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IWC, Jaeger 그리고 Lange

by 링고

1. VDO


vd3.png VDO의 자동차 계기판용 측정장치


VDO(Vereinigte DEUTA - OTA)는 자동차용 태코미터, 스피도미터 등의 측정장치를 제조하는 독일 회사였다. 비행기에서 출발하여 자동차 계기판을 생산하던 야거(Jaeger)와 비슷한 회사이다.


알베르 켁(Albert Keck, 1928-2018)은 서독의 시계 중심지인 블랙 포리스트 지역에서 태어나 16살에 징병되어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종전 후 시계 기술을 배우게 된다. 이어 서독 지역 최대의 시계 회사였던 융한스에 근무하면서 푸르트방겐의 국립 시계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50년 그의 졸업작품은 그가 다닌 학교의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탁상용 클럭의 무브먼트를 만든 것이었다. 성적이 우수했던 알베르 켁은 교수의 추천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VDO에 입사하게 된다.


Albert_Keck1.jpg 알베르 켁(1928-2018)


VDO는 태코미터, 스피도미터 등 자동차 계기판에 필요한 장치들을 만드는 회사였다. 알베르 켁은 1956년 디자인팀의 수석 엔지니어가 되고 1966년에는 총책임자로 승진하게 된다. 1950년대에 자동차 계기판에는 자동차의 배터리를 이용하는 전기 클럭이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VDO는 쉬벤닝겐 지역의 클럭 제조회사들로부터 전기 클럭을 납품받아 사용했다. 독일의 쉬벤닝겐은 '블랙 포리스트(Black Forest)' 지역으로 서독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계 제조 중심지로 키엔즐, 카이저 등 전기 클럭을 만드는 회사들이 많이 있다.


1960년대에 라디오가 보편화되면서 계기판의 부정확한 시계가 문제가 되었다. 높은 온도와 자동차의 진동이 문제가 되었다. 하루 오차 1분 이상이어서 라디오 시보와 항상 틀린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좀 더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는 데, 클럭 회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시계학교를 졸업했던 알베르 켁은 VDO에서 자동차용 클럭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라디오 시보와 틀리지 않기 위해 시계는 당시 공급되는 전기 시계보다 100배는 정확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쿼츠 클럭이었다. 1960년대 중반 스위스와 일본에서 소형 쿼츠 클럭이 개발되어 있었지만 자동차 한 대 값에 육박하는 엄청난 고가의 클럭이었다. 자동차 계기판에 설치하려면 가격도 당시의 전기시계 가격인 10 마르크 정도로 저렴해야 했다. 그래서 알베르 켁은 네덜란드 필립스와 제휴하여 자동차에 사용할 소형 쿼츠 클럭을 직접 개발하게 된다.


qw7.png


소형 쿼츠 클럭의 개발에는 3천만 마르크를 투입하여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쿼츠 클럭 개발에 이 정도의 비용에 들었으므로 이보다 작은 손목시계용 쿼츠 무브먼트의 개발이 엄청난 규모의 사업이었던 것임을 이로부터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VDO의 쿼츠 클럭은 1969년 개발이 완료되어 시제품으로 1,000개의 클럭이 만들어졌고, 이듬해부터 대량 생산이 시작되었다. 1975년까지 기존의 전기 클럭 가격으로 쿼츠 클럭을 판매하는 회사는 VDO 뿐이었다. 그 결과 VDO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계기판용 클럭 제조업체로 성장하게 된다. 1985년까지 3천만 개의 계기판 클럭을 판매하게 된다.


이런 성공에 힘 입어 알베르 켁은 1974년 VDO의 사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이어 1978년에는 VDO의 회장이 된다. 이 무렵 쿼츠 혁명과 달러 대비 스위스 프랑의 높은 환율로 고전하던 IWC와 Jaeger LeCoultre(JLC)가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었다. 쿼츠 클럭으로 성공을 거둔 알베르 켁은 엄청난 수익을 바탕으로 소비자와 직접 상대하는 미래의 사업으로 IWC와 JLC를 인수하게 된다. 이 무렵 프랑스의 시계 회사 LIP도 인수 대상이었으나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한편, 2차 대전이 진행 중인 1943년 뉘렘베르크에서 태어난 귄터 블륌레인은 기계식 계산기와 클럭을 만드는 Diehl에서 직업 교육을 받게 된다. Diehl은 기계식 계산기를 제조 판매하는 회사로 1956년 서독 최대의 시계 회사인 융한스를 인수하여 기계식 클럭과 손목시계도 제조하고 있었다. 수습을 마친 후 성적이 우수했던 블륌레인은 회사의 지원을 받아 푸르트방겐의 국립 시계학교에 다니며 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1968년 학교를 졸업하고 엔지니어로 업무를 시작하지만 외국어 능력과 마케팅 감각이 인정되어 융한스의 마케팅과 판매를 담당하게 된다. 1970년대 융한스는 세계 최대의 시계 회사 중 하나였다.


1978년 IWC와 JLC를 인수한 알베르 켁은 1980년 학교의 후배이며 융한스의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블륌레인을 영입하고 이후 IWC와 JLC의 경영을 맡기게 된다.



2. IWC


qw10.png


당시 37살이었던 귄터 블륌레인(1943-2001)은 1982년부터 샤프하우젠에 위치한 IWC의 사장에서 시작하여, 1991년 샤프하우젠에 설립된 IWC와 JLC의 지주회사인 LMH(Les Manufacture Horlogères)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iw1.png


스위스의 완성품 시계 브랜드들은 바세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롤렉스처럼 제네바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시계 브랜드들에게 무브먼트를 공급하는 ETA로 통합되는 에보슈 업체들, 프레드릭 피게와 르 쿨트르 같은 하이엔드 무브먼트 전문 회사들은 제네바와 발레 드 쥬를 연결하는 레만 호수 근방에 위치한다. 비버가 다닌 로잔 대학은 발레 쥬 드에 위치한 대학이다. IWC가 통상적인 스위스 전통적인 브랜드들이나 에보슈 업체들과 멀리 떨어진 회사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는 것이 이해가 편할 것이다.


IWC(International Watch Company)는 1868년 창업자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하는 스위스의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들과는 달리 '국제 시계 회사'라는 명칭을 회사 이름으로 사용한 브랜드이다. 스위스에서도 1880년대에 창업자의 이름과 무관한 브랜드 네임이 허용되어 '론진', '오메가', '제니스' 같은 브랜드가 등장한 것보다 10년 이상 빠른 시기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시계 기업인 월쌈(Waltham)의 창업자 중 한 명이었으나 이런저런 갈등으로 분리되어 소량의 고급 시계(크로노미터)를 제조던 하워드(E. Howard Watch Co.)의 젊은 직원이었던 플로렌틴 제임스 존스가 스위스에 창업한 회사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량생산방식으로 스위스의 저렴한 노동비를 활용하여 회중시계를 만들어 미국으로 수입하려고 설립한 회사였다. 이 사업을 시작한 28세의 젊은 존스는 발레 드 쥬가 아닌 독일 국경의 샤프하우젠에 1868년 창업하면서 시작된다. 준비가 부족했던 존스는 3년 후에 도산하여 스위스의 홈버거 가문이 IWC를 인수되며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aaw3.jpg


IWC는 회중시계 시절부터 오메가, 론진, 제니스급의 고급 시계를 만들었다. 1944년 알버트 펠라톤(1898-1966)이 바쉐론 콘스탄틴을 그만두고 IWC로 옮겨 1966년까지 근무하면서 IWC의 대표적인 수동 무브먼트인 칼리버 89와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커트 클라우스(Kurt Klaus, 1934~)는 펠라톤의 기술감독이던 시절인 1957년에 입사했다.


aav5.png IWC Ref. 431 B-Uhr


쿼츠 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1939년 회중시계 무브먼트로 만들어 판매한 포르투기저(Ref. 325, 1981년까지 690개 판매), 영국 공군에 납품한 Mark 9, 10과 11, 독일 공군에 납품한 B-Uhr시계, 1954년 자동 무브먼트로 발매한 내자성 시계인 인제뉴어(Ingenieur)와 1967년에 발표한 다이버 시계인 요트클럽(Yacht Club)이 대표적인 시계들이었다.


1980년 당시 IWC의 상황은 1957년에 입사하여 근무하던 커트 클라우스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시계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자 IWC의 기술자들은 대부분 회사를 떠나 커트 클라우스는 혼자만 남은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무브먼트 개발은 중단되고 쿼츠 시계에 전념하던 시기였다. 또한 회사에 남은 기술자들도 임금을 줄이기 위해 일주일에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4일만 근무하고 있었다.


fav24.jpg 커트 클라우스(Kurt Klaus, 1934~)


IWC가 VOD에 인수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커트 클라우스가 기억하는 귄터 블륌레인은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믿으며 커트 클라우스가 개발한 퍼페츄얼 캘린더를 보여주자 제품화하라고 승인하고, 미니츠 리피터의 개발도 추진한 인물이었다. 블륌레인이 IWC의 사장으로 취업한 시기는 비버가 블랑팡의 상표권을 구입하여 블랑팡을 창업한 후 매년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발표하던 시절이다. 블륌레인이 IWC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IWC는 1970년대 말에 쿼츠 시계와 경쟁하기 위해 오데마 피게, 블랑팡, 파텍 필립 등에서 시작한 컴플리케이션 개발 경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5년 IWC의 기계식 시계 복귀작인 다빈치(Da Vinci)는 이런 과정을 통해 준비된 것이다. 얇은 시계 전쟁에 이어진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aqa1.png

한편, VDO에 인수된 1978년 IWC가 포르셰와의 협업으로 IWC-Porsche compass를 개발하게 된다. 그 무렵 자동 무브먼트 생산을 중단한 상태였고, 기존의 자동 무브먼트는 포르셰의 디자인에는 사용하기 어려운 두꺼운 무브먼트였다. 그런 이유로 창업 이후 100년 이상 무브먼트를 제조해 왔던 IWC에서 ETA 2892를 사용한 첫 시계였다. 그러나 얼마 후 시장의 추세에 맞추어 쿼츠 시계로 바뀌게 된다.


aav8.jpg


일본 혼다의 영향으로 가족이 사업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정책에 따라 포르셰 911과 904를 디자인했던 페르디난드 알렉산더 '부치' 포르셰(1935-2012)는 1972년에 '포르셰 디자인'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시계 디자인이었다. 1972년 포르셰 디자인의 시계는 Orfina와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IWC가 VDO로 인수된 직후인 1978년 오르피나와 결별하고 기술력이 더 우수한 IWC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IWC와 포르셰 디자인의 공동작업은 1978년에 시작되어 1997년까지 20년간 진행된 장기간 유지된 프로젝트였다. 가장 어렵던 시기에 도움이 되었던 사업이다. 이 시기에 포르셰 디자인과 IWC의 공동 브랜드 시계는 IWC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했다고 한다.


aqa3.png


포르셰 디자인과의 협업은 그 이전에 IWC에는 없었던 프로페셔널 다이버 시계를 개발하는 시발점이 된다. 1997년 포르셰 디자인과의 협업이 종료되자 IWC는 GST(Gold, Steel and Titanium) 라인을 출시한다. 올 티타늄 모델을 상징하는 라인이었지만, Porshe Design의 Ocean 2000의 후계자인 Deep One 등 프로페셔널 다이버 시계가 등장한 것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aqa13.png


이로써 IWC는 2000년대에 롤렉스 섭마리너, 오메가 씨마스터, 블랑팡 피프티 페이톰스와 경쟁할 프로페셔널 다이버 시계 디자인을 가진 주요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롤렉스, 오메가, IWC, 파네라이가 경쟁하게 되는 2000년대 큰 시계의 인기는 방수 성능을 극대화한 프로페셔널 다이버 와치가 출발점이 되었다. 얇은 시계 전쟁에 이어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벌어지고 다이버 시계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30~34밀리의 시계들을 밀어내고 40 밀리 이상의 큰 시계들이 보편화되는 시기로 변하게 된다.


fav42.png IWC Ref. 5250 회중시계와 Ref. 5251 포르토피노 손목시계


쿼츠 혁명이 진행되는 1970년대에 IWC의 손목시계용 무브먼트들의 생산은 중단되지만, 회중시계를 찾는 나이 많은 고객들을 위해 회중시계는 1980년대까지 소량 제조되고 있었다. 커트 클라우스가 개발한 문페이스 기능을 추가하여 1979년에 판매된 제품번호 5250의 문페이스 회중시계는 1984년 제품번호 5251의 손목시계로 형태만 바꾸어 발매되었다. 문페이스가 추가되어 20세기 초 대중적인 시계였던 타임 온리 회중시계와 구분되는 매력적인 시계로 변모되었다. 당시 특별한 이름 없이 판매되었다가 2011년 '포르토피노' 라인이 등장하면서 'Portofino'의 첫 모델로 인용되고 있다. 1980년대에 경쟁적으로 등장하는 컴플리케이션 중 문페이스의 역할을 보여주는 시계이다.


aqa7.png


당시 유행하던 LCD 쿼츠 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의 매력은 문페이스와 캘린더 기능을 통해 표현되었고 소비자들은 문페이스 다이얼을 통해 고급 시계식 시계의 매력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 캘린더 와치, 퍼페츄얼 캘린더 와치가 컴플리케이션 시대의 출발점이었던 이유를 보여주고 있다.


fav26.png Porsche Design-IWC의 쿼츠 무브먼트


1981년 포르셰 디자인이 티타늄 시계 개발을 원하면서, IWC는 무브먼트 생산을 중단하는 대신 시계 케이스를 내부에서 제작하게 된다. 덕분에 IWC는 시계 케이스를 브랜드 내에서 제작하는 몇 안 되는 스위스 브랜드가 된다. 포르셰는 1978년 올블랙 시계 이후 스테인리스보다 가벼운 티타늄으로 시계를 제조할 것을 제안하게 되고, 블륌레인은 이를 받아들여 IWC 내에 티타늄 시계 케이스 개발을 위한 R&D그룹을 만들게 된다. 티타늄 시계는 1970년 일본의 시티즌이 처음 개발했으므로 IWC의 티타늄 시계는 스위스에서 처음 제조된 티타늄 시계였다.


aaw6.png Ref. 3710 수동 크로노그래프 캘린더와 Ref. 2050 수동 퍼페츄얼 캘린더 'Romana'


커트 클라우스는 1979년 바젤 페어에서 쿼츠 인제니어 모델 등과 함께 캘린더 회중시계를 발표했다가 인기를 끌자 1983년에는 수동 크로노그래프에 캘린더 기능을 추가한 제품번호 3710을 발표하고, 1985년 다빈치와 함께 JLC의 슬림한 수동 무브먼트 칼리버 849에 퍼페츄얼 캘린더 모듈을 설치한 'Romana'를 발표한다.


avv4.png IWC Ref. 3741 메카 쿼츠 파일럿 와치

1980년대 초반 캘린더 모델로 시작된 컴플리케이션은 비슷한 다이얼 배치를 가지는 크로노그래프 개발 경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IWC는 JLC에서 개발한 쿼츠 기술을 이용한 하이브리드 크로노그래프인 메카 쿼츠를 사용하여 현행 Flieger(파일럿) 라인의 첫 모델인 제품번호 3741의 파일럿 와치를 발매하게 된다. 1994년에는 JLC의 자동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마크 12와 밸쥬 7750을 사용하는 플리거 크로노그래프가 등장하며 IWC의 군용 시계 라인이 만들어지게 된다.


쿼츠 시계가 등장하던 시기에 에드먼트 캡트가 설계했다가 생산이 중단되었던 밸쥬 7750은 IWC를 통해 기계식 시계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85년 밸쥬 7750에 퍼페츄얼 캘린더 모듈을 설치한 다빈치를 발표했던 IWC는 밸쥬 7750을 베이스로 르노&파피에서 개발한 미니츠 리피터 모듈을 설치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게 된다.

aav1.png IWC Ref. 3770 Grande Complicaiton


1986년 블륌레인은 막 개업한 르노 & 파피를 찾아가 IWC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에 사용할 미니츠 리피터 모듈의 개발을 의뢰하게 된다. 3년간의 개발을 거쳐 1989년에 완성된 미니츠 리피터 모듈에 커트 클라우스가 개발한 퍼페츄얼 캘린더를 결합하여 밸쥬 7750에 기반한 1990년 IWC 최초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 발표된다.


hab5.png


한편, 1970년대 IWC는 기술자들을 대량 해고했으나, 1985년 다빈치의 발표와 성공에 힘입어 젊은 시계 기술자들을 고용하게 된다. 1990년 가을에 IWC의 R&D 팀장으로 입사한 리처드 하브링은 밸쥬 7750에 스플릿 세컨드 기능을 추가하는 과제를 받게 된다. 1992년 하브링이 완성한 스플릿 세컨드 기능을 사용하여 1992년 IWC의 기계식 파일럿 라인의 첫 시계였던 도펠 크로노그래프(Doppel Chronograph)가 발표된다. 스플릿 세컨드(split second)는 크로노그래프의 초침이 2개인 크로노그래프로 시계의 표준어인 프랑스어로는 라트라팡테(Rattrapante)로 불리며, 독일어로는 IWC가 사용하는 도펠(영어로 double을 의미)로도 불린다. 크로노그래프가 보급형 시계로 다량 사용되어 스플릿 세컨드가 크로노그래프의 컴플리케이션 기능으로 인정되고 있다.


hab7.png


리처드 하브링은 IWC에 입사하기 전 오스트리아의 시계학교에서 투루비용을 만들어 1985년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은 아틀리에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리처드 하브링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블륌레인에 의해 1990년 IWC에 채용되었다. 블륌레인은 리처드 하브링이 스플릿 세컨드를 개발한 직후 밸쥬 7750에 설치할 투루비용 개발을 지시하게 된다. 리처드 하브링은 티타늄과 볼베어링을 사용하여 손목시계 사용할 수 있는 초경량의 투루비용 케이지를 설계하게 된다. 커트 클라우스의 퍼페츄얼 캘린더, 르노&파피의 미니츠 리피터, 하브링이 설계한 스플릿 세컨드와 투루비용을 하나로 모으면 슈퍼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aav2.png


1993년 IWC의 125주년을 기념하여 투루비용까지 포함하는 IWC의 슈퍼 컴플리케이션 '일 데스트리에로 스카푸시아(Il Destriero Scafusia, Warhose of Schaffhausen)'가 발표된다. 1991년 블랑팡에서 1735 슈퍼 컴플리케이션이 발표한 지 2년 후였다. 블랑팡과 IWC의 컴플리케이션 경쟁의 마지막 피날레였다.


aav7.png


1991년 IWC의 125주년 기념 모델들로 포르투기즈 한정판 1,750개(스틸 1,000개, 로즈 골드 500개, 플리티늄 250개)가 등장한 것이 IWC를 대표하는 현행 포르투기즈의 출발점이었다.


1a5.png IWC Ref. 3712와 Ref. 3714


포르투기즈가 정규 제품으로 등장한 것은 1995년의 제품번호 3712이며 리처드 하브링이 개발한 스플릿 크로노그래프를 추가한 밸쥬 7750을 6-12 섭다이얼로 변경한 제품이었다. 3년 후인 1998년에는 제품번호 3714의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출시되어 IWC 큰 시계의 대표 모델로 성장하게 된다. IWC의 크로노그래프는 파일럿 라인은 물론 포르투기즈 라인에서도 스플릿 세컨드 모델이 자동 크로노그래프 보다 먼저 출시되었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컴플리케이션 경쟁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브랜드들과의 경쟁을 위해 컴플리케이션부터 만들고 이를 단순화한 보급형 모델이 나중에 등장했던 것이다.


dav4.png IWC Ref. 3752 다빈치 투루비용


1999년에는 퍼페츄얼 캘린더+크로노그래프+투루비용이 다빈치 모델로 등장한다. 1993년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면서 개발했던 투루비용을 1985년의 다빈치와 결합하면서 투루비용 케이지를 보여주기 위해 수동으로 변경한 모델이었다. 1985년에 다빈치를 시작으로 1990년의 미니츠 리피터를 결합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1993년 투루비용까지 포함하는 슈퍼 컴플리케이션의 발표를 통해 IWC는 컴플리케이션의 모든 기술들인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와 투루비용을 8년간에 걸쳐 모두 완성하게 된다. 그리고 컴플리케이션을 단독으로 혹은 두 개 이상 다양하게 결합함으로써 스위스에서 가장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qw28.jpg


올블랙 시계, 티타늄 시계를 개발했던 포르셰 디자인과의 공동 작업, 커트 클라우스가 여가 시간에 개발하던 문페이스에서 시작된 퍼페츄얼 캘린더를 이용한 '다 빈치'에서 시작된 컴플리케이션과 1991년의 한정판 포르투기즈의 발매 등으로 이어진 IWC의 부활은 블륌레인이 대중적인 시계 회사인 융한스를 떠나 하이엔드 시계 사업에 참여하여 얻은 첫 번째 성과였다.


avv7.jpg


블륌레인이 VDO로 옮기기 전에 근무한 융한스는 2차 대전 때 수백 명의 포로들이 일하던 독일의 전쟁물자 생산기지였고, 그 대가로 2차 대전 말 프랑스군에 의해 폐허가 된 회사였다. 그러나 종전 후 서독에 위치하여 1950년대 고급시계를 개발 판매하며 서독의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융한스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쿼츠 시대가 시작된 1971년에는 자체 쿼츠 시계 개발에 성공하고,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공식 시계였다. 1991년에는 세계 최초로 GPS 방식의 'Mega 1'을 발표하여 쿼츠 시대의 이정표를 만들며 일본의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와 경쟁할 수 있는 유럽의 시계 대기업이었다. 그러나 쿼츠 기술 개발에 전념하던 융한스에서 VDO로 옮긴 블륌레인이 블랑팡의 비버와 함께 기계식 시계 부활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3. Jaeger LeCoultre


qw18.jpg Jaeger LeCoultre의 항공기 클럭 Chronoflite


1978년 야거 르 쿨트르의 상황은 IWC보다 안 좋은 상태였다. 1868년 회사 창업 시부터 무브먼트와 함께 완성품 시계를 판매해왔던 IWC와 달리 Jaeger LeCoultre는 1833년의 창업연도와 무관하게 1905년 Jaeger와 만난 이후 비행기와 자동차의 계측기 등 무브먼트 사업 외에 정밀 카메라 개발 등 다른 일들을 벌이며 시계 브랜드로서의 시작은 IWC에 비해 출발이 늦었다. 시계 브랜드로서의 역사가 짧아지면 역사책에 등장하는 시계 모델이 적어지는 것이다. 시계 브랜드로서의 JLC의 역사는 Reverso와 함께 출발하게 된다. JLC의 역사에서 리베르소 모델이 중요한 이유이다.

qw20.png 1930년대 초창기 Reverso


1905년 항공기 계측기 메이커였던 에드몽 야거에 이어 1931년 인도에서 폴로 경기를 보며 리베르소를 착상했던 세사르 드 트레이(Cesar de Tery)와의 인연은 시계 역사에서 JLC가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1930년 트레이가 회전 가능한 시계에 대한 특허권을 인수하며 리베르소 개발의 시작이었다. 무브먼트를 제조할 수 없었던 트레이는 오랜 친구인 쟈크-데이비드를 만나 함께 리베르소를 개발하게 된다. 리베르소를 처음 개발했을 때 자체 판매보다는 시계 판매를 위해 무브먼트를 공급하던 파텍 필립, 카르티에 등을 찾아다녔다. 결국 하이엔드 메이커들이 수십 개만 주문하며 망설이자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리베르소를 처음 발매할 때도 마땅한 상표가 없어서 'REVERSO'라는 시계 명칭을 브랜드로 사용할 정도로 Le Coultre는 소비자들에게는 낯선 브랜드였다. 그 결과 1931년 이후 1937년 Jaeger를 인수할 때까지는 항공기와 자동차 계기판에서 유명 브랜드였던 'Jaeger'의 브랜드로 시계를 판매하기도 했다.


hab11.png


하지만 마케팅 부담이 큰 완성품 시계를 판매하는 대신 무브먼트 공급 등 최종 판매 회사의 하청 업체로 남는 것이 경제적 격변기에는 도리어 유리한 것이다. 스와치 그룹에서 무브먼트 제조 대기업인 ETA가 중요한 이유이다. 1983년 오메가의 SIHH와 합병할 당시에도 ETA S.A.는 흑자였다고 한다. 오메가 등 스위스 브랜드들을 살리기 위해 ETA가 희생한 합병이었던 것이다. 물론 완성품 브랜드에 납품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무브먼트 업체를 생각한다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리에 도달하게 된다. 스위스 브랜드와 무브먼트 공급업체의 공생을 위해 탄생한 것이 ETA를 기반으로 한 스와치 그룹의 역사인 것이다.


hab8.png


1833년 창업 이후 1937년까지 100년 이상 하이엔드 브랜드에 무브먼트 납품 업체였던 Le Coultre는 회중시계 시대에 대부분의 브랜드가 몰락했던 1차 대전과 대공황으로 이어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기에 여기저기에 공장과 판매점이 생기자 'SAPIC'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Jaeger의 시계 사업, 리버소를 개발한 트레이의 사업을 통합하게 된다. 그리고 한 동안 이들 업체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합병 기업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 시기 자크-데이비드는 LeCoultre 가문의 흩어진 지분들을 모으고, 파텍 필립의 지분을 일부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2년 파텍 필립의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다이얼을 만들던 스턴 가문에 지게 된다. 하지만 스턴 가문이 파텍 필립을 인수하며 자체 무브먼트 개발을 시작하자, 1938년 바쉐론 콘스탄틴의 지분 일부를 인수하여 SAPIC에 합병함으로써 1965년까지 바쉐론 콘스탄틴과 한 가족이 되었다.


faf4.png JLC 칼리버 818과 VC 칼리버 1014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제조된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들의 무브먼트는 대부분 JLC 무브먼트이다. JLC가 품질(무브먼트)에서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수준이면서 가격은 IWC와 롤렉스의 가격이라 가성비가 좋은 시계라는 명성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850년대부터 파텍 필립에 무브먼트를 공급했던 LeCoultre는 1930년대부터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에 무브먼트를 공급하게 된다. 르 쿨트르가 '스위스 하이엔드 시계의 심장' 혹은 '와치메이커의 와치메이커'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1937년 Jaeger S.A.의 시계 부문과 통합하면서 Jaeger-LeCoultre가 만들어졌고, 이후 본격적인 시계 브랜드로 출발하며 다른 브랜드에는 없는 개성 있는 시계들을 발매하게 된다. 고급 무브먼트 납품 사업과 자체 브랜드의 시계를 판매하는 사업을 병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1년에 발매한 리버소의 인기로 JLC는 무브먼트 자체 개발 능력을 통해 다른 브랜드에서는 제조하기 어려운 틈새시장을 발굴하게 된다.


fav23.png


1951년에 등장한 벌케인(Valcain) 크리켓(cricket)에 자극을 받아 개발한 'Memovox', 자동 무브먼트와 함께 발표한 퓨처매틱 등이 개발되어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된 JLC의 개성적인 시계를 만들던 시기이다. 이후 자동 알람, 다이버 알람 등 알람시계는 리베르소(Reverso)와 함께 손목시계 역사에서 JLC만의 독보적인 분야로 남게 된다. 'Memovox'는 1956년 자동 모델로 발매되고, 1959년에는 'Deep Sea Alarm Automatic' 다이버 시계, 1965년에는 폴라리스(Polaris)로 출시된 JLC의 전성기에 판매된 대표적인 시계였다.


fav29.png


무브먼트와 각종 정밀 기계 제조 전문에서 시계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JLC는 1948년 쟈크-데이비드 르 쿨트르가 죽자 서서히 내리막을 겪게 된다. 카르티에 형제들이 죽은 후 카르티에가 내리막 길을 걷다가 지분을 매각하고 결국 브랜드 전체가 남들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VDO가 인수한 JLC의 지분은 파베 로우바가 가지고 있던 SAPIC의 55% 지분이었다. VDO는 1978년 파베 로우바의 지분을 인수하자마자 바쉐론 콘스탄틴이 보유한 JLC의 지분 25%와 은행이 보유한 지분 20%를 전부 인수하게 된다. 그 후 르 쿨트르의 공장에서 제조하는 무브먼트에 의존하던 오데마 피게에 JLC의 지분 40%를 팔아 현금을 확보하게 된다. 즉, JLC는 VDO가 인수했을 때 지분 100%를 보유했던 IWC와 달리 VDO가 60%의 지분을 오데마 피게가 4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분 구조 외에도 IWC가 독일 국경에 위치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회사였고, JLC가 프랑스에 가까운 발레 드 쥬에 위치하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회사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JLC의 부활은 IWC에 비해 늦어지게 된다.


귄터 블륌레인은 JLC 인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뒤섞인 상태였다. JLC는 크리스천 디오르에 납품할 펜과 라이터 등의 럭셔리 제품들도 만들고 있었다. 물론 회사의 중심 사업은 무브먼트를 제조하는 것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회사의 어느 부문도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qw27.jpg 앙리-존 벨몽과 귄터 블륌레인

그 무렵 프랑스의 시계 브랜드인 예마(Yema)를 물려받았다가, 프랑스의 쿼츠 무브먼트 개발과정에서 경영에 어려움을 느끼고 1982년 예마(Yema)를 매각한 앙리-존 벨몽(Henri-John Belmont, 1934-2022)이 1985년 LMH에 입사하게 된다. 시계 업체를 운영한 경험을 가진 앙리-존 벨몽이 JLC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블륌레인과 함께 JLC를 시계 브랜드로 회생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


1978년 JLC를 인수한 VDO는 JLC가 파베 로우바에 인수되었던 시절인 1972년 이태리의 판매 대리점에서 JLC 공장에 남아 있던 200개의 케이스를 사용하여 발매되어 매진을 기록한 리베르소를 통해 재탄생했으나 품질 문제로 실패했던 리베르소를 1979년 바젤 페어에 출품하게 된다. 당시 JLC에서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한 쿼츠 시계였다. JLC의 리베르소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다른 소형 업체들에서 리베르소의 카피제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1974년의 재판매가 실패한 이유가 방수 문제였으므로 1981년에는 방수 기능을 가진 리버소의 케이스 개발이 JLC 내에서 진행되어 1985년에는 방수 기능을 가진 리버소가 개발된다.


ava1.png


이어 1986년 350개 한정판으로 메모복스 쥬빌리 모델로 판매한다. 그리고 1989년에는 IWC의 다빈치에 사용된 퍼페츄얼 캘린더를 채용하여 Grand Reveil가 발매된다. 태생이 무브먼트 공급업체였던 JLC는 IWC와 달리 다양한 무브먼트를 제조해 왔으므로 JLC의 부활은 IWC에 비해 늦었지만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논쟁의 중심이 된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IWC의 컴플리케이션은 밸쥬 7750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어 결국 2000년대에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lc3.png


이런 과정을 거쳐 IWC 방식의 부활을 생각하던 귄터 블륌레인과 벨몽은 JLC를 시계 브랜드로 정착시키기 위해 리버소를 대표 상품으로 선정하게 된다. 1985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진행된 IWC의 컴플리케이션 모델들의 성공에 착안하여 1980년대말 JLC도 리버소의 컴플리케이션 모델들을 준비하게 된다. ETA의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한 IWC와 달리 JLC는 새로운 인하우스 무브먼트들을 개발하여 1991년 150 주년의 기념 모델을 시작으로 투루비용, 크로노그래프와 같은 컴플리케이션 리버소가 등장하게 된다. IWC 보다 몇 년 늦게 시작되었지만 JLC의 부활도 IWC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컴플리케이션 경쟁이 한창이던 1991년 만네스만이 VDO를 인수하게 된다. 만네스만은 귄터 블륌레인을 사장으로 유임시키며 그가 추진하던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블륌레인은 IWC를 부활시키고, JLC를 무브먼트 제조 업체에서 시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lc5.png


1991년 리버소가 성공한 후 1992년 블륌레인은 가장 기본적인 원형 시계 모델로 'Master Control'을 준비하도록 지시하게 된다. IWC의 성공에 이어 시계 브랜드 JLC의 부활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기 시작한 1989년부터 블륌레인은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베르 켁과 블륌레인이 국립 시계 학교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 시계 학교의 교수 중 동독의 글라슈테에서 시계 기술을 배웠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학교 수업 중 동독 글라슈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2차 대전으로 패망한 독일인들의 입장에서도 독일의 자긍심을 일깨워 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국에 일정 규모의 시장을 확보하는 것은 세이코와 시티즌에서 보듯이 브랜드를 위기상황에서 보호하여 호황기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에 모든 스위스 브랜드들이 경쟁이 심한 유럽을 벗어나 미국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월쌈, 엘진, 블로바, 타이멕스 같은 미국 태생의 브랜드들인 것이다. 소비자들의 애국심 외에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각 나라의 보수적인 정책이 자국 브랜드의 방패막이되어주는 것이다. IWC는 독일어권의 시계회사이지만 스위스 브랜드였다.


la1.jpg 앙겔라 메르켈과 발터 랑에


1980년대 독일은 대중적인 시계를 판매하는 융한스, 중급 시계를 판매하는 Sinn, Hanhart 등의 소규모 브랜드는 있었지만 초고가의 하이엔드 시계를 만드는 브랜드는 전무했던 것이다. 자국 시장은 작고 경쟁업체가 난립하는 스위스보다는 독일 시장을 겨냥한 하이엔드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도전이었다.



4. Lange & Sohnne


lag2.jpg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종전이 되자, 전범 국가인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독일의 고급 시계 생산지였던 글라슈테는 동독에 속하게 되었다. 16살에 강제 동원되어 2차 대전 참전했다가 다리 관통상을 입고 글라슈테로 돌아왔던 랑게의 4대째 후손인 Walter Lange(1924-2017)는 랑게의 공장을 재건하려다 사유재산의 국유화에 저항하다가 우라늄 광산의 노동자로 갈 것을 명령받게 된다. 우라늄 광산에 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느낀 Walter Lange는 1948년 글라슈테를 떠나 서독의 시계 중심지인 블랙 포리스트로 탈출한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도 글라슈테를 탈출하여 합류하여 랑에 가문은 2차 대전 후 서독으로 이주하게 된다.


lag8.png


한편, 1951년 동독의 공산정권은 글라슈테 지역의 유명한 7개의 시계 회사들을 통합하여 Glashutte Original(GO)의 전신인 V.E.B.라는 국영 시계 회사를 만들게 되면서 랑에를 포함한 글라슈테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계 회사들이 모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89년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브의 글라노스트 정책에 따라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이벤트와 함께 동독과 서독이 통합되었다. 블랙 포리스트에서 시계 판매업으로 살아가던 발터 랑에는 66세로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통독이 이루어지자 마자 발터 랑에는 글라슈테로 돌아온다. 예전의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던 중 VDO의 블뤼레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랑에의 재건 작업은 MHN의 자금 지원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lag9.jpg

1989년 11월 블럼레인은 모그룹인 VDO의 합동 이사회를 열어 랑에를 재건에 투자하는 계획을 보고하게 된다. 이때 그룹 이사회 회장이 알베르 켁이었다. 블륌레인이 MHN의 사장으로 취임한 후 적자이던 회사들이 이익을 내며 흑자로 전환된 것에 만족해하던 알베르 켁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블륌레인은 이사회의 승인을 받게 된다. 그 직후 블륌레인은 발터 랑게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그 결과로 1990년 11월 29일 프랑크프르트의 공증인실에서 발터 랑에와 불륌레인은 랑에 설립에 대한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이어, Adolph Lange에 의해 1845년 설립된 지 꼭 145주년이 되는 12월 7일 'Lange-Uhren GmbH'를 드레스덴 지역 재판소에 등기하고, "A. Lange & Sohne"라는 상표를 등록함으로써 5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랑게의 재건 작업이 막을 올리게 된다.


lag11.png


발터 랑에와 블럼레인은 랑에의 옛 공장을 인수하여 랑에를 출범시킬 생각이었지만 아직 사유화되지 않고 GUB의 공장으로 사용되는 상황이어서 여의치 않게 되자 인근의 Strasser & Rohde를 인수하여 랑에의 새로운 회사로 사용하게 된다. 이어 글라슈트의 전통적인 시계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을 모집하지만 오랫동안 동독에서 살아온 기술자들은 서독으로 탈출했다가 복귀한 발터 랑에와 자본주의 회사인 VDO의 랑에 창업에 부정적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48명의 기술자들이 랑에의 재건에 참여하게 된다.


블륌레인은 랑에의 재건작업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샤프하우젠의 IWC로 보내 최신의 기술들을 배우게 한다. 스위스의 독일어권 회사인 IWC는 기술감독인 커트 클라우스를 중심으로 랑에의 무브먼트 및 신제품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lag26.png


블륌레인은 과거의 글라슈트의 회중시계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최신의 장비를 이용하여 랑에 내에서 밸런스 스프링까지 새로 만드는 방식으로 파텍 필립과 경쟁할 독일의 최상급 시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를 정하게 된다. 계획이 점차 확장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수백만 마르크가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통독후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던 시계 기술자들은 글라슈테 지역에 남아 랑에에 취업하면서 1994년 랑에는 직원 700명의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 발터 랑에와 블륌레인은 글라슈테로부터 수많은 표창장과 훈장을 받으며 글라슈테의 부흥에 기여한 인물들로 남게 되었다.


lag13.jpg


랑게의 손목시계는 하나씩 연구되고 발표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별로 별도의 팀에 의해 다양한 무브와 시계의 디자인에 대한 연구가 독립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4년 후에 발표되는 Lange one의 무브먼트인 L901, Tourbillon의 무브먼트인 L902, Arcade의 무브먼트인 L911 등이 처음부터 동시에 착수되었다. 랑게의 무브먼트 넘버의 앞의 두자라 숫자는 무브먼트 개발에 착수한 해를 표시한다. 이렇게 3년 이상을 투자하여 글라슈테의 전통에 따라 3/4 플레이트의 디자인과 고전적인 스완넥 레귤레이터와 문양이 조각된 콕을 사용하는 고풍스러운 수동 무브먼트가 탄생하게 된다.


lag15.png


대표 모델로 새로운 랑에를 상징하는 모델이 'Lange one'이었다. 투루비용을 제외한 다른 3개의 모델은 모두 2개의 날자창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이 기술은 JLC의 재건을 위해 연구되던 기술이었으나 글라슈테의 성당에 설치되어 있던 랑에가 만든 시계의 디자인에 착안하여 랑에의 첫 시계들에 채용되게 되었다.


1994년 10월 24일 100여 명의 시계 관련 잡지 기자들과 주요 딜러들을 초청하여 드레스덴의 옛 궁전에서 50여 년간 완전히 잊혔던 랑게의 시계 발표회가 열리게 된다. 4년간 연구 개발된 4개의 모델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Lange one, Lange Tourbillon, Saxonia와 Arcade의 4개 모델이었다. 기자들 외에 리테일러들도 참석했으며 당일 첫 물량으로 준비한 123개의 시계들이 모두 완판 되며 새롭게 등장한 랑에는 전 세계의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호평을 받게 된다.


기계식 시계가 럭셔리 제품으로 완벽히 복귀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하이엔드 시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필수적인 시절이었다. 랑에는 그런 논쟁을 즐기던 시계 컬렉터며 마니아들에게 가장 완벽한 하이엔드 시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lag17.png


랑에의 새로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계로 인정되는 것이 1999년 바젤 페어에서 발표되었던 다토그래프이다. 파텍 필립, 롤렉스를 비롯하여 스위스의 하이엔드 브랜드에서도 소량만 생산하는 크로노그래프는 밸쥬나 레마니아에서 제조한 에보슈를 구입하여 해당 브랜드의 스펙에 맞도록 수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랑에는 1940년대 론진 이후 처음으로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자체 개발하여 1999년 플레티늄 케이스에 검정 다이얼을 가진 '다토그래프'를 발표했다. 손목시계에서 처음 등장한 고전적인 3/4 플레이트 무브먼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랑에의 시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1999년 내내 모든 컬렉터와 마니아들은 이 시계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컴플리케이션과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가진 가장 인상적인 시계였고, 기계식 시계의 완벽한 부활을 알린 사건이었다.


다토그래프가 발표된 1999년은 랑에의 역사를 다시 한번 바꾸는 한 해가 되었다. 역사상 최대의 M&A로 자주 언급되는 영국의 보다폰과 독일의 만네스만 간의 합병이 만네스만의 허를 찌른 보다폰의 역공으로 보다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합병과정에서 LMH는 만네스만을 떠나 리치몬트에 매각된다. 1999년 부활에 성공하여 하이엔드 브랜드로 복귀한 IWC와 JLC에 이어 1994년에 등장하여 파텍 필립과 비교될 정도의 프레스티지를 얻었던 랑게를 보유한 LMH는 리치몬트 외에도 LVMH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론진에 대한 이야기에서 론진이 스와치 그룹에 남아 그 역사와 달리 대중적인 브랜드로 남게 된 것에 아쉬움을 표시한 이유가 LMH의 역사 때문이다. VDO로 인수된 후 당시 몰락한 스위스 브랜드들 중 가장 완벽하게 부활한 브랜드의 샘플이 IWC와 JLC이다. 론진이 스와치 그룹이 아닌 VDO로 인수되었다면 IWC와 JLC와 대등한 브랜드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5. 리치몬트의 LMH인수


aaav4.jpg


리치몬트의 LMH인수는 M&A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이자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사건이었다. 현재까지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99년 영국의 보다폰이 독일의 만네스만을 인수함으로써 통신회사인 보다폰에는 의미가 없는 LMH가 매각되게 된다. 1999년이면 IWC와 JLC는 매년 흑자를 기록하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랑에는 다토그래프로 주목을 받으며 파텍 필립과 경쟁하는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LMH의 인수에는 LVMH 그룹, PPR 구찌 그룹 등이 경쟁을 벌이게 된다. 1996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인수하여 관심이 없어 보이던 리치몬트는 은연중 JLC의 지분 40%를 가진 오데마 피게에 접근하여 오데마 피게의 지분을 2억 8천만 스위스 프랑에 인수하는 것으로 은밀히 LMH의 인수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시계 브랜드 인수 역사상 최대의 금액인 28억 스위스 프랑에 LMH를 인수하게 된다.


aaav11.jpg 프랑코 콜로그니와 요한 루퍼트


당시 리치몬트에는 1977년 머스트 탱크를 발표하고 1978년 스틸 산토스를 발매하며 카르티에 시계들을 성공시킨 페랭과 함께 카르티에 몽드의 이사진에서 근무했던 인물들이 주요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태리에서 1969년 카르티에 라이터 판매를 시작으로 머스트 카르티에의 로버트 코크에 의해 카르티에 몽드의 이사로 재직하게 된 대학교수 출신의 프랑코 콜로그니(1934~)가 그중 한 명이었다. '리치몬트의 추기경'이라는 별명을 붙을 정도로 1976년 카르티에 인터내셔널에 합류한 후 2000년에는 리치몬트의 보석과 시계 분야의 상임이사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1q6.png


콜로그니는 이태리 밀란의 카톨릭 대학을 졸업한 후 극장과 공연예술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며, 연극과 영화 잡지의 편집자로도 근무했다. 1969년 이태리 경제가 호황에 접어들자 대학교수이자 칼럼니스트였던 콜 로그니는 카르티에 라이터의 이태리 독점 판매권을 얻어 점포를 열게 되고, 1973년 로버트 호크에 의해 카르티에 몽드의 이사회에 초대되어 '럭셔리와 문화'라는 강의를 하게 된다. 연극 전문가에서 럭셔리 문화의 전문가로 변신한 계기였다. 카르티에 몽드를 통해 리치몬트와 인연을 맺게 된 콜 로그니는 카르티에 잡지를 창간하고 1980년 카르티에 사장, 1986년부터는 부회장으로 근무했다. 그 후 '카르티에'를 시작으로 피아제, 몽블랑, 바쉐론 콘스탄틴, 야거 르쿨트르 등 리치몬트에 인수된 브랜드들의 역사를 발간하며 리치몬트의 정신적 지주이자 상담역으로 근무하게 된다.


aaav6.jpg 안젤로 보나티


안젤로 보나티(Angelo Bonati, 1951~)도 이태리 출신으로 1980년 이태리에서 럭셔리 관련 사업을 운영하다가 1987년 이태리 세일즈 및 마케팅 이사로 근무하게 된다. 1993년 벤돔 그룹을 떠나 지로니 그룹과 투루사르디 그룹의 세일즈 및 마케팅 책임이자로 일했다. 1997년 리치몬트에서 파네라이를 인수한 후 요한 루퍼트로부터 파네라이의 사장으로 임명되어 20년 이상 파네라이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페랭, 콜로그니와 보나티로 구성된 카르티에 사단이 1980년대부터 리치몬트의 시계 브랜드를 책임져 왔고, 1999년 블륌레인과 앙리-존 벨몽이 리치몬트 그룹에 편입되면서 리치몬트의 블륌레인 사단을 만들게 된다. LMH가 리치몬트로 인수된 2001년 블륌레인이 갑자기 서거하게 된다. 앙리-존 벨몽은 블륌레인 사단을 대표하여 2001년 리치몬트의 시계 담당 사장을 지내다가 2006년에 은퇴했다. 그의 아들인 스테파네 벨몽은 1984년 로잔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1992년 IWC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1999년 JLC로 옮긴 뒤 현재 JLC의 사장으로 근무중이다.


max1.png


1991년 막스 뷰저(Max Busser)가 JLC에 입사할 때 앙리-존 벨몽이 사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1991년은 JLC Reverso의 컴플리케이션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1998년 막스 뷰저는 제네바에 위치한 'Harry Winston Inc.의 사장으로 영입된다. 막스 뷰저는 해리 윈스톤의 'Opus' 시리즈를 창안하여 AHCI 멤버들의 시계들을 한정판으로 발매하며 1990년대에 음지에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던 시계 기술자들의 이름을 시계의 이름으로 내걸고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게 된다. 2005년 막스 뷰저는 해리 윈스톤을 그만두고 MB&F를 창업하여 가장 독창적인 시계들을 발표하고 있다. 해리 윈스톤은 2013년 스와치 그룹에 인수되었다.



keyword
이전 08화카르티에와 리치몬트