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HCI와 프랭크 뮬러

쿼츠혁명기의 성공신화

by 링고

1. 독립 시계 제작의 원조 조지 대니얼스


조지 대니얼스(1926-2011)는 영국 출신으로 2차 대전 중 참전하여 이스라엘에 주둔하던 중 취미로 시계를 수리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군을 제대한 후 영국에서 시계 수리업에 종사하게 된다. 조지 다니얼스는 2005년 자서전(All in Good Time : Reflections of a Watchmaker)을 발표했다.


and8.png 조지 대니얼스(1926-2011)


'1960년대 나는 회중시계와 클럭들의 복원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복잡한 시계를 복원한 후에는 나의 기술과 경험을 선전할 목적으로 사진을 찍어 공방에 이를 전시해두었다. 브레게 수리는 나의 특기였다. 1960년대 초에 파리의 브레게 사장인 조지 브라운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덕분에 유명한 브레게의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브레게에 대한 나의 지식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브레게의 아카이브는 브레게가 만든 모든 휴대용 시계들과 클럭들에 대한 제조일자와 판매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이 정보는 나의 개인적인 브레게에 대한 기록들에 브레게의 제조 시스템에 대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지 브라운은 나에게 '파리 브레게의 에이전시'의 타이틀을 주었다. 1792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브레게의 에이전시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를 이어받을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사업적인 이유와 한편으로는 로맨틱한 느낌으로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나는 브레게에 대해 말할 때 어떤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손님들에게 소개되었다.


1967년 브라운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그때 기록해 온 데이터에 따라 제조한 클럭을 보여주었다. 그 무렵 나는 첫 번째 회중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는 나의 작업에 흥미를 나타내며 나에게 브레게 시계들을 만들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브레게에게 오랫동안 감탄해 왔고, 브레게의 시계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내가 직접 시계를 만들어 보자는 영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파리의 브레게'가 되기보다는 '런던의 다니엘스'가 되겠다고 말하며 서로 껄껄 웃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무렵 나는 브레게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브라운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조지 대니얼스의 자서전 중에서)


cra5.png


대니얼스의 브레게에 대한 책 'The Art of Breguet'는 1975년에 발간되었다. 대니얼스는 1965년 그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샘 클러톤과 '휴대용 시계들'(Watches)라는 책을 출판한 경험이 있었다. 책들을 출판하여 생긴 권위와 브레게 전문가라는 이미지 덕분에 첫 시계를 만들기 전인 1969년부터 소더비 경매의 컨설턴트가 되었고, 그 덕분에 브레게의 클럭이며 회중시계들에 대해 경매 전에 시계의 사진들을 편하게 찍을 수 있었고 브레게 전문가로 알려졌다. 브레게와의 이런 인연으로 인해 대니얼스가 제작한 회중시계들은 아브라함 브레게와 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게 되었다.


대니얼스(1926-2011)는 1969년 시계 유리와 스프링 외에는 무브먼트부터 시계 케이스와 다이얼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첫 번째 시계를 친구인 샘 클러톤에게 판매하게 된다. 시계 컬렉터이기도 했던 샘 클러톤은 컬렉터들의 모임에서 이 시계를 보여주게 되고, 이를 보고 감탄한 컬렉터들이 그에게 시계를 주문하면서 그의 시계 제조가 계속되게 된다. 한 개의 시계를 만드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므로 일 년에 한 두 개 정도의 시계를 만들어 파는 것이 한계였다. 그가 평생 만든 시계는 총 27개(회중시계 23개)뿐이라고 한다.


cra6.png 대니얼스와 에트우드

직접 시계를 제조하면서 대니얼스는 1974년 미국의 기업가이자 시계 컬렉터인 세스 애트우드(Seth Atwood, 1917-2010)로부터 기존의 시계들의 성능을 넘어서는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애트우드는 1,500개 이상의 시계를 수집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컬렉터였다. 자신이 수집한 시계들을 전시하기 위해 1971년 미국 일리노이 록포드에 '타임 뮤지엄'이라는 시계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그가 수집하여 전시했던 시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파텍 필립의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 컴플리케이션이었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아브라함 브레게가 오를레앙 공작을 위해 만들었던 심퍼티크(Duc D'Orléans Sympathique) 클럭이었다. 이 쿨럭은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클럭 중 최고가인 68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애트우드는 브레게의 심퍼티크 클럭의 수리를 브레게 전문가인 대니얼스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수리가 끝난 시계를 찾으러 1974년 대니얼스를 방문했던 애트우드는 대니얼스에게 기술적으로 혁명적인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컬렉터이자 박물관을 운영하는 고객의 중요한 주문이었으므로 대니얼스는 친구였던 시계 기술자 데릭 프랏 등과 상의해 가며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1976년 코엑시얼 이스케이프먼트(Co-axial escapement)라는 새로운 이스케이프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대니얼스가 만든 이 시계는 1976년 타임 뮤지엄에 '애트우드의 시계'로 전시되었고, 대니얼스는 1980년 이에 대한 특허권을 얻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시계를 만들면서 자신이 발명한 코엑시얼 기술을 실용화시키기 위해 파텍 필립 등을 찾아다니던 대니얼스의 노력은 오랫동안 실패하게 된다. 독학으로 시계를 만들었던 대니얼스의 기술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co3.png


결국 개발된 지 20년도 넘은 1999년에야 오메가에서 대니얼스의 기술을 구입하여 ETA 2892에 처음 사용하면서 오메가의 'co-axial' 기술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애트우드가 설립했던 시계 박물관은 미국을 대표하는 시계 박물관이었으나 점차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1999년 문을 닫게 되었고, 그가 수집했던 중요한 시계들이 2012년 소더비 경매에 나오게 되었다.


아브라함 브레게의 클럭부터 회중시계까지 수리하며 시계 기술을 배우고, 무브먼트부터 시작하여 시계를 만들면서 시계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하며, 그 후에 등장하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여러 개의 시계를 판매했던 경력으로 1986년 AHCI가 출범할 때 초대를 받아 AHCI의 전시회에 참가하게 된다.


cra4.jpg 조지 대니얼스와 스페이스 트레블러


조지 대니얼스의 대표작은 1982년에 제작한 '스페이스 트레블러(Space Traveller)'이다. 1979년에 착상하여 3년에 걸쳐 만든 첫 번째 시계는 평생 가지고 있으려다가 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고객에게 판매했다. 판매 직후부터 후회하던 대니얼스는 1984년에 이를 더 개량하여 '스페이스 트레블러 2'를 만들게 된다. 한편, 1982년 대니얼스로부터 스페이스 트레블러 1을 구매했던 고객은 1988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15만 달러에 팔게 된다. 스페이스 트레블러 1은 대니얼스가 서거한 후 2019년 다시 소더비 경매에 나와 45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AHCI 멤버가 만든 시계들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린 시계로 남아 있다.


111a10.png 조지 대니얼스의 대표작들


이후 조지 대니얼스는 자신이 만든 가장 가치 있는 시계들인 스페이스 트레블러 2, 그랜드 컴플리케이션과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는 만든 후에도 판매하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다가 영국의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전부 고려하면 조지 대니얼스는 애초 시계 판매자로는 부적격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려 그 제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팔 수 없게 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인 것이다.


co20.png 로저 스미스와 대니얼스 기념 시계


대니얼스는 1990년대 초 영국 맨체스터의 시계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당시 그 학교의 학생이던 로저 스미스(1970~)와 만난다. 이때의 인연으로 몇 번 연락을 하다가 1994년 로저 스미스가 만든 2번째 회중시계를 보고 그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70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혼자서 시계를 만들 수 없게 된 대니얼스는 1998년 로저 스미스를 자신의 공방으로 불러 로저 스미스에게 자신의 시계 기술을 가르치며 함께 시계를 만들게 된다. 2011년 조지 대니얼스가 죽은 후 로저 스미스는 2012년 조지 대니얼스와 함께 설계했다는 기념시계(Daniels Anniversary)를 출시한다. 이후 로저 스미스는 대니얼스의 방식으로는 제조할 수 있는 수량에 한계를 느끼고 현대의 CAD/CAM 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개발한 시계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판매하며, 대니얼스 이름의 기념시계와 밀레니엄 시계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로저 스미스는 AHCI 멤버는 아니지만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독립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2. 필립 듀포


and9.png


대니얼스 보다 20살 어린 필립 듀포(1946-)는 스위스 컴플리케이션 기술의 중심지인 발레 드 쥬에서 태어나 르 쌍띠에(Le Sentier)의 시계학교를 졸업한 후 1967년 JLC의 독일 애프터서비스 센터에서 첫 직장을 구하게 된다. 율리스 나르당의 쉬나이더처럼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진 듀포는 1970년 제너랄 와치로 옮겨 카리비안의 세인트크루이섬에서 근무했다. 발레 드 쥬 출신이었던 듀포는 에드먼드 캡트처럼 1974년 스위스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고향인 르 쌍띠에의 제랄드 젠타의 공방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오데마 피게에서 일하게 된다.


필립 듀포는 시계학교를 졸업한 후 시계 관련 직업을 시작했지만 1978년 32살에 독립하여 시계 수리점을 설립한 후 경매 회사인 엔티쿼럼의 시계를 수리하면서 시계 기술에 눈을 뜨게 된다. 시계를 수리하면서 자신이 수리한 시계들 중 인상적인었던 시계를 카피하며 시계 기술을 배우게 된다. 수리 의뢰가 없는 여가시간에 20세기 초 발레 드 쥬에서 제작된 그랜드 소네리 회중시계(루이 엘리제 피게)의 영향을 받아 회중시계용 그랜드 소네리 무브먼트를 제작하여 자신의 마지막 직장이자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에 관심이 있던 오데마 피게를 찾아간다. 예상대로 오데마 피게로부터 5개의 주문을 받아 1982년 납품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몇 년간 공들여 만든 시계를 함부로 다루던 오데마 피게 직원의 부주의로 파손된 2개를 수리하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는 자신의 시계를 브랜드에 팔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시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co4.png 필립 듀포의 회중시계와 손목시계 그랜드 소네리, 듀얼리티와 심플리시티


그 이후 시계 제작보다는 시계 수리에 전념하게 되지만 시계 제작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1980년대 중반 CAD를 배워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손목시계 무브먼트로 설계하고 이를 전문 제조업체에 의뢰하여 제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1980년대 중반은 컬렉터들의 시계 수집이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변하던 시기이다. 이후 2년 반 동안의 노력을 통해 1982년에 개발했던 회중시계용 무브먼트를 등 규격으로 축소하고 이를 무브먼트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CAM 업체를 통해 부품들을 생산한 후 이를 피니싱하고 조립하여 1991년 그랜드 소네리를 손목시계로 만들게 된다. 시계가 완성된 1991년 친구의 추천으로 제랄드 젠타, 다니엘 로스 등 소규모 하이엔드 제작자들의 판매를 돕던 싱가포르의 고급 시계 리테일러인 아우어 글래스(Hour Glass)를 찾아가게 된다.


111a2.jpg 싱가포르의 하이엔드 리테일러 아우어 글라스


아우어 글라스는 필립 듀포가 제작한 프로토타입을 본 후 한 개의 제작만 의뢰하게 된다. 미니츠 리퍼터는 당시에도 리테일가(소비자 가격)으로 최저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으로 다량으로 판매될 제품은 아니었다. 필립 듀포는 아우어 글라스로부터 일부 선금을 받아 제품화한 시계를 1992년 바젤 페어의 AHCI 부스에 전시하여 3개의 추가 주문을 받게 된다. 시계 제조를 시작한 후 10년이 넘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계를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1996년에는 1933년 알버트 피게(1914-2000)의 회중시계를 참조하여 손목시계에서는 처음으로 시계의 정확성을 높이는 기술인 듀얼리티(밸런스 2개 배치)를 만들게 된다.


필립 듀포는 그랜드 소네리보다는 단순한 구조였던 듀얼리티를 25개 판매할 의도로 제조를 시작했지만, 높은 가격으로 판매가 어려워지자 9개만 제조한 후 조금 더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타임 온리의 수동 시계인 심플리시티를 착상하게 된다. 독립제작자들의 어려움이 느껴지는 문제이다. 무브먼트까지 모두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설계와 제조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어 높은 가격에 판매해야 하고 그 결과 판매는 부진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생을 같은 시계만 여러 개 만들어서는 아무런 즐거움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제품 사이의 본질적인 갈등이다.


co9.png 필립 듀포의 그랜드 소네리, 듀얼리티 그리고 심플리시티의 무브먼트


2000년 첫 제작한 심플리시티는 컴플리케이션을 포기하는 대신에 무브먼트의 피니싱을 극대화한 시계였다. 당시는 타임존 등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하우스 무브먼트에 이어 피니싱이 주요 주제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듀포의 심플리시티는 2001년 바젤 페어는 물론 타임존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단기간에 화제가 되면서 주문이 몰려들게 된다. 그 후 필립 듀포는 몇 년은 대기해야 하는 심플리시티 제조에 집중하게 되며 심플리시티는 2012년까지 200개 정도 제조되었다. 그중 120개가 일본의 시계 리테일러인 쉘만을 통해 판매될 정도로 특히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프랭크 뮬러와 폴 쥬른 등 AHCI 멤버들이 성공을 거두는 거점이 되어, 프랭크 뮬러 이후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 프랑소아 폴 쥬른(1957~)의 첫 부띠끄가 도쿄에 설립되게 된다.


111a12.png 프랑소와 폴 쥬른의 시계들


조지 대니얼스와 필립 듀포에서 보듯이 회중시계가 아닌 이상 수작업만으로 시계를 만드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어려운 일이다. 손목시계의 무브먼트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회중시계 무브먼트의 10배가 넘는 정밀도로 부품들이 제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AD의 도움을 받아 부품들을 컴퓨터로 제어되는 가공장치들로 만들어도 필립 듀포처럼 혼자서 피니싱해서는 1년에 10개도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시계 하나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3. AHCI


대니얼스처럼 시계의 모든 것을 작은 공방에서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나, 필립 듀포처럼 CAM으로 제작된 무브먼트의 부품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피니싱하는 방식 외에 조금 더 실질적인 방식이 있다. 많은 AHCI 멤버들이 이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스위스 대부분의 브랜드처럼 무브먼트 에보슈인 ETA, JLC, F. Piguet, Lemania의 무브먼트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일부 부품을 추가하여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시계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AHCI 멤버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칼라브라제 처럼 에보슈로 구할 수 없는 무브먼트는 자신이 만들고, 무브먼트보다는 다이얼의 독특한 컴플리케이션을 특징으로 하는 시계는 ETA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무브먼트까지 직접 만드는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의 방식은 시계 제조에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고가로 팔아야 하며 그런 장인적인 특징 때문에 제조 수량을 늘리기도 어려운 것이다. 몇 년에 한 개, 1년에 10개, 1년에 100개 등 제조하려는 수량에 따라 제조방식은 달라야 하는 것이다.


and2.jpg


스벵 안데르센(1942-)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4년간 시계수리점에서 수습기간을 보낸 후 1963년에 스위스의 루체른에 있는 고급 시계 리테일러이자 수리점인 구벨린(Gubelin)에서 일하게 된다. 1965년 구벨린이 제네바에 분점을 내자 제네바로 옮겨 근무한다. 1969년 27살에 취미 삼아 병 속에 클럭을 조립한 '보틀 클럭'을 제조했다가 '불가능을 만드는 시계기술자'로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파텍 필립의 컴플리케이션 조립팀에서 10년간 일하게 된다. 안데르센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와 달리 파텍 필립에서 10년간 시계 제조를 배운 경험을 가진 기술자이다. 비슷한 경우가 파텍 필립의 컴플리케이션팀에서 일하다가 쿼츠 혁명기에 파텍 필립을 그만두고 시계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며 공방을 운영하다가 50대 말에 창업하게 되는 로저 뒤비(Roger Dubuis: 1938-2017)가 있다.


1w4.png 로저 뒤비의 시계들


로제 뒤비보다 4살 어린 스벵 안데르센은 파텍 필립에서 로제 뒤비 밑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38살에 파텍 필립을 나와 시계수리점 겸 공방을 개업했다. 개업 초기 애뉴얼 캘린더와 퍼페츄얼 캘린더를 만들어 컴플리케이션 전쟁을 치르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에 팔아 자금을 모으게 된다. 이어 엔틱 시계들을 수리하면서 프레드릭 피게, ETA 등 에보슈를 베이스로 하여 수정한 개성적인 시계들을 만들어 판매하게 된다. 1989년에는 파텍 필립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월드 타임'을 만들게 되고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오토마톤'(자크마트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의 인형 시계)의 하나인 에로스 시계를 만드는 등 고객들이 원하는 다양한 시계들을 만들었다. 시계 수리를 병행하면서 40년간 1,500개 정도의 시계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ETA 등 에보슈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제조 수량이다.


공방을 운영하는 경우 시계만 만들어서는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우므로 시계수리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가지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노년의 대니얼스처럼 조수가 필요해진다. 안데르센은 시계 수리로 명성을 얻게 되자 시계 기술을 배우려는 후배들을 조수로 받아서 함께 작업하게 된다. 안데르센이 파텍 필립 박물관에 진열될 엔틱 시계들의 수리를 맡게 되었을 때 그의 공방에서 근무한 사람이 프랭크 뮬러였다.


des5.png AHCI 초창기 멤버들 좌측으로부터 폴 쥬른, 프랭크 뮬러 그리고 조지 대니얼스


AHCI 멤버 중 1980년대 중반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칼라브라제와 안데르센은 자신들처럼 독립적으로 소량의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을 모아 브랜드들이 참여하는 각종 전시회에 참여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칼라브라제와 스벵 안데르센이 1984년 신문 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하여 출발한 AHCI의 시작이었다.



4. 프랭크 뮬러의 화려한 등장과 몰락


and14.png 프랭크 뮬러와 비르탄 시르마케


1986년의 초창기 AHCI 멤버로 시작하여 1992년 투자자를 모아 브랜드를 창업하여 2000년대 워치 랜드와 프랭크 뮬러 그룹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 프랭크 뮬러이다.


프랭크 뮬러(1958~)는 쿼츠 혁명이 절정에 도달한 1980년대 초 제네바의 시계 학교를 졸업하고, 고급 시계 수리점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어 스벵 안데르센이 파텍 필립 박물관의 시계수리를 담당하게 되자 함께 일하면서 파텍 필립의 시계들에 익숙해진다. 1984년 투루비용으로 첫 시계로 만들게 되어 26살에 컬렉터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조지 대니얼스, 필립 듀포나 안데르센에 비해서 매우 젊은 나이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1cr9.png 1987년 미니츠 리피터와 1990년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1980년대에 투루비용이 주요 브랜드에서 등장한 것이 1986년 오데마 피게, 1988년의 브레게, 1989년의 블랑팡, 1990년의 IWC인 것을 고려하면 프랭크 뮬러가 손목시계로 투루비용을 1984년에 처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프랭크 뮬러가 본격적으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흐름을 상당히 정확히 읽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86년 이후 시르마케와 동업하여 브랜드로 출범하기 전인 1992년까지 6년간 프랭크 뮬러는 투루비용, 미니츠 리피터,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등 블랑팡이나 IWC와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매년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AHCI멤버 중 가장 적극적으로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계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린 나이부터 벼룩시장에서 골동품 시계를 구입하며 시계와 인연을 맺은 프랭크 뮬러는 자신이 직접 무브먼트를 만드는 대신 미니츠 리피터며 크로노그래프 등 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이름 없는 장인들의 무브먼트를 구해 시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등장하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들은 조지 대니얼스, 필립 듀포, 그의 스승인 스벵 안데르센의 시계들과 달리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과 비교할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무브먼트나 다이얼, 케이스를 만들 시간에 이를 개별적으로 주문하여 완성도 높은 시계를 만드는 19세기 제네바 캐비노체의 전통에 가장 익숙한 인물이었다. 1986년 이후 등장하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들은 무브먼트, 케이스, 다이얼까지 당시 AHCI 멤버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do3.png 프랭크 뮬러의 1980년대 수동 크로노그래프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을 주문 생산하면서, 프랭크 뮬러는 파텍 필립을 수리하면서 익숙해진 파텍 필립의 디자인들을 모방한 크로노그래프 시계들을 판매하게 된다. 파텍 필립의 고가의 제품군인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좋아하는 고객들을 위해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무브먼트인 레마니아 1823을 사용하여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판매하여 인기를 얻는다. 프랭크 뮬러가 작은 공방을 운영하던 시기에 만든 시계들은 소량의 투루비용과 미니츠 리피터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크로노그래프들이다. 컴플리케이션 붐이 일던 시기였고,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을 구입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컬렉터들에게 크로노그래프가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fr3.png 프랭크 뮬러의 1986년 투루비용과 1991년 생트레 커벡스


프랭크 뮬러는 컬렉터들에게 크로노그래프를 만들어 팔면서 주문을 받아 투루비용이나 미니츠 리피터를 소량 제조했다. 1986년에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투루비용의 디자인으로부터 당시 쇼메에 의해 재등장한 브레게의 디자인이 보이기도 한다. 1991년에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는 생트레 커벡스(Cintrée Curvex)는 퍼페츄얼 캘린더 리피터 모델인데 이후 프랭크 뮬러를 유명하게 만드는 시계이자 큰 시계 유행을 가져온 중요한 시계였다. 프랭크 뮬러는 1987년에 생트르 커벡스 첫 모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객의 주문을 받고 제작을 시작하던 시기라 프랭크 뮬러가 초창기에 만든 시계들에 대한 자료는 경매에 등장하기 전에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경매시장에 간혹 등장하는 당시 그가 만든 일부의 시계만 보더라도 20대의 젊은 시계 제작자로서는 적지 않은 주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계 케이스나 다이얼 디자인에서 젊은 나이 답지 않은 세련됨도 나타난다. 조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의 경력을 감안하면 20대의 독립 시계 제작자인 프랭크 뮬러는 제네바에서 일을 시작한 장점을 활용하여 스위스의 무브먼트, 케이스, 다이얼 제조 업체들과 폭넓은 관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랭크 뮬러는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들이 시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프랭크 뮬러가 시도한 시계 제조 및 판매 방식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활동한 시계 분야의 아이작 뉴턴인 아브라함 브레게가 시계를 만들던 방식이었다.


bre5.png


아브라함 브레게의 전문가였던 조지 대니얼스는 브레게에 대한 책을 'Art of Breguet'라는 제목으로 저술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그가 오랫동안 자료를 모은 아브라함 브레게가 활동하던 당시에 프랑스와 스위스 전역에 걸쳐 그의 아이디어와 스케치만 전달하면 그대로 시계를 만들어줄 최고의 기술을 가진 수 백명의 네트워크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덕분에 아브라함 브레게는 마리 앙뜨와네트와 만나는 등 프랑스의 살롱문화로 대표되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인맥을 넓히면서도 조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량의 시계들(클럭과 회중시계)을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q4.png 아브라함 브레게의 노트


시계의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아브라함 브레게(1747-1823)가 활동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유명한 와치메이커들은 거의 대부분 아브라함 브레게를 위해 일하던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창업자이자 브레게보다 16살이나 많았던 쟝-마르크 바쉐론(1731-1805)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 브레게가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프랑스 백과전서 시절에 명문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서 공부한 지식인으로 프랑스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쟝-폴 마라의 절친이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시계 공방에서 시계 기술을 배운 기술자였으나, 타고난 예술가였고 한편으로는 탁월한 사업가였던 르네상스적인 천재였다. 율리스 나르당의 외슬린에 루이 카르티에와 피에르 카르티에를 합쳐놓은 듯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노트를 보면 그가 만든 모든 시계들은 그가 설계한 시계들이다. 그 시절에 완성된 시계들은 루이 카르티에가 집요하게 추구했던 디테일한 부분까지 완벽했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을 지휘하면서도 그는 피에르 카르티에 이상으로 대인관계에 집중했던 것이다. 당시 모든 유럽의 왕실들이 그의 고객이었다.


율리스 나르당의 외슬린처럼 브레게 역시 조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처럼 직접 시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든 시계들은 그의 아이디어와 설계를 통해 제조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 브레게는 탁월한 시계 설계자이자 예술가였지만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와 같은 장인은 아니었다. 그 덕분에 그는 마린 크로노미터, 무수한 신기술들을 적용한 클럭, 현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컴플리케이션은 물론 최초의 슈퍼 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와 나폴레옹의 여동생(나폴리의 여왕)이 주문한 손목시계까지 만들게 된다. 한 번 주문받은 시계를 몇 년 혹은 몇십 년이 걸려 주문자가 죽은 후에라도 만들고야 마는 역사도 아브라함 브레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111a1.png 아브라함 브레게와 그가 만든 마린 크로노미터와 심퍼티크 클럭


아브라함 브레게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어도 그의 이름이 하이엔드 브랜드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시계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 치고 브레게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다만 시계 경매 기록에서 아브라함 브레게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않는 이유는 그의 대표적인 시계들이 대부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 대니얼스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애트우드의 박물관처럼 브레게의 대표작들을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문을 닫게 되어 그 소장품들이 크리스티나 소더비에 등장하게 되면 시계 경매 기록에 등장하는 최상위 시계들은 여러 번 변하게 될 것이다.


111a15.png 브레게의 슈퍼 컴플리케이션 '마리 앙뜨와네트'와 이슬람 박물관의 도난 현장 사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나 미켈란 젤로의 조각들이 경매 기록에 등장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아브라함 브레게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것이 '마리 앙뜨와네트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이다. 모든 슈퍼 컴플리케이션의 원조나 다름없는 시계이다. 이 시계는 영국의 브레게 전문 컬렉터였던 데이비드 솔로몬스의 소장품으로 그의 딸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슬람 문화를 연구하던 그의 딸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건립한 이슬람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당시 조지 대니얼스 등이 문화재급인 솔로몬스의 컬렉션이 영국에서 이스라엘로 옮겨지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까지 했다고 한다. 시계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으므로 조지 대니얼스의 노력은 무산되고 이슬람 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리고 1983년 영화에나 등장할 만한 계획적인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이 시계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범인의 내연녀가 이를 박물관에 판매하려다 체포되면서 박물관으로 되돌아간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사립으로 운영되던 이슬람 박물관이 운영자금이 부족하여 소장하던 브레게 작품 3개를 경매하려고 하자 이스라엘 문화청에서 국보급인 브레게의 시계들을 지키기 위해 범정부적인 활동을 통해 경매를 중단시킨 역사도 가지고 있다.


1111a.png 프랭크 뮬러에 의해 1992년 완성된 로드 애런의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한편, 1989년 프랭크 뮬러는 엔티쿼럼 경매에서 1898년에 만들어진 루이 엘리제 피게가 만든 32밀리의 소형 리피터 무브먼트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브먼트를 이용하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기 위해 투자자를 찾게 된다. 영국의 로드 애런이 프랭크 뮬러의 계획에 관심을 보여 투자를 하자 프랭크 뮬러는 이 무브먼트에 퍼페츄얼 캘린더를 추가하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1992년에 바젤 페어에 전시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이런 역사를 보더라도 젊은 프랭크 뮬러는 시계를 제조하기 전에 그 시계를 구입할 고객부터 찾은 후에 자금 지원을 받아 시계를 제조하고, 이를 AHCI 전시회에 전시한 후에 구매자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뮬러가 만든 로드 애런의 시계는 AHCI멤버가 만들어 판든 첫 번째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였다. 이를 통해 프랭크 뮬러는 AHCI멤버들 중 컴플리케이션에 대한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젊은 독립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2q2.png 폴 거버에 의해 2013년에 완성된 로드 애런의 컴플리케이션과 기네스북 인증서


당시 부품 수로 가장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이었던 이 시계의 주인 로드 애런은 곧 깨질 것으로 보이는 이 계획을 투루비용과 스픓릿 크로노그래프 등을 계속해서 추가하기 위해 취리히에서 공방을 운영하던 다른 AHCI 멤버이자 마이크로 메카닉의 대가인 폴 거버에게 의뢰하여 최종적으로 부품 1,116개로 구성된 가장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무브먼트 제조에 참가한 Piguet/Muller/Gerber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고, '슈퍼비아 휴마니타티스'(인류의 자부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aaa1.jpg 에테르타스 메가 4


그러나 이 기록은 결국 프랭크 뮬러에서 2010년에 발표한 '에테르타스 메가 4(Aeternitas Mega 4)'(부품수 1,483개)에 의해 깨지게 된다. 부품수를 기준으로 현재까지 가장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은 프랭크 뮬러의 시계이다. '에테르타스'는 라틴어로 '영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영원히 1위의 자리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 한 개만 만들어져 판매 가격이 250만 달러인 시계다.


1986년 AHCI의 초기 멤버로 가입하여 AHCI의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폴 쥬른과 함께 가장 젊은 제작자였던 프랭크 뮬러는 전시하는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이 많았으므로 가장 눈에 띄는 제작자였다.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고객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고 파티를 좋아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재능도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랭크 뮬러보다 2살 많은 Vartan Sirmakes(1956-)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18세에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하여 보석 세공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집안이 부유했는지 세공사 자격을 얻자마자 제네바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귀금속 제품을 제조하다가 동업자와 함께 시계 케이스를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프랭크 뮬러도 제네바에서 자신의 공방을 열고 있었고, 바젤 페어를 비롯하여 시계 전시회는 보석 전시회와 같이 열렸으므로 1980년대 중반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제조된 프랭크 뮬러의 세련된 시계 다이얼이며 시계 케이스를 보면 프랭크 뮬러가 만든 시계 케이스의 일부를 시마르케가 제조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보석공방에서 시계 케이스 제조로 사업을 확장했던 시마르케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보고 투자자들을 모집하여 컴플리케이션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프랭크 뮬러의 이름으로 시계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1992년 프랭크 뮬러는 바르탄 시르마케와 'Franck Muller'를 전 세계 81 개국에 상표 등록하고 Franck Muller S.A.를 설립하게 된다.


1cr4.png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

프랭크 뮬러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롤렉스의 본사 등이 위치하여 스위스 시계 중에서도 최고급 시계라는 이미지를 가진 '제네바'를 다이얼에 표기하고, 케이스백에는 1992년 엘리제 피게의 무브먼트를 퍼페츄얼 캘린더로 수정하여 얻은 명성을 활용하여 '컴플리케이션의 마스터'(Master of Complications)'이라는 문구를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11q12.png 프랭크 뮬러의 월드 프리미어


창업 직후인 1993년부터 '월드 프리미어(World Premiers)' 라인을 통해 매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여 컴플리케이션의 프랭크 뮬러라는 이미지도 유지해 나갔다. 프랭크 뮬러의 투루비용 등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은 월드 프리미어 라인에 속하는 시계들이다.


11q5.png 바쉐론 콘스탄틴의 토노 시계, 그루엔의 커벡스, 카르티에 탱크 생트레


프랭크 뮬러와 시마르케는 창업 첫해에 '생트레 커벡스'를 상표로 등록하며 대표 제품으로 개발하여 귀금속 제품을 중심으로 300개를 판매한 후, 이듬해에는 스테인리스의 엔트리 모델까지 출시하며 3,500개를 판매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다. 1992년 생트레 커벡스의 디자인에 매력을 느낀 미국 리테일러가 프랭크 뮬러 전문 매장을 차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 프랭크 뮬러는 생트레 커벡스 모델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노 스타일은 사각 시계와 함께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디자인으로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에서도 많이 만들었던 손목시계의 고전적인 디자인의 하나였다.


프랭크 뮬러는 키르티에의 생트레를 토노 스타일로 변경하면서 그루엔의 상표였던 커벡스를 조합하여 '생트레 커벡스'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는 단순한 모방만은 아니었다. 프랭크 뮬러의 생트르 커벡스는 1920년대의 토노 디자인이나 카르티에의 생트레와 달리 매우 입체적인 디자인이었다. 더구나 프랭크 뮬러는 35 밀리 정도가 한계로 느껴지던 정장용 시계를 길이를 기준으로 40 밀리 정도로 큰 시계를 만들었다. 길이는 길지만 폭은 30 밀리대로 좁아서 40밀리가 넘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큰 시계이면서도 커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더구나 손목에 밀착감을 주도록 시계에 곡면을 만드는 그루엔의 커벡스 혹은 카르티에의 생트레 디자인을 도입하여 케이스가 곡면을 이루어 큰 시계이면서도 착용감도 좋아졌다. 그 결과 시계 케이스는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매우 입체적인 3D 디자인의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다이얼의 디자인도 카르티에의 탱크 생트레 같은 엄숙한 로마 다이얼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면서도 카르티에의 비율 정도로 디자인되었다. 비슷한 비율로 축소되었지만 프랭크 뮬러의 다이얼의 느낌은 카르티에의 다이얼보다도 자유분방한 현대적인 분위기로 변했던 것이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할 시기에 새로운 것을 찾던 부유한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모든 개성을 가진 시계였다. 영국 출신의 팝스타인 엘튼 존, 배우인 스왈츠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데미 무어 같은 유명인들이 이를 자비로 구입하여 차고 다니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cr14.png 프랭크 뮬러의 롱아일랜드, 마스터 뱅커와 크레이지 아우어


기본적인 콘셉트가 정해지자, '카사블랑카'(1998), 토노 디자인을 사각형으로 변경한 '롱아일랜드'(2000), '마스터 뱅커'(1996), 시계 다이얼의 숫자를 뒤섞어 놓고 시침이 해당 숫자를 찾아가는 '크레이지 아우어'(2003) 등 프랭크 뮬러는 시계의 기능에 따라 오메가에서 파텍 필립 가격의 시계를 폭넓게 제조하면서도 다른 브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을 가진 시계들을 매년 발표했다. 마스터 뱅커는 다이얼에 3 타임존을 설치하여 기존의 2 타임존 혹은 파텍 필립의 월드 타임보다 단순하면서도 사용이 편리한 시계로 명성을 얻게 된다.


111a6.png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백스와 플레티늄 로터 (ETA 2892)


1986년 AHCI 설립 멤버로 바젤 페어 등 전시회에 익숙했던 프랭크 뮬러는 전시회에서는 월드 프리미어의 컴플리케이션 위주로 시계들을 발표하고, 리테일러를 통해서는 스테인리스 케이스에 ETA를 사용한 엔트리 모델들은 물론 18K 모델에는 다른 수정을 하는 대신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이 18K 예로우 골드를 사용하던 로터를 플레티늄으로 변경하여 공급했다. 시계 다이얼에는 로터의 재질인 'Platinum Rotor'라는 표기도 했다. 그러나 시계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컴플리케이션이나 스테인리스의 엔트리 모델이나 차이가 없었다.


재질이나 구성을 일부 바꾸더라도 같은 디자인으로 가장 저렴한 엔트리 모델과 최고가 모델을 판매하는 것이 대중적인 하이엔드의 성공 요건이라는 것은 카르티에와 프랭크 뮬러의 역사로부터 확인된다.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엔트리 모델이 중요한 이유이다. 안정된 판매량과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샐러리맨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가격이 하이엔드의 엔트리(입장권) 모델이며 이를 통해 매년 매출과 순익을 늘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frr1.png 프랭크 뮬러의 와치 랜드

브랜드를 출시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매년 매출이 급성장하자 개업 10년 만인 2001년에는 제네바 교외의 레만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낡은 성을 수리하여 Frank Muller Wachland를 설립하게 된다.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문화공간처럼 꾸민 것이다. 프랭크 뮬러와 시마르케의 사업 스타일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2005년에는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판매량을 넘어 연 5만 개의 시계를 판매하며,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대형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표들인 프랭크 뮬러와 시르마케의 분란, 로저 뒤비를 필두로 프랭크 뮬러의 성공에 편승하려는 브랜드들의 me-too 전략, ETA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시계들에 대한 논란 등으로 프랭크 뮬러의 이미지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급격히 하강하게 된다.


2003년 4월 와치 랜드에서 월드 프리미어의 레볼루션(Revolution) 2를 발표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프랭크 뮬러는 그 해 여름 동업자이자 자본가인 시마르케와 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 당시에 알려졌던 이유는 시르마케가 주도한 European Company Watch와 Pierre Kunz 등 자회사 설립과 관련한 경영상의 트러블이었다. 이후 몇 번의 소송을 통해 결국 대주주인 시마르케가 프랭크 뮬러를 퇴출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시르마케는 프랭크 뮬러를 대신할 인물로 파텍 필립 출신으로 프랭크 뮬러와 비슷한 스타일의 시계를 만들던 Roger Dubuis S.A.를 인수하여 로제 듀비를 브랜드의 새로운 얼굴로 영입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시르마케의 시도는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고 로저 뒤비는 또 다른 내홍을 겪으며 2017년 리치몬트에 합병되게 된다.


kun4.png 피에르 쿤츠와 그의 리트로 그레이드


한 동안 Franck Muller S.A.를 대표하는 얼굴은 프랭크 뮬러가 발표한 복잡 시계와 무브먼트를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던 피에르 쿤츠(Pierre Kunz)였다. 그러나 프랭크 뮬러만 한 인지도가 없었던 쿤츠는 프랭크 뮬러라는 대형 브랜드의 대표자가 될 사교성이나 사업적 재능이 부족했던 것 같다. 결국 시르마케는 프랭크 뮬러를 얼굴 마담으로 재영입하게 되고 현재까지 그런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그 후 2000년대 말까지 프랭크 뮬러 그룹은 Franck Muller Geneve, Pierre Kunz, European Watch(ECW), Martin Braun, Rodolphe 및 Alexis Bathelay(구찌 시계의 분더만이 취직했던 회사) 등이 소속된 시계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프랭크 뮬러와 시르마케의 갈등과 소송 과정들이 자주 뉴스로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이 다른 브랜드로 옮겨가며 점차 매출이 줄어들게 된다. 한 때 800 명에 육박했던 직원을 250 명 정도로 줄이는 구조조정도 해야 했고, 현재는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한때 빤짝했던 브랜드로 잊혀 가고 있다. 스위스의 전통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판매량과 영업이익을 넘어서던 20 년 간의 화려한 성장시대가 하향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and22.png 로저 뒤비와 카를로스 디아즈


프랭크 뮬러에서 디자인을 담당하던 카를로스 디아즈는 1995년 프랭크 뮬러를 그만두고 파텍 필립 출신의 로저 뒤비(1938-2017)와 함께 프랭크 뮬러와 시르마케가 창업한 방식으로 로저 뒤비의 이름을 브랜드로 하여 하이엔드 브랜드를 창업하게 된다. 로저 뒤비는 1950년대에 론진에서 근무하다가, 그 후 파텍 필립에서 14년간 근무한 후 은퇴하여 1980년부터 제네바에서 시계 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개인 공방을 열게 된다. 그리고 다른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컬렉터들에게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만들어 판매도 하면서 1980년대에 퍼페츄얼 캘린더 등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여 이를 필요로 하는 브랜드들에 그 기술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율리스 나르당과 자크마트 미니츠 리피터 납품 계약을 했던 크리스토퍼 클라레(1962~)도 로저 뒤비의 공방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에 오메가, 피아제, 쇼파드 등 컴플리케이션과 무관한 브랜드들이 퍼페츄얼 캘린더를 발표하게 된 과정에는 로저 뒤비, 스벵 안데르센 같은 인물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aa3.png 제네바 씰(Geneva Seal)


스위스 하이엔드의 출생지인 제네바를 베이스로 하면서 프랭크 뮬러와 달리 파텍 필립과 바세론 콘스탄틴처럼 모든 무브먼트에 제네바 씰을 받는 하이엔드 전략으로 출발한다. 이를 위해 범용 무브먼트인 ETA는 사용하지 않고 엔트리 모델도 프레드릭 피게, 레마니아, JLC의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제네바 씰의 요건을 충족하도록 피니싱된 시계를 만들게 된다. 제네바 씰은 제네바에서 제조되는 것을 조건으로 무브먼트의 구조 및 피니싱에 대한 요건을 만족하는 무브먼트에 사용하는 각인이다.


2000년대 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하우스 무브먼트와 피니싱 논쟁이 벌어지자 파텍 필립의 전략에 맞추어 모든 무브먼트를 인하우스 무브먼트로 제조하면서 전량 제네바 씰을 받아 프랭크 뮬러 상위 호환의 하이엔드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회사 운영에 대한 의견 차이로 지분이 적었던 로저 뒤비는 2011년에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되고 '로저 뒤비'는 디아즈의 개인 회사가 되었다. 그 후 인하우스 컴플리케이션 개발과 제네바 근교에 일괄 생산 시설을 설립하는 등 프랭크 뮬러를 넘어서는 과도한 투자로 파산하며 2017년 리치몬트에 인수된다.


keyword
이전 10화컴플리케이션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