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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플리케이션 전쟁

율리스 나르당의 도전과 파텍 필립의 세대교체

by 링고

1. 컴플리케이션 전쟁과 율리스 나르당의 등장


blanc3.png 블랑팡과 IWC의 슈퍼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진행된 얇은 시계 전쟁에 이어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비버의 블랑팡과 블륌레인의 IWC가 중심이 되어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진행된다. 이 기간 동안 율리스 나르당은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얇은 시계 전쟁이 끝나고 컴플리케이션이 주목을 받자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은 물론 피아제, 오메가 등 컴플리케이션에 관심이 없던 브랜드들에서도 퍼페츄얼 캘린더가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퍼페츄얼 캘린더는 세이코에서 쿼츠 시계로도 판매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bl5.png 피아제, 오메가, 세이코의 퍼페츄얼 캘린더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을 인수한 롤프 쉬나이더는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시계 기술을 배운 루드윅 외슬린과 만나 블랑팡과 IWC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외슬린의 천문 클럭에 대한 경험을 컴플리케이션의 제조에 도입한 독특한 브랜드 율리스 나르당의 재창업 과정과 천문시계 삼부작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자.


sag6.png 마린 크로노미터


1983년 롤프 쉬나이더(Rolf Schcyder, 1935-2011)는 스위스의 생 모리츠로 잠시 귀국하여 스키를 타다가 율리스 나르당이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이를 인수하게 된다. 율리스 나르당(1846~)은 스위스에서 거의 유일한 마린 크로노미터 전문 브랜드였다. 현대의 GPS와 전자기술이 개발되기 전 수백 년간 지구상에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한 기술로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개발된 가장 정밀한 시계가 마린 크로노미터였다. 시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기술들은 마린 크로노미터 개발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마린 크로노미터의 제조는 오랫동안 영국이 중심지였고 다. 마린 크로노미터 전문기업이었던 율리스 나르당은 전자 기술이 마린 크로노미터를 대체하게 된 20세기부터는 크로노미터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제조하는 소규모 브랜드였다.


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쉬나이더는 1956년 제네바에서 JLC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 1957년 신문에서 스위스의 무역회사에서 태국에서 근무할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다. JLC에서 근무했던 경력 때문에 시계 판매부서에 배치되어 스위스 시계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태국에 가게 된다. 쉬나이더는 유럽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태국, 라오스, 발리, 캄보디아, 베트남을 탐험하게 된다. 1966년 6개월간 남아시아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탐험을 떠나 미국의 필립 모리스에서 동남아시아의 담배 시장을 개척하는 업무 계약을 하게 된다.


아시아로 돌아온 쉬나이더는 홍콩에 사무실을 차리고 문화혁명이 진행 중인 중국을 방문했다가 쫓겨나기도 한다. 필립 모리스의 업무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쉬나이더는 스위스에 있던 필립 모리스의 유럽본부를 방문하여 다이얼 제조 회사를 운영하던 파텍 필립의 사촌들과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태국에 살았던 쉬나이더는 손재주가 좋은 태국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면 저렴한 노동력으로 품질 좋은 다이얼을 공급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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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쉬나이더는 스위스와 아시아의 투자자들을 모아 Cosmo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태국에서 다이얼과 케이스를 제조하는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Mido, Rado, 티솟, 포티스 등으로부터 계약을 따낸 쉬나이더는 사업에 성공하지만 투자자들과의 갈등으로 지분을 팔아 1973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새로운 공장을 열게 된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경제개발을 위해 10년간 수입원자재에 대한 면세 정책이 시행 중이었다. 스위스에 연락 사무실을 차린 쉬나이더는 사무실이 ASUAG 근처였으므로 사장인 에른스트 톰케와 만나 동남아시아에서 ETA에서 개발한 쿼츠 모듈의 일부를 제조하는 계약을 따게 된다. ETA에서 자동생산이 가능한 쿼츠 무브먼트의 생산을 동남아시아와 홍콩에서 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68년부터 시작한 시계 관련 사업이 호황을 누리며 재산을 모은 쉬나이더는 다소 늦은 48세에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시계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중국과 인도에 익숙했던 쉬나이더는 인구가 많은 이 지역에서 수리가 어려운 쿼츠 시계보다는 시계방에서 수리가 가능한 기계식 시계를 선호한다는 것에서 기계식 시계가 부활할 가능성을 느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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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스 나르당은 그 무렵 회사의 대표 제품인 마린 크로노미터를 제조하고 수리하기 위해 시계 기술자 한 명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스위스 시계 업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70년대 말부터 시계 브랜드들에서 근무하던 시계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기계식 시계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여러 스위스 회사들에 다이얼과 시계 케이스를 공급하던 쉬나이더는 컴플리케이션이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리스 나르당의 계약직 직원으로 스위스의 전통기술자들에 익숙하던 장-자크 할디만의 추천을 받아 루체른을 방문하게 된다. 루체른에 스포에링이라는 나이 든 기술자가 새로운 투루비용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스포에링의 공방을 방문하여 컴플리케이션 개발에 대해 상담하러 방문했던 쉬나이더는 공방에서 신기하게 생긴 대형 천문 클럭을 발견하게 된다.


클럭에는 '아스트롤라븀(Astrlabium)'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럽의 교회에서나 보던 천문시계에 흥미를 느낀 쉬나이더는 그 시계를 제작한 사람에 대해 물어보게 되고, 스포에링은 자신에게 시계 기술을 배우고 있는 루드비히 외슬린을 소개해 주게 된다. 당시 베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천문 클럭을 개발하던 외슬린과 3주 후에 만나게 된 쉬나이더는 외슬린에게 천문 클럭을 손목시계로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묻게 된다. 다소 황당한 질문에 외슬린은 '만들 수 있긴 한데 그렇게 작은 걸 누가 삽니까?'하고 되묻게 된다. 쉬나이더는 '내가 사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sag4.png 롤프 쉬나이더와 루드윅 외슬린


루드윅 외슬린(1952~ )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역사학자이자 시계 기술자이다. 이태리에서 태어나 1972년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고대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인문학을 전공하여며 1976년에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러나 외슬린은 졸업과 함께 공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학업을 계속하기에는 재능이 부족하게 느껴졌고 과연 학업을 계속해서 학자로 먹고사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보다는 기술을 배워 먹고살기로 결정하고 일대의 시계 샵들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수습 기술자로 근무를 시작하는 것이 16세 정도라 24살이었던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루체른에 위치한 스푀링의 공방에서 자리를 구하게 된 외슬린은 스푀링으로부터 클럭을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한편 시계 기술을 배우면서 학문적 호기심도 생긴 외슬린은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이면 시계 공방에서 클럭을 수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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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그는 로마 바티칸 도서관에 전시된 천문시계를 수리할 사람을 찾는 것을 알게 되어 로마로 간다. 1982년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외슬린은 도서관에서 천문시계에 대해 상세히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1983년 스위스로 돌아온 외슬린은 천문 시계의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로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푀링의 공방에서 천문시계의 기본이 되는 아스트롤라븀 클럭을 만들고 있었고, 율리스 나르당의 새로운 등장을 알릴 컴플리케이션의 아이디어를 찾아 스푀링의 공방을 방문했던 쉬나이더가 보게 된 것이다. 투루비용을 첫 제품으로 생각하던 쉬나이더는 외슬린이 스탠딩 클럭으로 만든 천문시계를 보자마자 이를 손목시계로 축소하여 손목시계에서는 등장한 것이 없는 천문시계를 컴플리케이션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tri3.png 율리스 나르당의 천문시계 삼부작


1985년 외슬린이 자신이 설계한 클럭을 손목시계로 축소한 '아스트롤라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표된다. 기존의 컴플리케이션과 전혀 다른 태양계의 행성들의 움직임을 다이얼에 재현한 독특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기네스북에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로 등재되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상업적 성공에 힘 입어 외슬린은 율리스 나르당에서 기술고문으로 일하며 1989년 플라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1992년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의 '천문시계 삼부작'(Trilogy of Time)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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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외슬린은 스푀링과 함께 독일의 시계 리테일러인 튈러의 의뢰를 받아 튈러의 상점에 전시할 천문 클럭을 만들게 된다. 1986년부터 10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외슬린이 스푀링에게서 시계 수리를 배우면서 천문시계의 대가로 성장한 후 스푀링과 함께 손목시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문시계를 클럭으로 표현한 중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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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슬린이 튈러의 천문 클럭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율리스 나르당의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쉬나이더는 1986년 젊은 크리스토퍼 클라레를 만나게 된다. 당시 미니츠 리피터 회중시계를 전시하고 있던 클라레에게 쉬나이더는 이태리 '산 마르코 성당'의 자크마트를 다이얼에 설치하는 미니츠 리피터 무브먼트를 의뢰하게 된다. 클라레는 20개의 주문을 받자, 오데마 피게를 그만두고 개업하여 자금에 어려움을 겪던 르노 & 파피를 찾아가 셋이서 CRP를 설립하여 1989년까지 율리스 나르당에서 주문한 물량을 제조하게 된다. 르노&파피에서 IWC의 의뢰를 받고 미니츠 리피터 모듈이 개발되던 시기이다. 이후 클라레는 르노&파피를 떠나 자신의 공방을 설립하게 된다.


bl20.png 산 마르코 대성당과 자크마트


자크마트(jaquemart)는 '종을 치는 인형'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교회의 대형 시계들에서 시보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이를 인형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장치였다. 쉬나이더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자크마트를 단순화하여 미니츠 리피터의 다이얼에 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규모 브랜드로서 기존의 컴플리케이션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여 기자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이 쉬나이더만의 독특한 마케팅이었다. 그 결과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은 컴플리케이션 경쟁에서 오데마 피게, 파텍 필립, 블랑팡, IWC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타입의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며 시계 잡지들과 리테일러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sag10.png 퍼페츄얼 루드비히


천문시계 삼부작과 자크마트 미니츠 리피터가 보여주듯이 쉬나이더는 다이얼을 통해 시각적으로 컴플리케이션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1996년 율리스 나르당의 창업 150주년을 기념하여 크라운 하나로 설정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퍼페츄얼 캘린더를 발표하며 시계의 이름으로 외슬린의 이름인 '루드비히'로 명명하게 된다. 퍼페츄얼 캘린더의 기능 중 날자를 표시하는 모든 기능을 디지털 방식의 작은 창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퍼페츄얼 캘린더로서는 다이얼상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일견 평범한 타임 온리 시계처럼 보이는 시계이다.


시계의 이름인 '퍼페츄얼 루드비히'는 외슬린의 이름을 시계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쉬나이더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시계를 출시한 적이 없다.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계 브랜드에서 설립자의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랜 관례이지만 설계자나 기술자의 이름을 모델명으로 사용한 것도 율리스 나르당이 처음이었다. 이 처럼 시계를 설계한 기술자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도 쉬나이더이다. 쉬나이더가 외슬린을 고용인이 아닌 사업의 동반자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 덕분에 쉬나이더와 외슬린의 동반자 관계는 쉬나이더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쉬나이더는 전통적인 시계 기술자와는 거리가 있는 외슬린를 통해 시계 개발과 디자인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짧은 시간 내에 율리스 나르당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창조하는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외슬린은 쉬나이더 덕분에 자신이 꿈꾸던 학자로서의 인생과 시계 설계자로서의 인생을 동시에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Ochs-und-Junior---Top-Image_Large500_ID-2235577.jpg ochs und junior의 퍼페츄얼 캘린더


외슬린의 인터뷰에 따르면 외슬린은 자신이 생각한 이런 단순한 구조의 컴플리케이션들을 쉬나이더에게 여러 번 제안했으나, 쉬나이더는 지나치게 단순하게 표현된 컴플리케이션의 제품화에는 완곡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스 나르당에서 다양한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을 설계한 외슬린은 최대한 단순화한 퍼페츄얼 캘린더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율리스 나르당에서 은퇴한 이후 기존의 컴플리케이션을 단순화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있다. 2006년 아들과 함께 'ochs und junior'라는 브랜드를 창업하여 활동 중이다. 평생을 동반자로 보냈지만 사업가와 기술자의 생각에 일정한 거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사업가에게 컴플리케이션은 그 가격에 합당한 복잡한 기술이어야 하는 것이고, 기술자에게 컴플리케이션이란 지속적으로 단순화되어야 할 기술적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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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스 나르당과 외슬린의 협동 작업은 2001년 프리크(Freak)의 발표로 정점을 이루게 된다. 기존의 이스케이프먼트 케이지만 회전하는 투루비용과 달리 시계의 무브먼트가 12시간에 한 번 회전하는 시곗바늘로 표현된 새로운 개념의 투루비용이었다.


한편 1983년부터 율리스 나르당의 기술고문으로 일을 시작한 후에도 외슬린은 스위스 대학들에 강의를 다니면서도 마스터 와치메이커 자격을 얻기 위한 공부를 계속하여 1993년에는 마스터 와치 메이커 자격도 획득하게 된다. 외슬린이 율리스 나르당을 떠난 것은 쉬나이더가 죽은 2011년이었다. 외슬린은 2011년 개관한 라쇼드퐁의 시계박물관의 큐레이터로 3년간 근무하며 MIH 등 다양한 시계 사업에 참여하게 되며, 2006년 아들과 함께 창업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쉬나이더가 75세로 죽자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말레이시아 출신의 차이 쉬나이더는 3년 후인 2014년 율리스 나르당을 구찌 그룹에 매각하게 된다.


2.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의 세대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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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가장 슬림한 퍼페츄얼 캘린더를 발표하여 컴플리케이션 경쟁을 시작했던 오데마 피게는 1986년 데릴리움의 구조에 착안하여 슬림한 자동 투루비용 손목시계를 개발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는 슬림함과 컴플리케이션의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며 컴플리케이션을 자동화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블랑팡이나 IWC처럼 퍼페츄얼 캘린더에서 시작하여 모든 컴플리케이션을 통합하는 슈퍼 컴플리케이션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오데마 피게에 의해 퍼페츄얼 캘린더와 투루비용의 자동화와 슬림화가 1986년까지 등장하며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투루비용은 아브라함 브레게에 의해 시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로 개발되었으나 투루비용으로 정확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으면서도 제조가 어려웠으므로 주요 브랜드에서도 크로노미터 경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량 만들어졌을 뿐 컴플리케이션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는 특수한 무브먼트였다. 오데마 피게, 블랑팡, IWC 등이 경쟁적으로 이를 컴플리케이션에 도입함으로써 투루비용은 특별한 부가적인 기능이 없으면서도 손목시계의 컴플리케이션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mag14.png 1984년 로열 오크 퍼페츄얼 캘린더


1980년대는 로열 오크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여 오데마 피게는 슬림한 자동 투루비용 발표 이후 컴플리케이션 개발보다는 로열 오크의 다양한 모델들을 출시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의 이런 결정이 르노&파피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던 소수의 브랜드 중 하나였으나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을 접게 될 무렵인 1984년에 시계학교를 졸업한 19살의 지울리오 파피가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울리오 파피(1965~)는 라쇼드퐁의 시계 학교에 유일한 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쿼츠 혁명이 진행되며 카시오, 시티즌, 세이코에 의해 이미 기계식 시계보다 저렴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가진 기계식 시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계들이 출시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기계식 시계 기술을 배우려는 학생은 더 이상 없었다. 다른 학생이 없었던 덕분에 지울리오 파피는 학교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1대 1 개인지도를 받게 된다. 1984년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만든 스켈레턴 시계를 가지고 오데마 피게에 면접을 보러 갔다. 지울리오 파피의 실력에 감탄한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에 입사한 지울리오 파피는 가장 고난도의 기술인 컴플리케이션 설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비버가 1970년대에 오데마 피게에서 먼저 경험한 것처럼 컴플리케이션 개발은 20년은 지나야 가능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울리오 파피는 선배인 도미니크 르노와 함께 1986년 르노&파피를 창업하게 된다. 그리고 IWC와 율리스 나르당의 미니츠 리피터를 시작으로 이후 카르티에, 샤넬, 해리 윈스톤, 프랭크 뮬러, 리샤르 밀의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and17.png 지울리오 파피(1965~ )


자금이 부족해진 도미닉 르노와 지울리오 파피는 1992년 오데마 피게에게 지분 52%를 넘기며 자본을 투자받으면서 오데마 피게의 무브먼트 개발과 다른 브랜드의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절반씩 담당한다는 계약을 체결하며 이후 컴플리케이션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기술자들의 사관학교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도미니크 르노는 1996년 자신의 지분(24%)을 오데마 피게에 팔고 르노&파피를 떠나게 된다. 이후 지울리오 파피가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어 1990년대 이후 주요 브랜드들의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하는 중심이 되었다. 현재 150명의 자체 기술인력을 가지고 최대 주주(76%)인 오데마 피게에게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공급하는 역할과 함께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브랜드인 리샤르 밀 등의 무브먼트를 설계하고 있다. 컴플리케이션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어 오데마 피게를 사직하고 컴플리케이션 공방을 설립했던 지울리오 파피는 오데마 피게의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전담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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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캘린더 모델을 시작으로 '식스 마스터 피스'를 차례로 발표하던 블랑팡이 투루비용을 발표한 것이 1989년이다. 이때 블랑팡의 투루비용 케이지를 설계한 것은 에드먼트 캡트가 아니라 벵상 칼라브라제였다. 이태리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시계 기술을 배웠던 벵상 칼라브라제(1944~)는 1977년 밸런스와 이스케이프먼트까지 일렬로 배열하는 독특한 일자형 무브먼트(스페이싱 )를 개발하여 제네바 발명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게 된다. 코룸에서 이 무브먼트를 구입하여 1980년 코룸의 'Golden Bridge'로 판매된다. 칼라브라제는 이 독특한 기술을 사용하여 부품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 이를 투명한 유리에 설치한 시계들을 제조하게 된다. 1985년 블랑팡의 자크 피게는 독특한 기술을 가진 칼라브라제에게 투루비용 케이지의 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1986년에 완성되어 블랑팡에 전달된 투루비용 케이지를 바탕으로 1989년 블랑팡의 수동 투루비용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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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블랑팡에서 시작된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1993년 IWC의 슈퍼 컴플리케이션과 1992년 프랭그 뮬러와 폴 거버가 루이 엘리제 피게의 리피터에 퍼페츄얼 캘린더와 투루비용 등을 추가하여 함께 시계를 만들며 슈퍼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를 발표하며 컴플리케이션 개발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프랭크 뮬러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블랑팡이나 IWC와 달리 회사가 아닌 개인 공방에서 만들어진 시계였으므로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프랭크 뮬러가 이후 자신을 '컴플리케이션의 황제'라고 자칭하게 된 이유이다. 1992년 제네바에서 보석 공방을 운영하던 시마르케스(1956~)의 지원을 받은 프랭크 뮬러는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출범하며 기계식 시계 부활과 함께 가장 성공한 AHCI 멤버로 성장하게 된다.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기능이 증가할수록 시계가 두꺼워져서 실생활에 사용하기 불편한 시계였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브랜드의 기술력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을 주기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Supercomplication-by-Patek-Philippe.jpg 파텍 필립 칼리버 89


한편, 파텍 필립은 컴플리케이션이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한 1970년대 말 쿼츠 개발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이전에는 루이 엘리제 피게와 빅토리안 피게 등 발레 드 쥬의 컴플리케이션 전문가들에게 의뢰하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최종적인 목표로 1989년의 150 주년을 기념하는 시계로 그레이브스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을 넘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를 자체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정규 제품으로 퍼페츄얼 캘린더와 크로노그래프를 판매하던 파텍 필립에서도 몇 년에 하나 팔리는 미니츠 리피터 손목시계는 빅토린 피게의 무브먼트에 의존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필립 스턴은 기존의 복잡 시계팀에 컴퓨터로 무브먼트를 설계할 인물을 영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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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피에르 무시는 뇌샤텔의 공과대학에서 마이크로 엔니지어링을 전공한 후 에보사 S.A.의 R&D팀의 설계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여기서 4년간 근무한 후 1977년 오메가의 SSIH로 옮긴다. 오메가에서 무시에게 주어진 업무는 1.35밀리의 쿼츠 슬림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장-피에르 무시는 얇은 시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jean-pierre-musy_rectangle.jpg 파텍 필립 기술감독 Jean-Pierre Musy


1980년 파텍 필립은 쿼츠 개발에 대한 투자에 이어 기계식 시계에서의 돌파구를 컴플리케이션에서 찾고 있었다. 한편 에드먼드 캡트가 시작했듯이 이 무렵은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방식인 CAD와 컴퓨터를 이용하여 부품들을 자동으로 생산하는 CAM 기술이 시작된 시절이었다. 이 무렵부터 대학에서 정밀 기계 기술을 배운 엔지니어들이 시계 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으로 그리는 설계 도면과 시행착오를 통해 무브먼트를 개발하던 전통적인 시계 기술자들을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는 엔지니어들이 대체하던 시기였다. 이후 무브먼트의 설계는 엔지니어들이 담당하고, 조립은 전통적인 시계 기술자들이 행하는 현재와 같은 업무분담이 이루어지게 된다. 필립 스턴은 당시 테크니컬 감독과 협의하여 컴퓨터 설계 기술에 능통한 무시를 영입하여 1989년의 150 주년의 기념 모델을 목표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던 R&D팀에 배치하게 된다. 파텍 필립 내에서도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노장들이 즐비하던 컴플리케이션팀에서는 컴플리케이션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는 젊은 엔지니어가 R&D팀의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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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사와 오메가에서 쿼츠 무브먼트 개발과 슬림 시계 개발에 참여했지만 컴플리케이션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Musy는 컴플리케이션팀의 노장들로부터 컴플리케이션에 대해 배워가며 이를 CAD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필립 스턴이 업무로 맡긴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에서 시계 기술이 아닌 마이크로 엔지니어링을 배운 젊은 기술자들로 자신의 소규모 팀을 구성하자 필립 스턴은 64만 달러를 투자하여 CAD와 CAM 장비를 구입하게 된다. 노장들의 회의적인 시각과 달리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그레이브스 제조 때와는 달리 파텍 필립의 자체 기술로 1984년에 칼리버 89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게 된다. CAD를 활용하자 회중시계 제조로 추친되던 컴플리케이션 기술 중 미니츠 리피터에 대한 기술을 손목시계 사이즈로 축소하고 자동 무브먼트로 개발하는 작업이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Musy는 이 무렵 미니츠 리피터의 소리에서 잡음을 제거하여 명료한 소리를 얻기 위해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던 발레 드 쥬의 기술자들도 찾아다니며 미니츠 리피터의 소리를 내는 핵심기술은 공(gong) 스프링의 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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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파텍 필립은 그레이브스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을 넘어서는 칼리버 89 회중시계 4개를 만들어 발표함과 함께 이때 개발된 자동 미니츠 리피터와 퍼페츄얼 캘린더를 결합한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자동 미니츠 리피터가 파텍 필립의 가장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을 구성하게 된다.


sag1.png 2001년 스카이 문 투루비용

이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Musy는 1990년 파텍 필립의 무브먼트 개발팀의 부책임자를 거쳐, 1993년에는 테크니컬 디렉터로 승진하며 1980년대 이후 파텍 필립의 기술을 책임지고 있다. 1996년 애뉴얼 캘린더 개발, 2000년 칼리버 89를 넘어서는 스타 칼리버 2000 회중시계와 2001년 양면시계인 스카이문 투루비용 등도 그가 테크니컬 감독으로 개발한 시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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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스카이 문 투루비용 개발을 마지막으로 Musy는 당시 롤렉스, 율리스 나르당, 지라드 페레고 등이 주축이 되어 진행 중인 기계식 시계의 한계인 오일을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실리콘을 밸런스 스프링과 이스케이프먼트 재료로 사용하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Musy는 대학에서 정밀 기계 공학을 전공한 후 쿼츠 혁명 시기에 시계 업계에 입문하여 CAD/CAM 기술을 이용하여 얇은 시계 경쟁, 컴플리케이션 경쟁과 실리콘 기술 경쟁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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