한참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8년 로열 오크 오프쇼어 팬이었던 슈워제네거가 영화 '엔드 오브 데이스(End of Days)'에 출연하면서 착용할 시계를 찾아 오데마 피게를 방문하게 된다. 슈워제네거가 고른 오프쇼어는 검은색이었다. 올 검정 시계는 2010년대 큰 시계 중에서도 가장 유행하게 되는 시계이다.
패션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는 스테인리스 로열 오크를 구입한 후 검은색 페인트로 칠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1972년 오르피나와의 콜래보로 첫 번째 시계를 디자인할 때 페르디난드 포르셰가 디자인한 시계가 올 블랙이었다. 디자이너들의 안목은 일반인들보다는 몇십 년은 앞서가는 듯하다. 1990년대에 로열 오크는 수많은 유명인들이 사용하며 1970년대에 입사했던 비버가 신제품 개발을 건의하자 골레이 사장이 기다리라고 했던 20년 후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97년 3월 리치몬트는 재정상 어려움을 겪던 이태리 플로렌스의 파네라이의 브랜드인 'Officine Panerai'와 파네라이에서 보유 중인 현행 제품과 빈티지 아이템을 합쳐서 백만 유로에 구입하게 된다. 이때 파네라이가 오랫동안 보유하고 있던 무브먼트는 60개의 롤렉스의 회중시계 무브먼트 칼리버 618과 190개의 안젤루스 칼리버 240개였다. 1997년 11월 새롭게 설립된 파네라이는 리치몬트 그룹의 회사로 설립된다. 파네라이의 CEO로 임명된 안젤로 보나티는 1940년에서 1944년 사이 롤렉스에서 공급되었던 파네라이 제품번호 3646을 리치몬트 파네라이의 첫 시계이자 한정판으로 발매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해서 리치몬트 파네라이의 첫 번째 제품이었던 플래티늄의 파네라이 PAM21이 판매된다. 42 밀리를 넘어 47 밀리 시계의 등장이다.
'1998년 당시에 좀 비싼 가격이었지만 하나당 2만 유로에 판매했어요. 2주일도 안돼서 매진되었죠.'
(안젤로 보나티의 인터뷰 중에서)
리치몬트 파네라이의 첫 시계이자 파네라이 컬렉터들의 다이포 와치인 PAM 21은 2017년 11월 필립스 경매에서 60개의 한정판 중 2번째 시계가 125,000 스위스 프랑에 경매되었다. 2000년대 큰 시계 유행의 가장 뜨거웠던 시계 중 하나인 파네라이의 등장이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되면서 1980년대부터 시계 잡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이태리 출신의 사진작가인 몬티 쉐도우(Monty Shadow)는 1992년에 발행된 일본 시계 잡지를 통해 파네라이를 알게 되었다. 그 후 1995년에 슈워제네거와 스탤론에게 영화의 소품으로 사용할 파네라이를 소개하면서 파네라이의 유행이 시작된다. 1996년에 개봉된 슈워제네거의 '이레이저'와 스탤론의 '데이 라이트'를 통해 파네라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몬티 쉐도우는 리치몬트의 회장인 요한 루퍼트와 잘 아는 사이였다. 쉐도우를 통해 이 정보를 알게 된 루퍼트는 이태리 출신의 안젤로 보나티를 사장으로 임명하여 큰 시계 시대의 빅 브랜드인 파네라이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가장 보수적인 브래드 롤렉스는 2016년 41 밀리의 데이트 저스트를 발표했고, 파텍 필립은 39 밀리의 칼라트라바가 정규 제품 중 가장 큰 사이즈의 시계이다.
리샤르 밀
고급 시계로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완전히 정착된 2001년 독특한 시계가 등장한다.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와 로열 오크를 적절히 섞은 시계였다. 컴플리케이션 전쟁에서 마지막에 등장하여 새로운 AHCI 멤버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빈번히 등장하는 컴플리케이션이다. 리샤르 밀도 2001년 투루비용으로 등장했다. 시계의 디자인은 199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와 로열 오크 베젤 디자인의 합성처럽 보인다. 길이 48 밀리, 폭 38 밀리에 두께 12 밀리의 큰 시계다.
리샤르 밀(1951~)은 프랑스 베사콩 출신으로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했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 지역의 시계 회사에 취직한다. 1981년 그 회사가 마르타(Marta)에 인수되면서 매니저로 승진하게 딘다. 1992년 세이코가 마르타를 인수하자 밀은 파리의 보석 회사인 '모브생(Mauboussin)'으로 옮겨 시계 제조에 진출하려던 모브생의 시계 담당 사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프레스티지를 위해 소량 생산을 고집하던 밀과 규모를 원하던 모브생 오너와의 갈등으로 1998년에 모브생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 47세였던 리샤르 밀은 이미 24년간 시계 업계의 경력을 가지고 상당한 재산도 모은 상태였다. 시계 업계에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중년이 지나가는 나이였으므로 리샤르 밀은 창업전 성공할 수 있는 시계에 대해 충분한 고민을 거치게 된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스위스 Jura 지역의 Les Breuleux에 위치한 Guenat S.A,의 사장인 도미니크 구에나(Dominique Guenat)가 파트너로 참여함으로써 시계 제조 및 조립이 가능한 공방을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계 리테일러인 Chronopassion의 사장 Laurent Picciotto가 참여하여 제품을 판매할 리테일러까지 확보한 상태로 사업을 시작했다.
아마추어 레이서였던 리샤르 밀은 자신이 생각하는 시계를 디자인했다. F1 레이싱카의 엔진에서 착상한 무브먼트 디자인이었다. 리샤르 밀이 생각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최첨단 재료인 티타늄으로 무브먼트를 만들어 크지만 가볍고 튼튼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소량만 판매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의 아이디어를 실현해줄 기술 파트너는 오데마 피게 소속의 '르노&파피'였다. 3장의 스케치를 들고서 지울리오 파피와 만나 상담을 하게 된다. 리샤르 밀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컴플리케이션 전문의 르노&파피에서 투루비용 무브먼트가 만들어진다.
첫 시계인 RM001은 리샤르 밀이 생각했던 검정색 무브먼트를 실현하기 위해 저먼실버(은색 황동)에 PVD로 검정색으로 코팅을 했다. 그리고 RM002에는 티타늄에 PVD를 코팅하여 검정색의 플레이트에 은회색의 티타늄이 대조를 이루어 매우 현대적으로 보이는 시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PVD 코팅은 조립시 조금만 실수를 해도 코팅이 벗겨지는 것이 문제였다. 2005년 RM006을 통해 처음으로 카본 파이버를 사용하여 코팅이 아닌 재질의 색체로 검정색 무브먼트 플레이트가 만들어지게 된다.
리샤르 밀은 연 오천개 이내의 시계를 만들며 평균 가격에서 가장 비싼 시계를 만드는 브랜드이다. 엔트리 모델조차 5만 달러가 넘는 가장 비싼 브랜드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연 오천개의 시계를 만들면서 매출액 기준의 브랜드 순위에서 매년 순위가 상승하여 5만개의 시계를 만드는 파텍 필립까지 추격한 상태이다. 엔트리 모델 가격과 평균 가격에서 창업후 20년만에 유일한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